월간조선 기사

[鄭淳台의 역사기행]「地上의 천당」蘇州·杭州에서 배우는 亡國史의 敎訓

中國 역사상 최고의 富國 宋나라는 돈으로 平和를 사려다 敗亡했다

글 정순태 기자  2005-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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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蘇省(강소성)의 남쪽 蘇州(소주·쑤저우)와 浙江省(절강성)의 북쪽 杭州(항주·항저우)는 上海(상해·상하이)와 더불어 현대 中國의 폭발적 경제성장을 이끄는 長江(揚子江·양쯔 강) 델타지역의 세 꼭지점을 이룬다. 上海에서 蘇州까지 150km, 杭州까지는 160km 거리다.

上海는 1842년 阿片戰爭(아편전쟁)에서 이긴 英國(영국)의 강요에 의해 開港(개항)되기 전까지만 해도 한산한 포구에 불과한 곳이었다. 이에 비해 蘇州와 杭州는 적어도 2500여 년 나이테를 지닌 古都(고도)이다.

蘇州와 杭州 지역 간의 투쟁에서 비롯된 「臥薪嘗膽(와신상담)」이란 말은 오늘날의 한국 사람들에게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원수를 갚기 위해 온갖 괴로움을 무릅씀을 뜻하는 四字成語이다.

蘇州는 중국 春秋(춘추)시대의 네 번째 覇權國(패권국)이었던 吳(오)의 도읍지이다. 「史記(사기)」에 의하면 吳는 周 太王(주 태왕)의 아들인 泰伯(태백)의 封國(봉국)이지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정도의 국력을 갖추게 된 것은 기원전 6세기 壽夢(수몽)의 집권 이후의 시기인 것으로 보인다. 壽夢의 손자대인 闔閭(합려)의 시대에 이르면 吳는 春秋의 패권을 겨루게 된다.

吳나라는 지금의 杭州 지역에 웅거한 越(월)나라와 격렬하게 싸웠다. 당연히 吳나라 사람과 越나라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거렸다. 여기서 「吳越同舟(오월동주)」라는 또하나의 四字成語가 생겼다. 사이가 지독히 나쁜 사람끼리 한 배를 탔다는 뜻이다.

기원전 496년, 吳王 합려는 越나라를 쳤다. 지금의 嘉興(가흥·자싱)에서 越王 允相(윤상)과 전투를 벌였다. 越軍은 의외로 강했다. 합려는 발가락에 약간의 戰傷(전상)을 입었는데, 회군 중에 갑자기 상처가 덧나 사망했다. 현대 의학용어로 말하면 파상풍에 걸렸던 것 같다(嘉興은 오늘날 蘇州와 杭州를 잇는 고속도로의 중간지역이다).

합려의 아들 夫差(부차)가 아비의 원수를 잊지 않기 위해 딱딱한 장작을 바닥에 깔아놓고 그 위에서 잠을 잤다. 이것이 「臥薪(와신: 장작더미 위에 누움)」이다. 富國策(부국책)의 하나로 夫差는 水路(수로)를 개착했다. 그것이 바로 北京과 杭州를 연결하는 京杭大運河(경항대운하)의 핵심구간이 되는 溝(간구)이다. 長江과 淮河(회하·화이허 강)를 연결하는 糧道(양도)로서 기원전 48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도 蘇州 일대엔 숱한 샛강이 실핏줄같이 흐르고 있다. 여기에 人工까지 가하여 물길을 四通八達(사통팔달)로 텄던 것이다. 物産(물산)이 풍부한데다 物流(물류)까지 원활해진 吳는 더욱 富國이 되었다. 이제, 夫差는 軍備(군비) 증강의 드라이브를 걸었다.


絶世의 美女 첩자 西施의 色香

允相의 死後(사후)에 越王에 오른 勾踐(구천)은 吳의 부국강병책을 방관할 수 없었다. 그는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吳나라로 침공했지만, 오히려 太湖(태호) 안의 섬인 夫椒(부초)라는 곳에서 완패, 본국으로 도주했다. 吳軍은 越軍을 추격, 越軍의 최후방어선인 會稽山(회계산)을 물샐틈없이 포위했다.

越王 구천은 進退維谷(진퇴유곡)이었다. 드디어 그는 名宰相 范?(범려)의 조언을 듣고 항복, 夫差에게 무릎을 꿇고 臣從(신종)을 맹세했다. 그는 보물을 헌상한다든지 하여 夫差의 심기를 입안의 혀처럼 맞춰 주었다. 심지어는 夫差의 신병 치료를 위해 치질을 핥았다는 說까지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은 복수심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복수심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 구천은 항상 쓰디쓴 쓸개를 옆에 두고 잠자거나 일어날 때, 음식을 먹을 때 반드시 그 쓸개를 먼저 빨았다. 이것이 바로 「嘗膽(상담: 쓸개를 맛봄)」이다. 시나브로 그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구천아, 너는 會稽의 치욕을 잊었는가!』

越나라가 회계에서 항복했던 것은 기원전 493년의 일이었다. 吳王 夫差의 복수심은 3년 만에 풀려 버렸지만, 越王 구천의 그것은 실로 22년의 세월 동안 지속된다. 內政을 정비하고 군비를 증강하여 자신감을 가진 越王 구천은 吳를 치려고 했지만 名宰相 범려는 그때마다 越王의 輕擧妄動(경거망동)을 만류했다.

吳의 名참모 伍子胥(오자서)는 越王 구천의 속셈을 간파했다. 그는 吳王 夫差에게 越王을 베어 後患(후환)의 염려를 없애라고 진언했다. 그러나 부차는 듣지 않았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越王 구천은 吳王 夫差를 타락시키기 위해 絶世(절세)의 美女 1인을 진상했다. 그녀가 지금도 美女의 대명사로 이름 높은 西施(서시)이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美人 베스트 4」는 西施, 王昭君(왕소군), 貂蟬(초선: 실존인물 여부는 불명확함), 楊貴妃(양귀비)로 손꼽힌다.

「吳越春秋(오월춘추)」에 의하면 그녀는 원래 회계산 서쪽의 산골 浣紗(완사)에서 살았던 처녀로서 「西子」라고 불렸다. 越의 宰相 범려는 그녀에게 美服(미복)을 입히고 3년간 歌舞音曲(가무음곡)과 교태를 가르친 후 吳王의 궁전으로 들여보냈다. 그녀는 越나라를 위한 고등 첩자로 암약했다.

吳王은 그녀의 色香(색향)에 취했다. 그는 姑蘇臺(고소대)를 드높이 짓고 西施와 함께 밤샘 연회에 몰입하거나 太湖에서 船遊(선유)하는 날이 많았다. 당연히 통치는 게을러지고 국고는 탕진되었다.

伍子胥(오자서)는 吳王 夫差에게 국정의 쇄신을 간언했다. 기분이 상한 夫差는 오자서에게 자결토록 강요했다. 오자서는 자결 직전에 吳의 패망을 예언했다. 그는 측근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의 무덤에 가시나무를 심어 그것이 자라면 吳王의 棺(관)을 만들어라. 내 눈을 빼내 姑蘇城(고소성: 지금의 蘇州) 동문 위에 걸어 두어 越軍이 진입하는 것을 보게 하라』

그런데도 夫差는 자만에 빠져 있었다. 그는 거듭 대군을 이끌고 中原(중원: 黃河 중류 지역)으로 진출, 천하의 「균형자」가 되려는 패권쟁탈에만 열중했다. 국력이 크게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千載一遇(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越王 구천이 아니었다.

구천은 夫差가 外征中에 빈 틈을 노려 吳로 침공했다. 배후에서 虛(허)를 찔린 夫差는 급거 고소성으로 회군했다. 그러나 吳軍이 歸城(귀성)하자마자 越軍은 고소성을 삼중사중으로 포위했다. 고소성의 처절한 공방전은 3년간이나 계속되었다. 드디어 기원전 473년, 고소성이 깨지고 그토록 富强(부강)을 자랑하던 吳가 멸망했다. 吳王 夫差는 구천에게 치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자결했다. 오자서가 예언한 바로 그대로였다.

吳의 멸망은 오늘의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남겼다. 제 아무리 강국이라 할지라도 교만해지면 멸망한다는 사실을 실증해 보였기 때문이다. 고소성을 쌓은 해는 합려왕 원년(기원전 514년)이다. 축성을 지휘했던 인물이 바로 吳王 夫差에게 忠諫(충간)을 했다가 죽임을 당한 오자서이다.


고뇌하는 인간의 메카 寒山寺

亡國의 비애를 간직한 고소성은 蘇州(현재 인구 110만 명) 중심가에서 그리 멀지 않다. 유명한 고찰 寒山寺(한산사)와 운하를 사이에 두고 위치해 있다. 寒山寺는 고소성을 감싸고 흐르는 護城河(호성하)의 바로 서쪽 건너편에 위치한 절이다. 우선 寒山寺를 찾아 나섰다.

寒山寺 들머리길에는 서너 개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플래카드엔 中唐(중당)의 시인 張繼(장계)의 「楓橋夜泊(풍교야박)」이라는 七言律詩(칠언율시)가 한 구절씩 차례로 쓰여 있다. 「楓橋夜泊」이라면 필자의 서재에도 걸려 있는 漢詩이다. 그래서인지 엄청 반가웠다.

張繼는 唐나라 玄宗 때(713~756)의 인물이지만, 생년과 몰년은 확실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蘇州 일대에서만은 唐代의 대표적 시인 李白(이백)과 杜甫(두보)보다 훨씬 인기가 높다. 그의 詩는 쉽고 리듬도 절묘하다.

月落烏啼霜滿天(위예우티샹만텐)
江楓漁火對愁眠(장펑위훠두이슈)
姑蘇城外寒山寺(구쑤청와이한산쓰)
夜半鐘聲到客船(뤄판쭝썽따오커촨)

달이 지고 까마귀 우니 서리가 하늘에 가득하고/강변의 단풍과 고기잡이 하는 불로 잠 못 이루는데/姑蘇城(고소성) 밖에 있는 寒山寺(한산사)에서/夜半(야반)의 종소리가 客船(객선)에 와닿는다.

張繼는 다섯 번 과거를 본 끝에 進士(진사)가 되어 감찰관과 지방관을 지낸 인물이다. 「楓橋夜泊」은 張繼가 세 번째로 응시한 과거에 낙방하고 귀향하다가 寒山寺 앞 楓橋(풍교) 나루에 정박한 客船에 머물며 읊은 詩다.

당시 客船은 야간에 入城할 수 없었다. 저녁 무렵에 풍교 나루에 닿은 객선의 승객들은 하선하여 인근 객잔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蘇州 美女들의 권주가를 들으며 술잔도 기울였을 터이다.

그러나 과거에 낙방한 그에겐 여비마저 빠듯하여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客船에 남아 몸을 뒤척이다가 새벽 3시쯤 寒山寺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찰의 첫 예불은 대개 새벽 3시에 개시되기 때문이다.

寒山寺 입장료는 20위안(우리 돈 2500원 상당). 출입구를 들어서 첫 번째 만나는 건물의 바람벽에 「楓橋夜泊」의 詩句가 달필로 쓰여 있다. 寒山寺 경내에 세워진 張繼의 詩碑(시비)만 다섯 개에 이른다. 아무튼 張繼의 詩 한 수로 寒山寺는 고뇌하는 인간의 「메카」가 된 셈이다.

마침, 寒山寺의 그 유명한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종소리를 담은 녹음테이프를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틀어 주는 것이다. 종소리를 들으며 「楓橋夜泊」을 가만히 읊어 보는 맛이 각별하다. 섣달그믐날이면 寒山寺에서 108번의 종을 쳐 지난 한 해의 시름을 잊게 한다는데, 그때 입장료는 평소의 10배인 200위안으로 껑충 뛴다고 한다.

寒山寺는 南朝시대 국가인 梁(양)의 武帝(무제)에 의해 6세기 初頭에 초창되었다고 하니 유서깊은 절이다. 梁武帝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寒山寺로 불리게 된 것은 唐代(당대)였던 것 같다. 현재의 건물은 辛亥革命(신해혁명)의 해인 1911년에 조성되었다.

寒山寺의 너른 경내를 둘러보고 밖으로 나와 江春橋(강춘교)에 올라 「楓橋夜泊」의 현장 楓橋(풍교)와 마주섰다. 楓橋라는 아치型의 돌다리도 張繼의 詩로 유명해졌지만, 현재의 그것은 훨씬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


姑蘇城을 휘감은 運河

필자도 江春橋 아래 나루에서 「張繼의 길」을 따라가기 위해 작은 客船을 타고 護城河를 거슬러 올라갔다. 護城河는 姑蘇城의 垓字(해자)이며 운하의 水路이다. 필자를 실은 客船이 풍교 밑을 지난다. 운하의 폭이 점점 좁아지면서 迷路(미로)를 헤쳐나간다.

뱃사공이 잠자리채와 같은 그물로 고기를 잡는다. 그물을 낚아채는 솜씨가 여간 재빠르지 않다. 잡은 고기는 손가락만 한 것 다섯 마리였다. 강변에서 한 남정네가 고기를 찔러 잡아 올리려고 삼지창을 물속을 향해 겨누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렇게 해서 물속의 고기를 잡는다니까 槍(창)의 絶頂高手(절정고수)가 아니겠는가.

護城河의 물은 생활하수로 오염되어 있었다. 최근 들어 정화작업에 의해 전보다는 크게 맑아졌다지만, 아직도 거기서 잡은 물고기를 요리해 먹으라고 한다면 거절해야 할 정도이다.

한 아낙네가 강가에서 광주리를 까불어 이름 모를 나물을 씻고 있었다. 護城河의 정화작업이 시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물의 도시」 蘇州의 명성에 금이 갈 것 같지는 않다. 「그녀」에게는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蘇州는 21세기에 번영할 도시이다. 70km2에 달하는 대단위 최첨단 산업기지를 건설, 많은 外資(외자)기업이 이미 들어서 있다. 이곳에는 三星그룹의 반도체와 LCD(液晶표시장치) 메이커 등 4개 생산법인이 입주해 가동 중이다.

이제, 運河의 폭이 점점 넓어진다. 客船은 이름 모를 나루에 닿았다. 「踏頭(답두)」라는 돌계단을 걸어 뭍에 올랐다. 姑蘇城의 南門인 盤門(반문)에 들렀다. 姑蘇城으로 진입하려던 선박을 임검하는 요새이다. 선박이 진입하면 앞뒤의 閘門(갑문)이 닫히고 경비병들이 계단을 통해 내려가 선박을 조사하던 체제를 갖추고 있다. 입장료 25위안.

「엎드린 호랑이 모습」이라는 야산 虎丘(호구)에 올랐다. 蘇州에 와서 이곳을 찾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명소이다. 여기서 볼 만한 것은 단연 지하 깊숙이 파인 「劍池(검지)」이다.

吳王 합려의 무덤 축조에는 연 10만 명의 인부가 징용되었다고 한다. 3중의 廓(곽)을 만들고 바위 속으로 파고 들어간 무덤 안에 3000자루의 名劍(명검)을 묻었다고 전해진다. 합려가 죽은 지 270년 후, 중국 천하를 통일한 秦(진)의 始皇帝(시황제)가 그의 무덤을 파헤쳤다.

그 목적은 3000자루의 名劍을 얻는 데 있었다. 그만큼 吳의 명검은 유명했다. 오자서가 죽을 때 吳王 夫差가 내린 검이 「촉루」였고, 합려가 前王이었던 僚(요)를 암살할 때 사용한 검이 「魚陽(어양)」이었다는 것 등은 史書에 기록되어 있다.

越도 劍의 명산지였다. 30여 년 전 日本에서 개최된 「中國 출토 文物展」에는 越王 구천의 銅劍(동검)이 출품되어 세계적 관심을 모은 바 있다. 2500여 년 전의 그 劍에는 녹 하나 슬지 않았다. 이는 외면을 鍍錫(도석)하는 기술이 당시에 이미 개발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劍에 관한 한 吳越은 秦보다 先進 지역이었다. 秦始皇이 劍 3000자루가 파묻혀 있다는 합려의 무덤에 눈독을 들인 것은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秦兵(진병)이 무덤을 파고 들어가던 중에 돌연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놀란 秦始皇이 검을 뽑아 참하려고 했지만, 겨냥이 벗어나 곁의 돌멩이를 치고 말았다. 이 사건 때문에 발굴은 중지되었다. 盜掘(도굴)의 구덩이는 그대로 남아 지금 그곳에 물이 고여 연못이 되었다. 그 곁의 자연석에는 「虎丘劍池(호구검지)」라고 새겨져 있다. 唐의 서예가 중 제1인자로 손꼽히는 顔眞卿(안진경)의 글씨다.

虎丘 앞에는 높이 50m 7층 塼塔(전탑: 벽돌탑)이 서 있다. 隋(수)나라 때 건립된 이 전탑은 후대의 중건·보수를 거쳐 지금은 蘇州의 심벌이 되었다. 탑의 하부를 관찰하니 상부의 무게 때문인 듯 동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西安의 大雁塔(대안탑) 등은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虎丘의 탑은 등반이 금지되어 있다.

蘇州는 「물의 도시」인 동시에 「정원의 도시」다. 넉넉한 자연 조건에 의해 많은 부호가 배출되어 그들에 의해 숱한 정원이 만들어졌다. 蘇州의 정원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拙政園(졸정원)이다. 입장료 70위안(우리 돈 8750원).


庭園 ·비단·刺繡

졸정원은 唐代 사람인 陸龜蒙(육구몽)의 저택이었다. 생애를 통해 벼슬살이를 하지 않으면서 밭을 갈고 茶를 즐기며 많은 저작도 남긴 문화인이었다.

元代에는 大宏寺(대굉사)라는 절이 되었고, 明의 嘉靖 초년(16세기 전반)에는 王敬之(왕경지)라는 御史(어사: 감찰관)의 별장으로 개조되었다. 「졸정원」이라 이름 지은 사람이 바로 王敬之라고 한다. 御史(어사)를 지낸 그가 이런 호화 별장을 소유했다면 淸白吏(청백리)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 후 王敬之의 몇 대 후손이 도박을 좋아해 결국 졸정원의 소유권을 빚쟁이 셋에게 넘기고 말았다고 한다. 그 바람에 졸정원은 3分 되기도 했다. 淸代에는 이곳 주둔 滿洲八旗(만주팔기)의 將軍府(장군부)가 되었다.

19세기 후반의 太平天國(태평천국)의 시대, 蘇州는 太平天國軍에 점령되었다. 졸정원은 忠王 李秀成의 집무소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졸정원은 근대 중국사에서 중요한 유적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蘇州 정원의 특징은 「돌」에 있다고 한다. 인근 太湖의 물 밑에서 건져온 것이라는데, 표현하기 어려운 운치를 지녀 애호를 받아 왔다. 그러나 「돌의 나라」에서 살아온 필자의 눈에는 중국 최고의 돌로 이름 높은 太湖石도 모양만 좀 기괴할 뿐, 오랜 세월의 風化로 돌의 윤기를 잃은 것으로 비쳤다.

졸정원 내부를 천천히 걸으면서 蘇州의 아름다움에 취했다. 蘇州는 예로부터 물과 정원뿐만 아니라 美人, 비단, 刺繡(자수)로 이름 높다. 蘇州 지방에서 여자아이는 열두 살이면 자수를 배우기 시작한다. 중국 제1의 蘇州 자수는 「蘇繡(소수)」라고 불린다.

요즘은 좀 달라졌겠지만, 과년한 규수가 자수를 하지 않으면 아무도 데려가지 않는다고 한다. 아가씨는 시집가는 날에 반드시 알록달록하게 수놓은 자수틀을 시댁에 가지고 가서 자수 실력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강남의 중심도시였던 蘇州가 그 지위를 上海에 넘긴 것은 아편전쟁의 결과인 南京條約(남경조약) 때문이었다. 1842년 남경조약에 의해 上海가 개항됨으로써 上海가 江南 제1의 도시로 번영하게 된 것이다.

蘇州는 「물의 도시」이긴 하지만, 그 좁은 水路로는 근대적 대형 증기선이 진입할 수 없었다. 이로써 蘇州는 상업과 무역의 王座를 上海에 넘기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蘇州는 비단과 공예 제작의 중심적 지위는 아직도 지켜오고 있다. 필자는 蘇州에서 비단 이불 하나를 샀는데, 값(650위안)도 싸고 감촉도 좋고 날개처럼 가벼웠다.


한 떨기의 꽃, 蘇州 美女

지난 5월1일 일요일 아침 8시, 蘇州의 竹輝(죽휘)호텔에서 승용차를 타고 빗발을 헤치며 杭州를 향해 출발했다. 봄비로 촉촉해진 蘇州의 거리는 더욱 情趣(정취)가 있다. 꽃수를 놓은 스카프와 앞치마로 자신을 한 떨기 꽃처럼 치장한 아가씨들의 자태에서 「蘇州 미녀」가 名不虛傳(명불허전)임을 느낀다.

그녀들의 옷과 장신구는 모두 스스로 재단하고 바느질해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자기 앞치마에 사계절을 대표하는 복숭아꽃·연꽃·국화꽃·매화꽃과 행복을 상징하는 까치·원앙·잉어 따위를 수놓는다. 필자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엔 우리나라 여학생들도 자수를 하여 서로의 솜씨를 뽐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자수틀과 베가방을 들고 등·하교하는 여학생의 아기자기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蘇州 톨게이트를 빠져 나와 30km쯤 달렸을까. 蘇州 근교 吳縣(오현)에 이르니 뽕밭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곳곳에 샛강이 흐르고, 그 위로는 소형선이 다닌다. 예로부터 「南船北馬(남선북마: 江南에서는 배, 華北에서는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멀리서 흰 고니들이 떼를 지어 물장난을 치면서 모가지를 길게 늘여 「꿱 꿱」 소리치고 있다.

불현듯 「여성적 거리」 蘇州로 되돌아가 하루를 더 묵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그러나 행선지인 杭州도 蘇州와 짝하여 風光이 明媚(명미)한 古都로 이름 높지 않은 가.

고속도로를 100km쯤 달려 嘉興(가흥) 휴게소에 들렀다. 넓지 않은 휴게소는 人山人海를 이루고 있었다. 중국인 운전사는 곡예를 부린 끝에 겨우 주차에 성공했다. 화장실 통로도 터질 듯 만원이었다. 5월1일은 1주일간 노동절 휴가의 첫날이어서 유별나게 유람을 즐기는 중국인들의 大이동 시기이다.

근근이 휴게소를 빠져나와 다시 고속도로에 올랐다. 「水滸傳(수호전)」의 魯智深(노지심)을 연상시키는 중국인 운전사(스물다섯 살인 그의 몸무게는 130kg에 육박할 듯 보였다)는 시속 100km로 빗길을 아슬아슬하게 달렸다. 안전벨트가 이미 떨어져 나간 고물차였다.

고속도로 곳곳에는 사고 차량들이 엉켜 있기도 했다. 하늘에 운을 맡겼다. 중국에 진출한 「北京현대」가 제작한 쏘나타·엘란트라가 자주 눈에 띄었다.

吳王 합려가 戰傷(전상)을 입은 곳은 史書에 「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嘉興縣 서남방 마을이지만, 시간에 쫓겨 이 古戰場(고전장)의 답사는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하늘에는 天堂, 땅에는 蘇州와 杭州』

170km를 달려 杭州 톨게이트에 진입했다. 관광객들이 탄 차량들로 들머리길부터 좀 붐볐다. 인구 400만의 杭州에 엄청난 관광객까지 몰렸으니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그래도 야자나무 등 南國의 가로수가 줄지어 서 있어 「東方 休閑도시의 首都」임을 뽐내고 있었다.

『하늘에 天堂이 있고 땅에는 蘇杭(소항: 蘇州와 杭州)이 있다』

그렇다면 杭州는 蘇州와 더불어 이 세상의 파라다이스가 아닌가. 필자가 묵을 호텔은 杭州 최고의 경승지 西湖(서호)가 바라보이는 「望湖賓館(망호빈관)」이다. 西湖는 杭州 시가지의 서쪽 끝에 위치해 있어 도심을 관통해야만 했다. 교통혼잡 때문에 도심을 찬찬히 볼 수 있는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詩文 중에서 西湖는 「西子湖」 또는 「西施湖(서시호)」로 표현된다. 西子는 吳王을 「사랑의 포로」로 만든 천하의 절색 西施다. 吳나라 멸망 후 西施는 越의 宰相 범려를 따라 西湖에서 노닐었다는 기록도 있다.

西施와 함께 西湖의 船遊(선유)를 즐긴 범려의 그 후 處世(처세)도 매우 흥미롭다. 범려는 새의 주둥이와 같이 뾰족한 越王 구천의 相을 보건대 『고난은 함께 하여도 부귀영화는 함께 할 인물이 아니다』는 名言을 친구 大夫種(대부종)에게 남기고 미련 없이 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陶業(도업)과 상업에 종사하여 당대 최고 부호의 반열에 올랐다.

범려가 西施와 함께 은거하면서 陶業을 시작한 곳은 太湖 서쪽 지방인 宜興(의흥)이었다. 그는 이곳의 점토로 도자기를 만들 수 있음을 알고, 백성들에게 점토를 퍼다가 도자기를 빚게 하고, 그것을 가마에서 구워 냈다. 범려의 지도를 받아 만든 도자기는 명품으로 소문났다.

도공들은 그들에게 새로운 기술을 가르쳐 준 범려를 기리기 위해 生사당을 세우고 그를 「陶朱公(도주공)」으로 받들었다. 지금도 범려의 생일인 음력 4월7일이 되면 江南 각지의 도공들은 향불을 피워 요업의 발전에 공헌한 그에게 제사를 올린다.

한편 친구 범려의 권유를 뿌리치고 계속 越王 구천을 섬겼던 大夫種은 天下의 覇者가 된 이후 교만해진 구천에게 끝내 烹(팽: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범려와 大夫種의 인간경영학과 그 終局(종국)―. 杭州에 가면 이렇게 역사에서 배울 일이 수두룩하다.

그렇다면 越나라는 어떻게 되었는가? 浙江(절강)에 본거지를 둔 越은 吳를 멸망시켰던 시기가 최성기였다. 이후 戰國시대에 들어서는 국위를 떨치지 못했다. 기원전 334년, 구천의 6대손 越王 無彊(무강)이 이웃 강국 楚(초)나라에 出兵했다가 되레 대패했다. 그 이후 浙江의 땅은 楚의 판도로 편입되었다.

秦始皇은 천하를 통일한 후 郡縣制(군현제)를 시행, 이 땅은 會稽郡(회계군)이 되었다. 後漢의 順帝(126~144) 이후는 吳郡에 속하는 땅이 되었다. 三國시대 이후는 東安(동안)·吳興(오흥)·錢塘(전당) 등의 郡名이 사용되었다. 杭州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隋(수)나라 이후의 일이다.

蘇州를 출발한 지 4시간 만에 「望湖호텔」에서 도착했다. 잠시 요기를 한 다음 곧장 길 하나 건너 西湖로 나갔다. 호변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볐다. 특히 白堤(백제)와 蘇堤(소제) 일대가 그러했다.


牧民官으로 제방을 쌓아 칭송받는 大시인 白居易와 蘇東坡

白堤(길이 약 1.5km)는 唐의 大시인 白居易(백거이)가, 蘇堤(길이 2.8km)는 宋의 大시인 蘇東坡(소동파)가 杭州의 지방장관을 하면서 쌓은 큰 제방이다. 제방에 水門을 설치, 西湖의 물을 灌漑(관개)에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白居易는 쉬운 표현을 구사하여 詩文을 지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우리 선조들에게 「白氏文集(백씨문집)」은 교양인을 위한 필독서가 되었다. 특히 唐玄宗과 楊貴妃의 사랑과 死別(사별)을 노래한 白居易의 「長恨歌(장한가)」는 우리나라 옛 기생들의 애창곡이었다.

白居易는 長慶 연간(821~824)에 이 땅의 刺史(자사)로 부임했다. 그는 긴 제방을 쌓고, 여기에 담긴 물을 농사에 이용했다. 그 蒙利(몽리) 면적이 1000頃(경)에 달했다고 한다. 1頃은 100畝(무)인데, 唐代의 1畝는 현재의 580아르(a)에 상당했다. 백성들은 그의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그의 姓을 따 이 제방의 이름을 「白堤」라고 불렀던 것이다.

白居易가 杭州 刺史(자사)로서 부임했던 것은 그의 나이 51세 때. 햇수로 3년을 재임했으니 杭州에 있을 때가 그의 원숙기에 해당된다. 이곳에서 그는 「春題湖上(춘제호상)」, 「杭州春望(항주춘망)」, 「西湖留別(서호유별)」 등 수많은 詩를 지었다. 「西湖留別」은 3년의 임기가 차 長安으로 돌아갈 때 지은 七言律詩다. 그 한 구절은 대충 다음과 같다.

<이곳저곳 머리를 돌려 쳐다보아도 / 모두가 사랑스러워 미련이 남네 / 그중에서도 가장 헤어지기 어려운 곳은 바로 이 湖邊이어라>

孤山(고산)은 西湖 유람에서 뺄 수 없는 곳이다. 그중에도 平湖秋月亭(평호추월정)은 1949년까지 「四庫全書(사고전서)」를 보관한 文瀾閣(문란각)을 두었다.

白居易가 杭州를 떠난 지 265년 후인 北宋의 元祐 4년(1085) 蘇東坡(소동파: 본명은 蘇軾)가 杭州의 知事로 부임했다. 唐과 宋을 대표하는 2人의 大시인이 杭州의 장관이 된 것은 奇緣(기연)이 아닐 수 없다. 두 사람 모두 「唐宋八大家(당송팔대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또한 2人 모두 3년의 임기 중에 농민들을 위해 제방을 쌓았다. 蘇東坡가 재임 중에 쌓은 제방은 白堤보다 더 길다. 사람들은 이것을 蘇軾라고 부른다. 백제는 북쪽에, 소제는 서쪽에 위치해 있다.

蘇東坡는 30代 중반에도 杭州의 通判(통판: 副知事)으로 재임했던 만큼 杭州와는 두 번의 인연을 가진 셈이다. 그는 知事로 재임하면서 西湖를 미녀 西施와 비하기도 했다.

<만약 西湖를 들어 西子(西施)에 비한다면 / 淡粧(담장) 濃抹(농말), 모두가 똑같아…>

훗날의 일이지만 만주족이 세운 淸의 康熙帝(강희제)와 乾隆帝(건륭제)는 유별나게 江南의 풍경을 사랑했던 인물이다. 1705년 康熙帝는 南巡中(남순중)에 西湖에서 오래 머물렀고, 乾隆帝는 생애에 여섯 번이나 杭州를 찾았다.


「존경받는 역사인물 2위」 岳飛의 죽음

唐이 멸망하고, 五代十國의 시대가 되면 錢?(전료)라는 지방의 실력자가 浙江을 중심으로 吳越國(오월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이 나라는 北宋에 병탄된다. 北宋이 金(금)나라에 의해 수도 ?京(변경: 지금의 開封)이 함락되어 北宋의 徽宗(휘종)과 欽宗(흠종)이 포로가 되어 北으로 끌려간 靖康之變(정강지변)이 발생한 해는 1126년이다. 이로써 北宋은 멸망했다.

亂(난)을 모면한 황자 하나가 江南으로 도주, 다음해에 宋왕조를 再興(재흥)하니 그가 南宋의 高宗이다. 再興했다고 하지만, 중국의 北半分은 金에 탈취당한 불완전한 국가였다. 南宋이 國都로 선정한 곳이 杭州였다. 杭州는 이후 약 150년간 南宋의 수도가 되었다. 당시의 이름은 臨安(임안)이었다.

중국땅의 절반밖에 보유하지 못한 정권이었지만, 南宋의 경제는 크게 번창했다. 華北에 정복왕조인 金(금)이 있어 南宋은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다. 江南의 개발에 의해 北宋 시기보다도 경제적으로는 더욱 흥청거렸다.

南宋 정권은 金에 대한 항전을 주장하는 파벌과 講和(강화)를 주장하는 파벌이 예리하게 다투었다. 主戰派의 岳飛(악비)는 對金戰에서 상당한 戰果를 올리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투항파의 秦檜(진회)가 정권을 잡고 主戰派를 좌천시키거나 숙청했다.

岳飛도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누명을 쓰고 투옥되어 진회에 의해 毒殺(독살)되고 말았다. 진회는 金나라를 伯父로 섬긴다는 굴욕적 강화를 맺어 歲幣(세폐: 상납금품)로 매년 銀(은) 25만 냥, 비단 25만 필을 바쳤다.

蘇堤와 白堤가 너무 붐벼 관광용 電池車를 타고 반대방향으로 돌아 岳王廟(악왕묘) 앞에서 하차했다. 岳王廟는 1221년에 민족영웅 岳飛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인물은 關羽(관우)와 岳飛이다. 關羽는 「關帝(관제)」라고 높이니까 岳王으로 존숭되는 岳飛는 「존경받는 역사인물」 랭킹 2위에 해당한다.

경내에는 忠烈祠(충렬사)와 岳飛의 墓가 있다. 이곳에서는 중국판 「역사 바로 세우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중국인들은 岳飛를 죽인 진회를 증오한다. 결박당한 진회 부부의 鐵像(철상)을 만들어 岳飛의 墓 앞에다 무릎을 굻려 놓은 것이다.

그러나 史實에 있어서 진회는 결박당하기는커녕 병들어 죽을 때까지 宰相으로서 好衣好食(호의호식)하며 굴욕적인 강화체제를 유지했다. 따지고 보면 南宋의 굴욕외교가 진회의 탓이라고만 하기도 어렵다. 北宋과 南宋이 경제적으로는 미증유의 번영을 구가했지만, 국방력이 허약해 북방 草原에서 들불같이 흥기한 騎馬民族(기마민족)의 민족적 에너지에 對敵(대적)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사실 宋은 제도적 결함 때문에 국방력이 허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宋나라가 국초부터 强幹弱枝(강간약지: 줄기는 강하게 가지는 약하게 함) 정책을 國策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强幹弱枝는 황제경호부대를 강화시키고 지방주둔 야전군을 약화시키는 정책이다. 그 목적은 지방 군벌의 대두를 방지하는 데 있었다.

더욱이 황제는 야전군을 감시하기 위해 宦官(환관)을 감독관으로 파견, 軍 지휘권의 이원화를 자초했다. 전선사령관은 황제 혹은 宮中과 직통 라인을 가진 환관의 節制(절제)를 받았다. 이런 조건에서는 强軍(강군)이 육성될 수 없다.

中國 역사상 최초의 기마민족 정복국가인 遼(요)나라가 北宋의 수도 ?京(변경)까지 압박하자 北宋은 만주에서 새로 흥기한 金나라와 비밀 군사동맹을 맺어 遼를 멸망시켰다. 北宋은 그동안 遼에게 상납했던 歲幣(세폐)를 이후 金에 바쳤지만, 끝내 金에 의해 멸망당했다. 돈으로는 평화를 살 수 없었던 것이다.


南宋 遺民이 제4의 신분으로 전락한 까닭

南宋은 北宋의 패망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 이번에는 金의 배후 草原에서 흥기한 몽골과 군사동맹을 맺고 金을 공략했다. 막대한 歲幣를 먹인 몽골군의 힘으로 金을 멸망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똑같은 패턴으로 南宋은 과거의 동맹국 몽골의 元에게 패망하게 된다.

元의 쿠빌라이칸은 南宋 토벌의 원정군을 거듭 파견했다. 원정군의 총사령관은 페르시아 지역의 몽골왕국인 일칸國에서 파견한 바얀(伯顔). 최대 격전지는 襄陽城(양양성)이었다. 襄陽이라면 三國시대의 魏(위)·吳·蜀(촉)나라 사이에 쟁탈전이 벌어졌던 荊州(형주)이다. 中原과 江南을 연결하는 주요 접근로상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양양성의 守將은 南宋의 呂文煥(여문환)이었다. 呂文煥은 5년간의 포위 속에서도 양양성을 지켜 낸 맹장이었다. 그는 농성 중 군량을 아끼기 위해 자신의 처자까지 성 밖으로 쫓아낼 만큼 滅私奉公(멸사봉공)의 장수였다. 南宋의 주요 무기는 弩(노)였다.

한편 몽골군의 新병기는 대포였다. 몽골군에는 일칸國에서 파견한 아라우데잉과 이스마일이라는 두 砲匠(포장)도 종군하고 있었다. 대포라고 하지만 오늘의 대포와는 달리 기계장치로 鐵丸(철환)이나 불꽃 같은 것을 날려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소리만으로도 위력적이었다.

양양성의 수비장 呂文煥은 처자까지 버리며 善戰(선전)했지만, 이제는 휘하 병졸들이 가련했다. 南宋의 조정에서는 구원군을 한 명도 보내지 않았다. 여문환은 至元 10년(1273) 2월 성문을 열고 몽골군에게 투항했다.

몽골군의 총사령관 바얀은 至元 13년(1276) 1월 南宋의 수도 臨安(임안: 지금의 杭州)을 점령했다. 몽골군은 어린 황제 이하 황족들을 붙잡아 北京으로 보냈다. 城을 베개로 삼아 장렬하게 쓰러져 갔던 상황이 아니라 하룻밤이 지나 날이 밝으니 어느 틈에 몽골병이 성 안에 가득차 버린 꼴이었다.

이후 南宋의 유민들은 元의 카스트(계급)제도에서 제4의 신분으로 전락했다. 원래 유목민족들은 용감하지 않은 인간을 낮게 평가한다. 杭州는 이같이 허망한 亡國史의 현장이기도 하다.

다만, 南宋 멸망 당시 杭州는 戰禍(전화)를 입지 않았다. 元 지배기에 들어가서도 杭州의 거리는 여전히 번창했다. 大都라고 불렸던 北京이 정치적 수도였다면 杭州는 경제적 수도였다.

杭州의 번영은 쿠빌라이 시대에 저 멀리 이탈리아의 베니스로부터 중국에 온 마르코 폴로가 쓴 「東方見聞錄(동방견문록)」 중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킨자이市라고 하는 곳은 확실히 호화스럽고 부유한 세계 제1의 도시이다」

윗구절의 첫머리에 쓴 「킨자이」는 「行在(행재)」라는 단어의 이곳 方言이라고 한다. 行在라면 임금이 일시적으로 머무는 장소를 말한다. 南宋은 杭州를 수도로 삼았지만, 失地(실지)를 회복하여 옛 수도인 ?京(변경)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國策이었다.

아무튼 육로와 해로로 세계 각국을 두루 여행했던 마르코 폴로가 이같이 단언했던 만큼 당시 杭州의 장려함은 상상 가능하다. 현재, 西湖의 입구에는 마르코 폴로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史書에 따르면 南宋으로부터 元代에 걸쳐 杭州灣(항주만)에는 印度 및 동남아로부터 온 무역선이 잇달았다. 西湖에는 極彩色(극채색)의 그림을 그려 넣은 유람선들이 떠다녔다. 元代에는 이곳에 머무는 외국 상인들을 위해 네스토리우스派 기독교 회당 및 이슬람 사원도 세워졌다.

이럴 무렵이 杭州의 황금시대였다. 明·淸代에도 정치의 중심은 여전히 北京이었지만, 경제·문화면에서는 杭州·蘇州가 중심지였다. 그런 만큼 뛰어난 문인과 예술가들이 이 지방에서 다수 배출되었다.

회화에서는 杭州를 중심으로 한 「浙江派(절강파)」가 蘇州를 중심으로 하는 「吳派」와 더불어 중국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吳派의 화풍이 文人畵的(문인화적)인 데 비해 절강파의 화풍은 좀더 기교적이라고 한다.

杭州는 古都인 만큼 고찰과 유적이 많다. 고찰의 대표는 靈隱寺(영은사)다. 靈隱寺 경내에서 幽玄(유현)한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지만, 워낙 「노동절 관광인파」가 몰려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蘇堤 남쪽 끝 부분에 雷峰塔(뇌봉탑)이 우뚝 서 있다. 吳越國의 왕비 黃씨가 건립한 벽돌탑으로 1000년 세월을 견디다 1924년 무너졌는데, 최근 복원된 것이다.

杭州의 대표적 요리점 「루와이루(樓外樓)」가 西湖를 바라보고 서 있다. 中華民國(중화민국) 총통 蔣介石(장개석)이 毛澤東(모택동)의 中共軍에게 패해 대륙을 포기하고 臺灣(대만)으로 쫓겨가기 전에 「최후의 만찬」을 했던 곳이 루와이루라고 한다. 西湖邊에는 蔣介石 총통의 아들로서 중화민국 총통이 된 蔣經國(장경국)의 저택도 보존되어 있다.

西湖는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으면서 감상해야 하는 경승지다. 그러나 蘇堤와 白堤에서는 인파에 떠밀려 발걸음을 옮겨야 할 형편이었다. 하필 노동절 관광시즌에 杭州에 온 것이 잘못이다.

저녁에는 杭州요리를 벌여 놓고 紅酒(홍주) 잔을 기울였다. 杭州는 예로부터 『쌀밥에 생선국 먹는 곳』으로 알려져 왔던 만큼 요리 자원도 풍성하다. 杭州요리는 중국 8大 요리 계열 중 하나인 「浙江요리」의 대표선수이다.

별미는 단연 「東坡肉(동파육)」이었다. 杭州 자사 재임 때 蘇東坡가 西湖를 준설하는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요리라고 한다. 당시, 요리사가 향료를 잘못 섞어 조리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맛있어 후대에 전해졌다는 것이다. 동파육은 색상이 밝고 고소하면서 즙이 많고, 기름지면서도 느끼하지 않다.


南宋의 옛거리 再現― 淸河坊

다음날 아침 6시45분, 필자는 望湖호텔 7층 뷔페식당에서 잊을 수 없는 大파노라마와 마주섰다. 봄비로 촉촉이 젖은 西湖는 절정의 화가가 표현한 산수화보다 더욱 감동적이었다. 望湖호텔은 참으로 이름 값을 했다. 1시간 쯤 西湖를 관찰했다. 이른 아침인데도 유람선들과 소형 화물선들이 떠다니고 있다.

西湖는 3面이 산들로 둘러싸이고 동쪽면만 트여 杭州 시가지와 이어져 있다. 杭州 시가지를 조감하기 위해 吳山을 찾아나섰다. 吳山은 매일 아침 「새(鳥) 시장」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새 기르는 사람들이 노래 잘하는 새, 자태를 뽐내는 새, 싸움을 잘하는 새 등을 조롱에 넣어 들고 나온다.

吳山 입구에서 「견습 관광안내원 陳晶晶」이란 명찰을 단 아가씨를 만났다. 대학 관광학과 재학 중에 실습하러 나왔다는 晶晶양은 필자를 吳山 곳곳으로 데리고 다니며 가이드를 해주었다. 吳山은 높이가 100m도 되지 않는 작은 산이다. 그녀와 함께 전망대용 건물인 城隍閣(성황각)으로 올라갔다(입장료 30위안). 5층의 난간을 돌며 杭州의 시가지와 杭州의 젖줄 錢塘江(전당강)을 조감했다.

杭州는 절강성의 省都로서 京杭대운하의 남쪽 끝이다. 市 중심은 북위 30도. 중서부와 남부는 구릉지대이고, 동북부는 평원지대이다. 동서 방향의 전당강, 남북방향의 京杭대운하가 흐르고 있다. 아열대 계절풍 기후로서 연평균 기온은 16.2℃, 평균 강우일은 155일(연평균 강우량 1500mm)이라고 한다.

吳山을 내려와 바로 밑에 위치한 「역사문화의 거리」 淸河坊(청하방)에 들렀다. 杭州가 南宋의 수도이던 때 河坊街(하방가)가 商街로 번영했는데, 淸河坊은 그것을 재현한 거리이다. 지금 이곳에는 차실, 약방, 비단점, 식품점, 골동품 가게 등의 상점 100여 개가 들어서 있다.

마음에 드는 合竹扇(합죽선: 쥘부채)은 450위안을 호가했다. 刺繡(자수)가 아름다운 비단 스카프 2개(1개 값 30위안), 龍井茶(용정차) 작은 통 1개(값 30위안)를 샀다. 杭州는 「茶의 首都」, 「차잎의 고향」으로 불리는데, 이곳 龍井茶는 중국 10대 名茶 가운데 으뜸으로 손꼽힌다.

오후 3시 杭州 蕭山(소산)국제공항 發 仁川국제공항行 비행기 탑승시간에 맞추려면 조금 서둘러야 했다. 淸河坊 옆 작은 음식점에서 필자의 蘇州·杭州 답사를 도와준 朝鮮族(조선족) 가이드, 중국인 운전사와 더불어 마지막 식사를 했다. 석별의 오찬이었던 만큼 紹興酒(소흥주) 한 병도 곁들였다.


도덕적으로 해이한 나라가 「배고픈 침략국」에 이긴 적 없다

蕭山국제공항으로 가는 길에 南宋 시기에 건립한 六和塔(육화탑)과 錢塘江의 흐름을 잠시 살폈다. 錢塘江은 京杭대운하의 출발점이자 종점이었다. 경항대운하는 결국 錢塘江-長江-淮河(회하)-黃河-海河 등 중국의 5대 水系를 남북으로 이어 주는 대동맥이었던 것이다.

大運河를 완성한 隋(수)의 煬帝(양제)는 7세기 초의 고구려 원정 때 이 水路를 통해 江南의 양곡과 물자를 탁군(지금의 北京)에 집결시킨 다음에 이를 遼東(요동)의 戰線(전선)으로 추진시켰다. 그러나 隋나라는 세 번에 걸친 고구려 침공에 모두 실패, 멸망하고 만다.

역사적으로 본 大運河는 江南의 풍부한 식량과 물자를 北京과 수도권에 징발당하는 「불평등 거래의 通路」였다. 北宋 멸망 후 中原을 지배한 遼·金·元·明·淸, 다섯 왕조(모두 北京을 수도로 삼았다) 가운데 漢族국가는 明왕조 단 하나뿐이었다. 나머지 네 왕조는 모두 北方 기마민족이 漢族을 제압하고 세운 征服國家(정복국가)였다.

漢族의 역사는 被압박민족의 역사다. 江南의 역사도시 蘇州와 杭州를 여행하면서 가슴에 와 닿은 것은 경제적 번영이 나라의 안전보장과는 無關(무관)하며, 평화는 결코 금품으로 살 수 없다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世界史를 뒤돌아보아도 경제적 풍요에 취해 도덕적으로 해이해진 나라가 「배고픈 거지 침략국」을 이긴 사례는 없다. 오늘의 韓國人에게 他山之石(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역사적 교훈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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