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인터뷰] 在서울 사쓰마 鄕友會長 구로다 가쓰히로 日本 산케이新聞 서울지사장

『사이고는 舊體制의 파괴자였고, 오쿠보는 新체제의 건설자였다』

글 정순태 기자  2004-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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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케이(産經)신문」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 서울지사장은 1982년 일본 「교도(共同)통신」 서울특파원 시절부터 筆者와 안면이 있다. 그는 서울특파원 중 최고참이며 우리말과 우리글 구사에 능숙해 한국어로 한국음식 관련 著書까지 내놓은 인물이다. 필자가 그를 인터뷰한 것은 그의 고향이 明治維新의 진원지인 가고시마縣(舊사쓰마藩)이며, 그의 言行에서 가끔은 사쓰마 사무라이 같은 느낌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가고시마縣이라면 한국의 道에 해당되는데, 어디가 고향입니까.

『미야자키縣과의 경계지대에 「韓國岳」, 일본말로 「가라쿠니다케」라고 부르는 큰 山이 있죠. 그 韓國岳 바로 아랫마을이 저의 고향입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아버지의 직장이 있었던 오사카예요. 태평양 전쟁 말기에 우리 집 식구들이 고향으로 되돌아왔는데, 그 후 저는 고향에서 4, 5년 쯤 살면서 소학교 2학년까지 다녔습니다』

―고향을 떠난 지가 꽤 오래 되었군요.

『학창 시절에 방학을 맞으면 한 달 정도씩 가고시마에 내려가 지냈기 때문에 고향에 대한 아련한 추억거리가 많습니다. 서울에 사는 가고시마 출신자가 10여 명 되어 가끔 모이는데, 제가 그 모임의 회장입니다』

―가고시마에 가서 「고구마 燒酒(소주)」를 한번 마셔 보았는데, 술맛이 安東소주처럼 짜릿하더군요.

『고구마를 일본말로 「사쓰마 이모」라고 합니다. 日本에서 고구마 主産地가 사쓰마인데, 그런 사쓰마 고구마를 증류해서 소주를 만들어 왔던 겁니다. 「在서울 사쓰마 향우회」 모임이 있으면 회원들은 으레 사쓰마 고구마 소주를 준비해 와 마십니다』

고구마가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된 시기는 조선 英祖 40년(1764)이었다. 그때 朝鮮通信使로 일본에 갔던 趙日嚴(조엄)이 고구마 종자를 구해 그 재배법까지 익히고 귀국해 東萊와 제주도에 재배케 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로 고구마 재배에 성공하게 되었다.

―사쓰마 고구마 소주 중에는 알코올 도수 40도짜리도 있다더군요.

『우리 사쓰마 향우회원들은 25도짜리 고구마 소주 1홉에 더운 물 2홉의 비율로 섞어서 마십니다』


密貿易으로 실력 키운 사쓰마藩

―사쓰마藩은 일본의 중앙에서 보면 가장 멀리 떨어진 변방인데, 어떻게 明治維新의 주체세력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고시마는 活火山 지대여서 지금도 쌀 농사가 잘 되는 지역은 아니지요. 그래서 사쓰마藩은 淸國과의 貿易, 所領이었던 오키나와에서 黑사탕 재배로 돈을 벌어 藩의 재정이 비교적 튼튼했기 때문에 새 시대를 준비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갖추고 있었던 겁니다. 또한, 도쿠가와 막부의 강력한 쇄국정책下에서도 사쓰마藩은 가고시마港을 통해 先進 서양문물과 비교적 빨리 접촉할 수 있었거든요』

壬辰倭亂 때 일본군이 사용하여 조선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준 鐵砲(鳥銃)가 1543년 포르투갈 선원들에 의해 일본에 처음 전래된 곳도 가고시마 앞바다에 떠 있는 種子島(종자도: 다네가시마)였다. 기독교 修道士인 프란시스코 사비에르(1506∼1610)는 일본에 이른바 「南蠻文化」, 즉 서양문물을 전했는데, 그의 첫 日本 상륙지도 가고시마였다.

―히젠(肥前)藩의 나가사키는 幕府가 유일하게 공인했던 대외무역의 창구였던 반면에 가고시마는 幕府 몰래 密무역을 했습니다. 강력한 幕府體制하에 密貿易이 어떻게 가능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쓰마藩은 원래 사무라이를 수만 명이나 양성하여 군사력이 강했던데다가 幕府가 강력히 통제하기에는 지리적으로 좀 멀었던 거예요. 1587년 규슈를 제압함으로써 日本 전국의 통일을 완성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에도幕府를 창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 둘 모두 사쓰마의 시마즈家의 武力과 세력범위를 인정해 마구 다루지는 않았습니다』

―구로다 선생은 임진왜란 때 침략한 일본군 제3軍(1만2000명)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후쿠오카 領主), 1876년 조선정부에 강화도조약을 강요한 일본 측 全權大使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 사쓰마 출신)와 姓氏가 같습니다. 그들과 어떤 관계입니까.

『구로다라는 姓氏의 사람들이 규슈, 그 중에서도 가고시마에 많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나가마사·기요다카 같은 역사인물과 우리 집안 사이에 혈연이 닿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明治維新의 主役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두 사람의 역할은 달랐죠. 메이지 유신 前後 군사적 지도력이 필요했던 시기엔 사이고의 역할이 두드러졌고, 維新정부 출범 이후 근대화 과정에선 오쿠보의 비전과 識見이 리더십을 발휘했지요. 日本史에서는 사이고는 혁명가, 오쿠보는 정치가로 자리매김되어 있습니다』

―가고시마에 가서 보니 사이고의 인기가 대단하더군요.

『일본 사람들은 역사의 승리자보다 悲運의 패배자를 더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이고는 征韓論爭에 패배한 끝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전하고 자결한 비극적인 인물 아니겠습니까. 반면 오쿠보는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10년간 그가 어느 자리에 있든 실질적으로 요즘의 首相 역할을 했습니다.

결국 사이고는 竹馬故友 오쿠보의 손에 의해 거세되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했으니까 가고시마 사람들이 사이고를 존숭하는 나머지 오랫동안 오쿠보를 평가하지 않았어요. 가고시마 시내에 오쿠보 동상이 세워진 것도 불과 2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오쿠보는 나라 만들기에 분투한 絶對主義 관료

―사이고 다카모리는 어떤 캐릭터의 인물이었습니까.

『사이고는 말의 인간이 아니라 행동의 인간이었습니다. 그와 접촉한 많은 同時代의 사람들이 그에게 빠져들었던 것 같습니다. 사이고는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음식 먹고, 문명의 利器를 누리며 世人의 갈채를 받아야만 바람직한 삶이냐」하며 회의했던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사무라이의 소박한 생활방식을 생애의 끝까지 지켰습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대조적이었죠.

『오쿠보는 국민들을 교육하고, 일자리를 늘리고, 밤에는 전깃불을 훤하게 밝히는 근대국가 만들기에 분투한 절대주의 관료였습니다. 자유민권운동에 대해서도 그는 아직은 이르다며 强權으로 눌러 버린 「有司獨裁」의 중심인물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에게 반대하던 사람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거나 추방당했어요』

―그런데 삶에 대한 소박한 사상을 지닌 사이고가 왜 征韓論을 들고 나왔을까요.

『사이고가 征韓論者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 연구자들도 많습니다. 사이고는 자기가 특명全權대사로 조선에 가기만 하면 조선정부를 설득하여 두 나라 간의 우호관계를 이룰 수 있다고 했던 것이지, 조선을 정복·지배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견해입니다』

사이고에 대해 이다가키 다이스케(坂垣退助)는 「조그마한 자기의 私情을 억제하지 못해 사람을 살상시키고 재물을 낭비했으며 逆賊의 더러운 이름을 후세에 남겼다」고 지적한 바 있다. 征韓論爭에 패배한 사이고가 귀향한 뒤 西南전쟁을 일으킨 데 대한 비판이었다. 이다가키 다이스케도 征韓論에 패해 사이고처럼 下野했지만, 愛國公黨을 설립하여 자유민권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조선왕조의 집권자였던 興宣大院君은 사이고가 특명전권대사로 왔다고 해서 호락호락하게 日本의 修交 요구를 들어줄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러면 양국 간의 전쟁은 불가피해지는 것 아닙니까.

『사이고의 對조선 담판이 결렬되었다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사이고는 협상론자였어요. 만약 사이고의 조선行이 실현되어 협상에 성공했더라면 그 후 양국의 관계사는 크게 달라졌을지 모르죠』


亂世의 영웅과 治世의 能臣

―사이고는 武士계급의 폐지로 인해 失職한 사무라이들에게 일거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조선行을 자원했던 것입니다. 사무라이의 일거리가 바로 전쟁 아닙니까. 征韓論爭에서 나타난 사이고와 오쿠보의 路線 중 어느 쪽이 당시 日本의 국가이익에 부합되는 것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이고의 征韓論보다 오쿠보의 內治 優先論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사이고가 오늘의 일본인에게 과대평가된 것 아닐까요.

『어떤 의미에서 사이고는 反근대적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고의 사무라이적 품성은 결코 평가절하될 수 없습니다. 자기희생 정신, 검소한 생활태도, 물질에 집착하지 않는 고귀한 정신은 일본인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는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부조리와 비리, 浮薄한 세태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비판의식만으론 새 시대를 열어 갈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이고는 역사의 非主流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이고는 亂世의 영웅이었지만, 治世의 能臣은 아니었군요.

『사이고는 앙시앵레짐(舊制度)의 파괴자였고, 오쿠보는 근대일본의 건설자였습니다. 明治維新은 두 사람의 역할분담으로 성공했던 것입니다』

―사쓰마藩과 함께 明治維新을 주도한 조슈藩의 역할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위기의 순간순간에 판단력이 뛰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세력이 큰 사쓰마藩이 조슈藩의 기민한 움직임에 영향을 받은 면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슈藩에는 뒷수습도 못 하면서 일단 일을 저질러 놓고 보는 운동권적 志士들이 많지 않았습니까. 예컨대 1864년 조슈의 시모노세키港 포대에서 외국선박에 포격을 가했다가 英國 등 4개국 연합함대의 보복공격을 받고 포대가 박살나 굴복했고, 전쟁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上京하여 幕府軍과 전투를 벌이다 패퇴하는 바람에 조슈藩에 대한 幕府의 제2차 征討戰을 불러들이지 않았습니까. 이때 만약 사쓰마藩이 막부군 정토군에서 이탈하여 돕지 않았다면 조슈藩은 패망했을 겁니다.

『조슈藩은 理想的이었고, 사쓰마藩은 現實的이었죠. 두 藩의 기막힌 同盟으로 아직도 强勢였던 幕府를 武力으로 타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쓰마, 지금의 가고시마 사람들의 기질은 어떻습니까.

『가고시마에는 「오토코(男)와 키(議)오 수루나」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걸 한국말로 옮기면 「남자는 변명을 하지 마라」 또는 「남자는 불만을 말로 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주라는 의미입니다. 목소리만 높은 論이 아니라 實踐을 중시한 것이죠』

―明治維新의 주체들은 幕府에 복무했던 가쓰 가이슈(勝海舟)를 新정부의 해군장관으로 발탁했고, 北海道의 하코다테에 웅거하여 독립을 선포하고 明治정부와 전쟁을 벌였던 에노모토 다케아키까지 포용하여 英國대사 등의 요직을 주어 활용했습니다. 人材를 중시했던 明治정부의 人事정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근대화를 강력하게 밀고 나가려면 엘리트 집단이 두텁게 형성되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당시 일본은 그럴 만큼 人材가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19세기 東아시아의 한국·중국·일본이 모두 민족적 위기상황을 만났는데도 일본만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明治維新은 世界史的 견지에서 매혹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明治維新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明治維新 초기에 정부 주도의 근대화 정책 및 서구화 정책을 지향하는 바람에 옛 전통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농민들이 강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런 농민들까지, 신분이 낮은 사람도 능력에 따라 출세가 가능함을 알고 결국 維新에 적극 참여했던 것입니다.

西南전쟁에서 사이고가 이끈 歷戰의 사무라이軍이 政府軍에게 패배한 것도 新정부에 대한 농민들의 지지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政府軍은 徵兵令에 의해 소집된 농민의 자제들이었습니다. 明治維新이 비록 「위로부터의 혁명」이라 해도 농민들의 이해와 동참이 없었다면 초기에 주저앉고 말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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