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들 ⑨ - 慧超와 高仙芝가 갔던 길을 따라간 12박13일의 중국 신강성 紀行

大地는 불타고 있었다!

글 정순태 기자  2004-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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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두 번째로 넓은 타클라마칸 사막을 한 바퀴 돌고 「世界의 지붕」 파미르 高原에 오르는 韓國人은 깊은 감동에 휩싸인다. 韓國 역사상 최초의 世界人으로 손꼽히는 慧超(혜초)와 高仙芝(고선지)가 世界史的 족적을 남긴 길이기 때문이다.

新羅의 求法僧 혜초는 세계 문명교류의 선구자였다. 그에 앞서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를 해로와 육로로 일주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으며, 더욱이 중앙아시아의 西端까지 다녀와서 현지 견문록을 남긴 이는 없다. 그의 여행기 「往五天竺國傳(왕오천축국전)」은 8세기 印度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가장 정확한 名著로 평가되고 있다.

고구려 遺民 출신인 大唐제국의 安西都護(안서도호) 高仙芝―그는 747년에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앙아시아 72개국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시대상황은 高仙芝에게 절대 불리했다. 楊貴妃에 홀려 국사를 소홀히 했던 玄宗의 天寶 연간(742~755)은 唐의 국력이 급전직하로 떨어져버렸던 반면에 西아시아의 이슬람勢는 요원의 불길 같은 흥륭기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두 文明圈이 격돌한 서기 751년의 탈라스 전투에서 高仙芝는 동맹군의 敵前 배신으로 배후가 찔려 不意의 敗戰을 당하고 말았다. 포로가 된 高仙芝 휘하의 기술자가 西方세계에 중국 秘藏(비장)의 製紙法을 전해주는 奇緣(기연)에 의해 그는 세계 문명발달사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성명 석 자를 남기게 되었다.

지난 6월, 필자는 「참좋은여행사」가 국내 최초로 기획한 「실크로드 역사기행」에 참가했다. 참가자는 동국大 文明大 교수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오지 여행의 마니아 등 모두 28명이었다.




동서교역의 메인루트―오아시스路

6월16일 오전 9시40분, 仁川국제공항을 출발한 우리 일행은 北京에 도착하여 1박하고, 다음날 중국 민항기 편으로 우루무치를 거쳐 호탄(和田)에 닿았다. 이후 호탄-葉城-야르칸드(莎車·사차)-카슈가르-파미르高原-아쿠스-쿠차-쿠얼러-新疆(신강)내몽골自治州의 보스팅湖畔-투르판-敦煌(돈황) 등지로 이어지는 실크로드의 오아시스路 구간을 버스 또는 기차를 타고 일주했다. 12박13일이 걸린 답사였다.

우선, 실크로드란 무엇인지부터 설명해 두어야 할 것 같다. 실크로드란 東아시아와 西아시아,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해 온 東西교통로의 총칭이다. 그 영역은 광대·복잡하고 수많은 민족과 관련되어 있다.

실크로드를 통한 東西교섭의 역사는 太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실크로드」라는 이름 자체는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1833~1905)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그는 19세기 후반, 중국의 각지를 답사하고 1877년 大作 「차이나」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東西교통로의 역사를 개관하고 古代 東아시아권과 그리스·로마 문화권과의 교섭에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비단이었음을 입증했다. 그리고 그 交易路를 실크로드, 즉 「비단길」이라고 명명했던 것이다.

리히트호펜 등 초기 연구자들은 西域과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를 잇는 길, 즉 오아시스路만 실크로드라고 한정했다. 그러나 그 후 北아시아史 및 南아시아史 연구의 축적에 따라 유라시아 北方의 草原지대를 통과하는 스텝路, 南中國으로부터 印度洋을 거쳐 紅海에 이르는 南海路도 실크로드에 포함시키게 되었다. 오아시스路를 비롯한 세 개의 東西교통로는 다음과 같은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스텝路는 북위 50도 前後의 유라시아의 스텝지대를 東西로 횡단하는 「草原의 길」로서, 주로 역대 유목민에 의해 이용되었다. 현재의 시베리아횡단 철도는 스텝路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匈奴(흉노)·투르크(突厥)·몽골 등의 騎馬民族(기마민족)이 스텝路를 질풍같이 달려 西方의 여러 나라를 정복했다.

오아시스路는 중앙아시아의 북위 40도 안팎에 위치한 오아시스群을 東西로 연결하는 사막의 길이다. 중앙부에 파미르 고원이 솟아 있지만, 天山山脈과 崑崙山脈(곤륜산맥) 등지로부터 흘러내리는 눈 녹은 물(雪水)에 의해 형성된 오아시스(綠地)가 점재한 덕택에 역사상 가장 많이 애용된 東西교통로였다. 오아시스路를 활용하여 뛰어난 商才를 발휘한 민족은 페르시아 계통의 소구드人과 투르크 계통의 위구르人 등이었다.

南海路는 紅海 또는 페르시아灣으로부터 印度洋-東南亞를 거쳐 중국의 華南에 도달하는 바닷길로서 「바다의 실크로드」라고 일컬어진다. 中世에는 동남아人·페르시아人·아라비아人이 활약했고, 近世 이후에는 西勢東漸(서세동점), 즉 유럽인의 아시아 침략에 이용되기도 했던 海上교통로였다.

東西교역의 메인루트인 오아시스路의 東方 출발점은 長安(지금의 西安)이었다. 長安으로부터 농서, 蘭州(난주)를 거쳐 武威, 張掖(장액), 酒泉, 安西를 지나면 변경의 마을 돈황에 이르게 된다. 長安-돈황 간은 약 1500km의 거리이다.

옛날, 西域으로 가는 캐러밴은 돈황 郊外에 소재한 玉門關이나 陽關을 통과, 사막을 16일 정도 西進, 신강 東部 지역인 樓蘭(누란: 敾善)에 닿았다. 지금부터 2000년 전, 西域의 오아시스路는 돈황과 누란을 연결하는 길이 유일한 것이었다. 그래서 누란은 「실크로드의 咽喉(인후: 목구멍)」로 일컬어졌다.

오아시스路는 누란에서 南北 두 개의 길로 나눠진다. 하나는 누란으로부터 西北으로 나아가 쿠차(龜玆·구자), 아쿠스(姑墨·고묵)를 거쳐 카슈가르(疏勒·소륵)에 달하는 오아시스 北路이다. 또 하나는 누란으로부터 西南으로 나아가 체르첸(且末·차말), 호탄(和田)을 거쳐 야르칸드(莎車), 카슈가르로 이어지는 길인데, 오아시스 南路라고 불린다.

오아시스 北路는 天山山脈을 우측에 끼고 西進하고, 오아시스 南路는 崑崙山脈을 좌측에 끼고 西進한다. 북쪽의 천산산맥과 남쪽의 곤륜산맥 사이의 광활한 분지를 타림분지라고 하는데, 타림분지의 대부분은 한반도 면적의 1.5배인 타클라마칸 사막(32만km2)으로 이뤄져 있다. 오아시스 北路와 南路는 중국 最西部의 최대 오아시스 도시인 카슈가르에서 만난다.




아시아 대륙의 覇權 장악했던 匈奴

오아시스路는 실크로드의 메인 루트였던 만큼 수많은 여행자가 이 길을 오갔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大王은 이 길을 따라 印度 북부지방까지 원정했다.

기원전 139년, 漢 武帝는 흉노를 치기 위한 군사동맹을 맺기 위해 張騫(장건)을 大月氏(대월지)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일찍이 대월지는 국왕이 흉노에게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고 舊領 甘肅省(감숙성) 일대에서 쫓겨나 이란 동부지역으로 이동해 왔지만, 새 토지가 비옥하여 번영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흉노와 싸울 의지가 전혀 없었다.

장건은 서역 여행 중 흉노에게 두 번이나 사로잡히는 등 고초를 겪었으며 군사동맹도 성사시키지 못하고 15년 만에 漢나라로 돌아왔지만,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서역 36개국에 대한 보고는 서역에 대한 武帝의 관심과 열정을 고조시켰다.

武帝는 피땀을 흘리며 하루에 1000리를 달린다는 汗血馬(한혈마)에 관한 얘기를 듣고 그것을 갖고 싶어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기원전 104년과 101년의 두 번에 걸쳐 李廣利의 부대를 汗血馬의 명산지 大宛(대완: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 지방)에 보내 기어이 명마를 확보했다.

騎馬戰에 능숙한 匈奴에게 이기려면 기마군단의 육성은 선결요건이었다. 匈奴는 北方 草原의 最强者로서 漢의 安保를 끊임없이 위협해 왔다. 여기서 잠시 匈奴-中國의 관계사를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秦제국이 멸망하고 중국 內地가 분열되어 있을 때 북방 草原지대의 최강자로 출현한 인물은 흉노의 冒頓(모돈)이라는 영웅이었다. 모돈은 秦에게 빼앗겼던 남쪽 舊領을 회복하고, 동쪽으로는 東胡를 습격하여 멸망시켜 버렸다. 서쪽으로는 지금의 甘肅省 방면에서 세력을 떨치던 大月氏를 토벌하고, 북쪽으로는 外몽골에 침입하여 투르크系의 丁零(정령: 위구르족의 先祖) 諸部의 항복을 받아 北方 草原에서 최초의 大領土國家를 건설했다.

모돈의 흉노가 북방에서 覇業(패업)을 이루던 시기에 그 남방에서는 漢의 高祖 劉邦(유방)이 楚覇王 項羽(초패왕 항우)를 쓰러뜨리고 中原을 통일했다. 기고만장한 高祖는 지금의 山西省으로 침입한 흉노를 요격했지만, 대패하고 平城에 갇혀 포위공격을 받았다. 고립무원의 高祖는 흉노에게 화의를 구걸한 끝에 겨우 목숨을 건져 長安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후 흉노와 漢은 兄弟의 나라가 되었는데, 漢은 宗室의 公主를 흉노 單于(선우: 大君主)에게 시집보내고, 또한 매년 수십만 필의 비단과 식량을 제공해야만 했다. 이것은 漢이 흉노의 屬國이었음을 말해 주는 역사적 사실이다. 당시 아시아 대륙의 패권국은 漢이 아니라 흉노였던 것이다.


漢武帝의 흉노 정벌

漢에서 武帝가 즉위하던 무렵, 흉노에 單于의 상속문제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 흉노의 유력한 부족들이 漢에 투항했다. 漢은 투항한 흉노의 騎兵을 선봉으로 삼아 흉노를 공격, 감숙성 방면의 渾耶王(혼야왕)을 항복시켜 흉노의 우익을 잘랐다.

武帝는 西方으로부터 이란 계통의 馬種을 도입, 개량·사육하여 대규모 기마부대를 조직했다. 衛靑·藿去病(곽거병) 등의 名將이 이 기마군단을 이끌고 흉노를 토벌, 흉노는 內몽골에서 버티지 못하고 고비사막 너머의 外몽골로 도피했다. 漢軍은 다시 고비사막을 넘어 흉노를 추격, 바이칼 호반에다 戰功을 새긴 碑를 세우기도 했다. 이때 예니세이 河畔의 투르크系 丁零族, 熱河省內 東胡의 후예인 烏桓族(오환족) 등도 독립하여 흉노를 공격했다. 이로써 흉노는 군사적으로 大타격을 받았다.

武帝의 시대, 漢은 天山南路(오아시스路)의 땅을 차지했다. 이어 宣帝의 시대에 天山北路의 여러 나라를 지배했던 흉노의 日逐王(일축왕)이 항복하여 漢은 天山 남북 兩路를 확보하게 되었고, 흉노는 점점 勢를 잃었다. 드디어 呼韓耶(호한야) 선우는 漢에 대하여 항복을 청해 臣下가 되었고, 이후 長城을 漢-흉노의 국경선으로 삼았다.

前漢을 멸망시킨 王莽(왕망)의 시대(新나라)에 흉노는 중국으로부터 이반했지만 光武帝가 新을 멸하고 창업한 後漢은 前漢 이래의 전통적 국책에 따라 天山南路(오아시스路)의 오아시스 諸國을 초무하여 이곳의 흉노세력을 몰아냈다. 이때 흉노는 내분에 의해 南北으로 분열했는데, 南흉노는 後漢에 항복했다.

그러나 北흉노는 外몽골 오르콘 河畔에 單于庭(선우정)을 설치하고, 西아시아 방면에의 교통로인 天山南路(오아시스路)의 영유권을 놓고 後漢과 자주 전쟁을 벌였다. 이럴 무렵 흉노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鮮卑族(선비족)이 北흉노와 싸워 선우 優留(우류)를 죽였고, 북방의 丁零과 남방의 南흉노도 北흉노를 공격했다.

알타이山中으로 물러나 있던 北흉노는 後漢-南흉노 연합군의 토벌을 받고 몽골 땅을 포기하고 天山北路와 이리河畔으로 도피했다. 이 北흉노가 4세기에 유럽을 강타, 로마·게르만 세계에 민족 대이동을 일으키게 했던 훈族이다.


突厥과 唐의 헤게모니 다툼

後漢은 明帝 때 班超(반초)를 파견하여 서역을 경영했고, 서기 91년(후한 和帝)에는 西域, 즉 지금의 신강을 평정했다. 반초는 부하 甘英을 大秦國(대진국=로마)에 보냈으나 그는 시리아에서 東西무역의 독점을 노린 현지 상인 등의 방해를 받아 되돌아온 일도 있었다. 그러나 반초 이후 후한은 西域에서 후퇴를 거듭하여 魏晉南北朝란 분열의 시대엔 鮮卑族·돌궐族 등이 초원지대와 오아시스路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618년 唐제국이 창업되던 무렵, 초원지대의 최강자는 알타이山 부근에 거주하던 突厥(돌궐)이었다. 突厥은 투르크의 중국식 音譯이다. 돌궐은 柔然을 격파하고 東으로는 內몽골, 西에는 南시베리아·중앙아시아에 大帝國을 건설했다. 唐도 창업 초기에 돌궐 騎兵부대의 지원으로 群雄들을 물리치고 中原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唐은 貞觀(太宗의 연호) 초기까지 돌궐에 朝貢을 바쳐야 했다.

그렇게 강성했던 돌궐도 내란으로 약화되기 시작했다. 唐 太宗은 돌궐의 지배를 받다가 봉기한 薛延陀(설연타) 諸部와 동맹하여 돌궐을 공격, 詰利可汗(힐리가한)을 붙잡아 東동궐을 멸망시켰다. 貞觀 4년(630)에는 장군 李靖(이정)을 보내 하미(伊吾)를 점령했고, 10년 후에는 侯君集(후군집)이 高昌國을 멸했다.

그러나 東동궐과 분립했던 西돌궐의 영토는 카스피海에 달했고, 중앙아시아 諸國을 하나하나 복속시켜 오아시스路의 지배자가 되었다. 또한 東로마帝國과 국교를 맺고, 페르시아도 복종시켜 西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했다.

唐 太宗의 후기에 西돌궐은 내분으로 또다시 兩分되었다. 太宗의 아들 高宗은 657년 西돌궐 정벌을 위해 蘇定方 등이 이끄는 원정군을 스이아프(碎葉·쇄엽)를 넘어서 타슈켄트(石國)까지 진군시켰다. 이로써 西돌궐로부터 天山南路, 즉 오아시스路를 탈취하여 여기에 郡縣을 설치했다. 쇠약해진 西돌궐은 突騎施(돌기시)에게 멸망당했다.


慧超와「往五天竺國傳」

後漢 明帝 때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이래 많은 西域僧(서역승)들이 중국에 왔다. 魏晉南北朝 시대에 이르면 불교는 중국에서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드디어 직접 天竺(천축=印度)에 가서 佛典의 수집 및 성지 순례를 열망하는 入竺求法僧(입축구법승)이 많이 출현했다. 그들은 많은 여행기를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東晋의 승려 法顯(법현)의 「佛國記」, 唐의 승려 玄奬(현장)의 「大唐西域記」, 慧超의 「往五天竺國傳」이 가장 저명하다.

慧超는 704년경 신라에서 태어나 719년(16세 무렵) 渡唐, 廣州에서 天竺의 밀교승 金剛智(금강지) 문하에 들어갔다. 天竺은 印度를 가리키는 중국식 國名이다. 그가 스승의 권유에 따라 南海路, 즉 「바다의 실크로드」로 印度에 건너간 것은 723년의 일이었다.

東천축에 상륙해 불교 4大 성지를 비롯한 불적지를 돌아보고 中천축·南천축·西천축·北천축을 순방했고, 인도 서쪽의 大食國(대식국: 아랍) 치하의 波斯(파사·페르시아)까지 갔다가 귀로에 중앙아시아와 파미르 고원을 넘어 727년 11월 安西都護府 소재지인 龜玆(쿠차)를 거쳐 長安으로 돌아왔다. 왕오천축국전은 「다섯 천축국(五天竺國)을 다녀온(往) 기록(傳)」이란 뜻이다.

이후 그는 長安 薦福寺(천복사)에서 師僧 금강지와 함께 8년간(733.1~741 중추) 「大乘瑜伽金剛性海曼殊室利千臂千鉢大敎王經(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을 비롯한 밀교 경전을 연구하고 漢譯했다. 金剛智가 입적하자 장안의 大興善寺에서 금강지의 高弟인 不空의 강의를 수강하며 773년 10월부터 灌頂道場(관정도량) 등 密敎의식을 주도했다. 774년 5월 不空의 입적 당시에 혜초는 그의 6大 제자 중 둘째 제자였다. 代宗 때 가뭄이 심하자 비를 기원하는 「賀玉女潭祈雨表(하옥녀담기우표)」를 지어 황제에게 올리고 옥녀담에서 祈雨祭를 주관했다. 780년 5월 중국의 오대산 乾元菩提寺(건원보리사)에 들어가 密敎 경전 연구에 전념하다가 입적했다.

「왕오천축국전」은 8세기 후반 黃麻紙에 쓰인 필사본으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最古의 기행문(이 책은 현재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이다. 書誌學的 측면에서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中世 세계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이다.

東西交流史 전공학자 정수일씨는 『慧超에 앞서 印度를 여행했던 法顯의 「佛國記」나 玄奬의 「大唐西域記」에 비해 서술은 간략하나 「왕오천축국전」의 사료적 가치는 뒤지지 않는다. 8세기 印度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왕오천축국전」은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정치·문화·풍습·종교 등 다방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고, 특히 그 시기 그 지역의 불교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대체로 나라 단위로 서술되어 있고, 출발한 나라에서 목적한 나라로 가는 방향과 소요 시간, 王城의 위치와 규모, 통치상황, 대외관계, 기후와 지형, 특산물, 음식과 의상 등도 간결하지만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慧超는 최초로 아랍을 「大食」이라 명명했고, 漢字문명권內에서 처음으로 아랍에서의 견문을 여행기에 담아 후세에 전했다. 不空의 제자를 대표하여 황제에게 올리는 表文을 작성할 정도로 文才가 출중했던 慧超는 自作詩 다섯 수도 수록해 「왕오천축국전」의 문학적 가치를 높였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地名을 意譯하지 않고 音譯했다는 점에서 언어학적 가치도 높다.


高仙芝 등장의 시대적 배경

高仙芝는 唐 玄宗 때의 名將으로서, 668년 高句麗가 羅唐연합군에 의해 멸망된 직후 唐으로 강제 이주된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高舍鷄(고사계). 고사계는 安西 4鎭 소속 장군의 지위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高仙芝는 안서도호부 쿠차에서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高仙芝 역시 아버지를 따라 弱冠에 安西都護府의 유격장군이 되었고, 741년엔 安西 副都護, 그리고 安西 4鎭의 都知兵馬使가 되었다. 安西都護府라면 西域(지금 신강)의 군정·행정을 통괄하는 기관이었다. 휘하에는 카라샤르(焉耆·언기)·쿠차(龜玆)·카슈가르(疎勒)·코탄(지금의 호탄) 등 4개의 都督府를 두었다.

唐이 세계제국으로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은 西域의 오아시스 국가에 대한 종주권과 東西교역로의 길목을 장악하고 있던 西돌궐의 세력을 驅逐(구축)함으로써 가능했다. 唐은 太宗 연간에 이미 高昌과 쿠차를 쳐서 西돌궐의 세력을 서북쪽으로 밀어냈다.

唐은 高宗 연간에도 또다시 원정군을 보내 西돌궐에 대해 결정타를 가했다. 이때 唐은 카라샤르에 있던 安西都護府를 쿠차로 前進시키고, 天山 북쪽 기슭의 碎葉城(쇄엽성)에 都督府를 신설했다. 서기 658년의 일이다.

西돌궐 세력이 무너진 직후, 草原의 강자로 급부상한 것은 西돌궐의 10姓 중 하나였던 튀르기스(突騎施) 부족이었다. 튀르기스의 출현에 의해 唐의 西域 경영은 일시 守勢에 몰려 쇄엽성에 있던 전방기지를 카라샤르로 후퇴시켰다.

그러나 開元 27년(739)에 玄宗은 튀르기스에 대한 대대적인 정벌전을 벌였다. 이후 서역에 있어 唐의 지배권이 한동안 확립되었다. 그러나 唐제국의 융성과 시기를 같이하여 西方에서는 사라센 제국이 이슬람敎의 열정을 품고서 불같이 일어나고 있었다.

사라센 제국은 팽창을 거듭하여 서쪽으로는 地中海 세계를 석권하고, 동쪽으로는 시리아·페르시아, 그리고 호라산 평야를 장악하였으며, 여기를 발판으로 삼아 다시 파미르 고원 동쪽의 中國까지 제압하려고 했다.

일단, 唐은 吐藩(토번: 지금의 티베트)과 사라센 제국의 연결을 차단하려 했다. 당시 토번은 唐의 서역 진출을 끊임없이 견제해 온 티베트 高原의 强者였다. 한때 오아시스路와 스텝(초원)路까지 장악하려다가 唐軍에 의해 좌절당한 토번은 아무江의 상류로 진출하여 東進하던 사라센 제국의 대군과 연합하여 唐의 西進勢를 포위하려는 태세를 보였다.

741년, 토번은 발치스탄(小勃律國·소발률국)을 항복시키고, 그 西北 20여 개국도 복속시켰다. 이것은 唐의 安西 4鎭을 3面으로 포위하는 형세였다. 高仙芝로서는 사라센-토번의 연합을 차단하기 위한 일대 작전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中央亞·西域 72개국 복속시킨 파미르 高原의 영웅

唐 玄宗의 특명을 받은 行營節度使 高仙芝가 휘하 1만 병력을 이끌고 원정에 오른 것은 747년 늦봄이었다. 신라의 求法僧 慧超가 인도 佛跡 순례를 마치고 安西都護府 소재지인 구차에 도착한 지 꼭 20년 뒤의 일이었다.

쿠차를 출발한 高仙芝의 원정군은 타클라마칸 사막과 천산산맥 사이의 오아시스 北路를 통해 지금의 카슈카르에 도착했다. 여기서 파미르 고원을 바라보고 오름길에 들어선 지 20여 일 만에 지금의 샤리콜 지방의 요충 타슈쿠르간 城砦(성채)에 진입했고, 다시 20여 일의 행군으로 파미르 고원의 최고지점을 통과하여 파미르川에 이르렀다. 또다시 20여 일의 행군 끝에 당도했던 五識匿國(오식닉국)은 지금의 쉬넌 지방이다.

그렇다면 타클라마칸 사막과 파미르 고원을 돌파해야 했던 高仙芝 군단의 군량보급 등 병참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新唐書와 舊唐書에는 「모든 군병은 각자 자기 소유의 軍馬를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파미르 고원 정상부에 위치한 토번의 군사기지인 連雲堡(연운보)에 대한 공격에 앞서 高仙芝는 휘하의 군단을 3개 부대로 나눠 병법상의 分進合擊을 구사했다. 즉, 제1부대는 왁칸국(護密國) 방면으로부터, 제2부대는 북쪽의 절벽(北谷)으로부터, 제3부대는 동쪽 赤佛堂 방면으로부터 진격했다.

7월13일 辰時(오전 7~9시)를 기해 3개 부대는 西·北·東 세 방면에서 연운보를 공격, 함락시켰다. 이어 小勃律國의 수도인 阿拏越城(아나월성)으로 진격하여 점령한 다음 사라센 제국과 유일한 통로인 阿拏越 남방 60리 지점의 교량을 파괴하여 사라센-토번의 연합전선을 끊었다.

이 제1차 원정에서 서역 및 중앙아시아 72개국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사라센의 東進을 막은 공로로 高仙芝는 홍로경어사중승으로 승진하고, 이어 特進兼左金吾大將軍同正員이 되었다.

750년의 제2차 원정에서는 파미르 고원 서쪽 시르江 중류의 타슈켄트(石國)를 토벌했다. 사라센 제국의 名將 아부 무슬림이 카스피海 연안에 위치한 호라산의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타슈켄트와 연합전선을 형성할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 원정에서 타슈켄트 국왕과 공주를 생포한 공로로 그는 開府儀同三司로 승진했다. 이때 唐 조정은 長安의 文臣들의 주장에 따라 포로가 된 타슈켄트 국왕을 궐하에서 참살하는 큰 실책을 범했다.

이 같은 졸렬한 처사가 서역 여러 나라들의 격분을 사고 말았다. 사라센은 복수심에 불타는 서역 여러 나라를 충동하여 반기를 들게 하고, 20만의 연합군을 조직해 唐제국에 결전을 강요했다.


탈라스 전투와 製紙法 전파

서기 751년 7월, 高仙芝는 7만 명의 대병력을 이끌고 安西都護府 소재지인 쿠차를 출발, 아쿠스에서 북상하여 천산산맥을 넘어 파미르 고원 北方 탈라스 강변으로 나아가 사라센 제국(압바스王朝)의 연합군 20만 명과 대진했다.

高仙芝로서는 불운했다. 본국의 지원이 부실한데다 唐軍과 연합을 가장했던 카르룩(葛邏祿·갈가록)軍이 불시에 高仙芝 군단의 배후를 급습했던 것이다. 전투는 일방적인 도살로 끝났다. 「通典」에 실린 杜佑의 증언에 의하면 高仙芝 군단은 하루 아침에 궤멸되고 말았다. 「資治通鑑」에 의하면 수천 명만 血路를 뚫고 본국으로 생환했다.

이슬람교의 관습에 따르면 전쟁포로는 모두 노예가 된다. 노예가 된 포로들 중에는 종이를 만들 줄 아는 기술자들도 끼어 있었다. 종이 제조술은 後漢의 서역 진출과 함께 현재의 新疆 각지에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투르판에서 서기 296년에 寫經(사경)된 經典 등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古代 각 문명권에는 제각기 문자가 발생했는데, 그 문자들이 쓰이는 재료 역시 제각기 달랐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楔形文字(설형문자)가 점토판에 기재되었고, 이집트에서는 물가에 자라는 갈대 비슷한 水草로 만든 파피루스가 사용되었다.

파피루스는 기원전 7세기로부터 페니키아人에 의해 그리스에 수출되고, 기원전 3세기에는 로마에도 전해졌다. 그러나 파피루스는 4세기 무렵부터 점차 사용하지 않게 되고, 羊皮紙가 그것을 대신하게 되었다. 문제는 양피지가 너무 비싸다는 점이었다.

중국에서는 春秋戰國시대가 되면 木簡·竹簡에 문자를 기록했고, 漢代엔 흰 비단에 문자를 쓰는 帛書(백서)가 유행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비용이 많이 들었다. 後漢시대에 이르러 宦官인 蔡倫이 樹膚(수부)·麻·넝마·漁網 등을 원료로 해서 종이를 만들었다. 그는 서기 105년에 이것을 和帝에게 헌상했다.

중국의 제지법은 당시 첨단의 기술이었다. 곧 사마르칸트에 唐軍 포로에 의해 제지공장이 세워져 사마르칸트는 종이의 특산지가 되었다. 8세기 말, 압바스朝의 5代 칼리프 하른 아라시드는 바그다드에 제지공장을 지었다.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도 종이가 생산되었는데, 이 종이는 유럽에 수출되어 「다마스쿠스 종이」로 불렸다.

9세기 말부터 10세기에 걸쳐서 카이로에서도 종이 생산이 시작되었다. 이후 제지법은 두 개의 루트를 타고 유럽에 전파되었다. 하나는 리비아를 거쳐 12세기에는 모로코로부터 이베리아 반도에 전하고, 북상하여 프랑스에 이르는 루트였다. 또 하나는 이집트로부터 해로를 통해 1050년 시실리 섬에 전하고, 다시 베네치아를 경유 1391년 독일의 뉘른베르크에 전해지는 길이었다.

前者는 15세기 들어 프랑스로부터 독일, 네덜란드, 영국에 전파되었다. 런던에 제지법이 전해진 것은 1494년이고, 다시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 전해진 것은 1690년의 일이었다.


우루무치의 漢族의 移住 러시

8세기 이후 이슬람圈에서 종이 생산이 번창한 것은 코란의 轉寫 및 諸 과학의 발달로 종이의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당시 세계 제1의 문명권은 이슬람 세계였다. 15세기 유럽에서 종이가 보급된 배경에는 구텐베르크에 의한 인쇄술의 발명으로 역시 수요가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답사단 일행은 6월17일 오전 11시25분, 北京공항을 출발하여 오후 3시10분 우루무치에 도착했다. 우루무치는 新疆(신강)위구르自治區의 區都이다. 自治區를 우리나라 대도시의 區 정도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新疆위구르자치구는 韓半島 면적의 무려 7.5배에 달하는 광활한 땅이다.

新疆은 중국의 서북단에 위치하는데, 그 면적은 166만km2로서 중국 전토의 6분의 1이다. 천산산맥을 경계로 하여 양분되는데, 북부는 초원지대이고, 남부는 사막지대이다.

모래바람에 휩싸인 우루무치의 하늘과 땅은 온통 잿빛이었다. 한자로 烏魯木齊(오로목제)라고 표기되는 우루무치는 위구르語로 「아름다운 목장」이라는 뜻이다. 천산산맥의 북쪽 기슭, 해발 700~900m의 분지에 위치하고 있다. 옛날 실크로드의 天山北路, 즉 스텝로드가 거쳐가던 곳으로 18세기까지는 유목민의 목지였다.

淸朝가 新疆을 정복했던 1755년(乾隆 20년)경부터 이 땅에 屯田(둔전)이 개시되었고, 1763년 迪化(적화)로 명명되었다. 우루무치河의 서안에 滿城이 축조되어 우루무치 都統을 필두로 하는 八旗부대가 주둔했다. 東岸에는 漢城이 축조되어 우루무치 提督 이하의 군대와 內地로부터 이주한 漢族이 거주했다. 漢族의 이주 증가에 따라 행정구로서 迪化縣이 설치되었다.

1884년, 新疆省의 성립에 의해 우루무치는 迪化라는 이름으로 省都가 되고 행정장관(巡撫·순무)이 주재했기 때문에 滿·漢 2城을 1城으로 통합하는 大修築이 이뤄져, 新疆 통치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이곳은 중화민국시대(1912~1949)에도 省都였다.

1955년 新疆위구르자치구 성립 후 우루무치란 이름이 부활, 자치구의 區都로서 계속 新疆 통치의 중심이 되었다. 중심가 건물 중에는 舊소련과의 밀월시대에 소련과의 교류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 많지만, 최근 「西北大開發」 정책에 의해 근대적 빌딩이 건설되어 면목을 일신하고 있다.

자치구 성립 이후 漢族의 이주가 더욱 촉진된 결과,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현재 新疆위구르자치구의 인구는 약 1800만 명으로서 위구르族과 漢族이 각각 800여만 명, 나머지가 回族·몽골族·카자흐族 등이라고 한다. 인구 300만의 우루무치는 漢族이 약 80%를 차지, 漢族의 식민도시라는 느낌이 강하다.

위구르族은 新疆의 主體를 이루는 민족이다. 특히, 천산산맥 이남의 카슈가르, 호탄, 아쿠스 등지는 위구르族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위구르는 「단결」 또는 「연합」이라는 의미이다. 이 민족의 뿌리는 기원전 3세기에 중국 북부에서 유목생활을 했던 丁零人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후 그들은 「鐵勒」, 「赤勒」이라고 칭해지기도 했다. 고대 실크로드가 번영했을 때 中原에서는 그들을 「胡人」이라고 불렀다.

7세기경 鐵勒의 諸 부족은 오르혼江을 중심으로 遊牧的 봉건 칸국 「回紇」(회흘)을 세웠다. 8세기 말 「安史의 亂」 때는 위구르의 援兵이 두 번이나 출병하여 멸망 위기의 唐朝를 구원했다. 이때 回紇은 막대한 원병의 代價를 요구하여 唐의 財政을 어렵게 하기도 했다. 「回紇」은 후에 「回 」(회골)이라고 불렸다.


傳統 사각모자를 벗지 않는 위구르人

9세기 중엽에 回 人이 사막화하는 초원으로부터 서쪽 高昌(지금의 투르판), 쿠차, 호탄 등지에 이주하고부터 불교를 믿는 현지의 다른 민족과 융합했다. 위구르의 선조인 回 人은 상당히 긴 기간에 걸쳐 불교를 신봉했지만, 17세기 초엽에 이슬람교도가 무력으로 이곳 위구르人을 정복한 이후 이슬람교로 改宗했다. 이에 따라 위구르族의 풍속과 관습도 이슬람化했다.

이슬람 사원인 우루무치 淸眞寺(청진사: 회교사원)와 시장을 둘러보았다. 위구르人의 얼굴은 눈이 깊고 코가 높아 인상적이었다. 특히 위구르 처녀들이 입은 줄무늬의 原色 원피스는 여러 갈래로 땋아 허리께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린 머리채와 어우러져 매우 화사했다.

젊은 부인들은 얇은 천으로 머리와 얼굴을 가리고 외출하지만, 대부분의 남녀노소는 형형색색의 문양을 수놓은 사각모자를 쓰고 있다. 이 사각모자의 착용이야말로 위구르인의 아이덴티티(正體性)를 지키려는 몸짓인 것처럼 보인다. 위구르 모자를 쓰고 관청에 출입하면 수위나 경비병이 방문 목적 등을 꼬치꼬치 캐묻는 등 귀찮게 군다지만 위구르人들은 그들의 사각모자를 결코 벗지 않는다. 중국 당국은 위구르人의 정치적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 같다.

우리 답사단 일행은 우루무치의 시가지를 둘러본 다음, 오후 9시50분 우루무치 공항에서 호탄(和田)으로 가는 여객기를 탔다. 위구르人의 80%는 천산산맥 以南에 거주하고 있다.

오후 9시50분이었지만 新疆은 해가 지지 않아 아직도 밝다. 여객기가 사막에 건설된 활주로를 달려 힘차게 이륙한다. 머리에 萬年雪을 이고 있는 천산산맥의 웅자가 보인다. 여객기는 표고 3000∼4000m의 준봉을 비스듬히 종단한다. 저 멀리 지평선에 석양이 걸려 있다. 처절하리만큼 붉다. 석양은 금세 지평선 너머로 자취를 감출 것 같다.

그러나 아니었다. 여객기가 高度를 높이니 석양의 모습은 더욱 또렷하다. 석양을 받은 비행기의 날개가 번뜩인다. 여객기는 서남방으로 항로를 돌린다. 구름 위의 하늘은 아직도 파랗다. 오후 10시15분. 태양은 지평선을 벌겋게 물들이며 꼴각거린다. 그러고 나서도 30분이 지난 10시45분 무렵까지 하늘과 땅은 어둡지 않았다.


玉의 특산지 호탄

밤 11시30분 호탄 공항에 도착했다. 호탄빈관으로 직행하여 짐을 풀고 호텔 앞 거리의 목로주점에서 답사단의 길동무들과 어울려 新疆삐주(맥주)를 마시며 위구르人 동네 진입의 첫날밤을 자축했다.

새벽 2시 무렵이었다. 대학생 風의 청년 10여 명이 기분 좋게 취한 모습으로 노래를 부르며 목로주점 앞을 지나쳐 갔다. 중국의 공식적 시간인 北京 시각으로는 새벽 2시라 해도 위구르人 생활리듬으로는 아직 밤 12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위구르人은 北京 시각이야 어떻든 그들의 시계를 두 시간 앞당겨 놓은 위구르 시간으로 생활한다. 실제로 이곳 도심 시계탑의 시각도 위구르 시간으로 돌아가고 있다. 어떻든 젊은이들의 몸짓에서는 열정이 흘러 넘친다. 앞으로 그런 젊음의 열정이 어디를 향해 분출할지, 그것이 궁금했다.

타림분지의 중앙 남단, 티베트와 접하는 곤륜산맥의 북쪽 기슭에 위치한 호탄은 新疆에서 위구르族의 전통적 생활양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오아시스 南路의 중심 도시다. 동쪽으로 누란, 서쪽으로 야르칸드, 북쪽으로는 아쿠스와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동쪽의 누란 일대엔 중국의 核기지 등 군사시설이 밀집하여 그곳으론 여행허가를 얻기가 매우 까다롭다고 한다. 중국의 핵실험 장소도 바로 이곳에 있다.

호탄은 唐나라 시절 安西都護府 산하 4鎭의 하나로서 高仙芝가 이곳의 鎭守使로 재임하던 당시엔 于 鎭(우전진)이라 불렸다.

6월18일 아침부터 호탄 박물관, 수령 500년짜리 호두나무가 있는 포도밭, 메리어트 불교 유적지와 호탄 지역의 젖줄인 白玉河를 답사했다. 버스에서 내려 노새를 타고 들어간 메리어트 유적지는 황량한 모래땅에 흙으로 만든 불탑 하나만이 퇴락한 채로 남아 있다. 그 아래로 흐르는 白玉河로 내려가 손을 담갔더니 의외로 시원했다. 사막을 거치는 동안 물빛은 부옇게 변했지만, 그래도 곤륜山에서 흘러내리는 얼음 녹은 물이다.

호탄은 玉의 특산지로 유명하다. 지금도 호탄 지역 곤륜산에는 옥이 많이 난다. 白玉河에서도 홍수 때 곤륜산으로부터 떠밀려 내려온 玉이 채집된다고 한다. 잠시 白玉河에 발을 담구고 있다가 묘하게 생긴 돌 몇 개를 주어서 호주머니에 넣었다.

호탄은 곤륜산에서 北流하여 타림분지로 흐르는 카라카슈江(黑玉河)과 유른카슈江(白玉河)의 扇狀地(선상지)에 펼쳐진 오아시스다. 호탄은 곤륜산의 玉으로 이름났고, 곤륜산의 눈 녹은 물로 농작물을 재배한다. 그러니 곤륜산은 호탄의 생명이다. 곤륜산은 빙설로 덮인 연봉으로 이어지는데, 타림분지 북쪽의 천산산맥보다 더 험하다.

호탄은 이슬람 세력이 파미르 高原을 넘어 동쪽으로 진출한 10세기 이후 교역로의 변화로 그 지위가 격하되었다. 東西교역의 메인 로드가 천산산맥 남쪽 기슭의 오아시스 北路로 변해 호탄을 경유하는 오아시스 南路는 支線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투르크-이슬람化하기 이전의 아리아 불교 시대에 번영했던 호탄은, 이곳을 공격했던 이슬람 교도들에게 「殉敎(순교)의 호탄」이라 불렸다. 불교 세력이 풍요한 오아시스의 富를 바탕으로 강력한 저항을 계속, 이슬람軍 측에서 많은 전사자(순교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카라한朝 군대가 간신히 호탄의 불교정권을 멸망시켰던 11세기 초까지 많은 파괴행위가 벌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대승불교의 중심지였던 호탄에 古代 불교유적이 별로 보존되어 있지 않게 된 까닭이다. 오아시스의 서남단 카라카슈江의 東岸에 솟아 있는 바위산은 불교시대에 대가람이 소재했던 牛頭山이지만, 지금은 완전히 이슬람風으로 개조되어 무슬림(이슬람교도)의 순례지가 되어 있다.

진입로가 협소하여 대절 버스에서 내려 2km의 길을 모래바람을 맞으며 걸어서 찾아간 요트칸 불교 유적지에도 까닭 모를 흙덩이 몇 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황량한 대지를 휩쓰는 모래바람―미리 준비해 간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렸지만, 온몸에 모래가 스멀스멀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대규모 油田 발견

지금 호탄 지역은 새로운 꿈에 부풀어 있다. 최근 근교의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대규모 油田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000년 동안 잃어버렸던 실크로드의 영광을 오일로드로 재현시킬지 모른다.

저녁에 호탄 시내로 되돌아와 호탄 제1의 玉 가공공장과 매장을 둘러보았다. 널찍한 매장에 玉으로 만든 반지·팔찌·목걸이·조각품 등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지만, 우리 韓민족의 먼 조상이 金을 유별나게 좋아하는 알타이系여서 그런지, 玉제품은 별로 탐나지 않았다. 기념으로 佛像을 새긴 소형 白玉 목걸이 하나를 50위안(우리 돈 7500원 상당)을 주고 구입했다.

중국사람은 우리와 달리 玉을 매우 좋아한다. 玉을 좋아하다가 天下를 잃은 사례까지 있다. 「鴻門(홍문)의 宴(연)」에서 楚覇王 項羽는 劉邦(후일의 漢高祖)을 제거하려 했으나 劉邦이 바친 玉구슬 한 쌍을 받고 마음이 누그러져 劉邦을 살려 보내는 실책을 범했다. 후일 項羽는 天下 판갈이 「垓河(해하) 싸움」에서 劉邦에게 패한 뒤 자결한다.

호탄에서 인상적인 것은 위구르人들의 민속시장인 바자르다. 온갖 생활용품과 먹거리를 파는 이동 상점이 즐비하다. 가장 마음을 사로잡은 상품은 위그르人들의 小刀(소도)였다. 칼날도 다양한 모습이고 손잡이와 칼집의 조각도 정교하다. 위구르人들은 칼 차기를 좋아한다. 바자르에는 호신용 칼 상점이 많다. 나는 칼을 한 자루 사고 싶었지만, 공항 검색대에서 걸리는 물건이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6월19일 오전 9시, 우리 일행은 버스를 타고 카슈가르를 향해 달렸다. 東西로 뻗은 곤륜산맥의 북쪽 기슭을 따라 이어지는 570km에 달하는 길이다. 맑은 날에 中途의 葉城에 이르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K2봉(喬戈里峰·교과리봉·8611m)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불운했다. 천지를 휩쓰는 黃砂(황사)로 視界가 매우 불량했다. 오른쪽으론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넓은 사막, 왼쪽으론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을 끼고 달린다는 기분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葉城에서 잠시 하차하여 점심을 먹었다. 하미菓라는 이곳 멜론이 유별나게 달고 시원했다. 시가지 남쪽으로는 K2봉 입구로 가는 도로가 쭉 뻗어 있다. 그곳까지 100여 리 길이라고 한다. 우리 일행은 莎車와 英吉沙를 거쳐 오후 6시 무렵에 카슈가르에 진입했다.

「세계의 지붕」 파미르 高原의 들머리에 위치한 카슈가르의 바자르(민속시장)는 오아시스路上의 名物로 이름 높았다. 도심 十字路를 따라 펼쳐진 바자르의 異國풍물에 흠뻑 젖고 싶었다. 그러나 어이할까. 중심가를 차지했다는 이유로 舊式시장 바자르는 도시현대화 계획에 밀려 먼지를 폴폴 날리며 뜯기고 있었다. 내가 너무 늦게 카슈가르를 찾아온 것 아닌가? 그런데도 은근히 부아가 났다.

新隆大酒店에서 짐을 풀고 위구르족 舞童과 舞姬의 춤을 관람하면서 만찬을 즐겼다. 우리 길동무들도 춤판에 뛰어들어 그들과 함께 신나게 흔들었다. 위구르족은 중국內의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체격도 좋고 얼굴도 잘생겼다. 악기도 잘 다룬다. 우리처럼 歌舞音曲을 좋아하는 민족이다. 중국에서 大酒店이라고 하면 큰 술집이 아니라 賓館과 마찬가지로 호텔이다.

이번 답사 중 「코끼리」(몸집과 성격 때문에 붙은 별명), 「葡萄大將」(포도주에 대해 해박하여 붙은 별명), 「벤처 교수」(대학에선 벤처 경영학을 강의하는 그는 모험정신을 배양하기 위해 이미 세계 90여 개국의 오지를 여행했다고 해서 붙은 별명), 「香妃」(목소리가 낭랑해 붙은 별명), 「실크로드의 朴小姐」(자기를 소개하는 스피치에서 답사 이유를 가장 재치 있게 밝혀 붙은 별명) 등과 어울려 카슈가르의 인민공원으로 놀러갔다.

이곳 시민들도 오아시스의 한여름 밤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앙증맞은 놀이기차를 타면서 童心으로 돌아갔다. 우리들은 중국에서 빅히트를 한 鄧麗君(등려군·덩리쥔)의 노래 「月亮代表我的心(예량따이비아오워더신)」을 합창했다. 턱없이 거대한 毛澤東 동상(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것이라고 한다)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아시스의 밤은 더욱 로맨틱했을 것이다.

호텔에 돌아와서도 우리는 새벽까지 맥주 파티를 벌였다. 답사단의 某某씨가 호텔 구내 「香妃別館」에 맥주 한 박스를 준비해 놓고 우리 일행을 초청했기 때문이다. 향나무로 지은 향비 별관의 내부는 위구르族의 궁전 같았다. 양탄자와 벽걸이 장식이 호화로웠다. 평소에는 黨간부 등에게만 배정된다는 VIP용 객실인데, 이날 밤에는 일반 객실이 부족했던 탓에 우리 답사단에게도 방 2개가 배정된 것이었다.


「세계의 지붕」 파미르 高原의 카라쿠리湖

카슈가르는 중국 最西部, 타림분지의 서쪽 끝과 파미르 고원의 동쪽 기슭에 펼쳐진 오아시스 도시의 이름이다. 지금 이곳의 정식 지명은 카스(喀什·객십)이다. 그래도 주민들은 카슈가르라고 부른다. 카슈가르는 「오색찬란하다」는 뜻의 「카스(Kash)」와 「집」을 의미하는 「가르(Gar)」의 합성어라고 한다.

이 땅에는 기원전 2세기에 이미 漢字로 疏勒(소륵)이라고 표기되는 오아시스 국가가 존재했다. 그 후 이 땅의 사람들이 불교를 믿었다는 것은 현재 카슈가르 北郊의 三仙洞 유적 및 동쪽 교외의 사막에 남아 있는 모르佛塔 등에 의해 밝혀졌다.

카슈가르란 지명에 관한 最古의 기록은 8세기 초의 신라 승려 慧超의 여행기 「往五天竺國傳」에 보이는 伽師祗離(가사지리·카시기리)이다. 당시 唐의 서역 통치 현지기구인 安西都護府에 속하는 4鎭 중 하나가 설치되어 있었고, 唐나라 군대가 주둔하여 현지의 小乘系 佛舍와는 별도로 중국 승려가 주지였던 大雲寺라는 절이 있었던 것도 「往五天竺國傳」이 전하고 있다.

카슈가르에서 西進하면 이란으로, 南進하면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이란·인도로 가는 실크로드이다. 747년, 行營節度使 高仙芝의 부대는 安西都護府 소재지 쿠차를 출발하여 카슈가르에 도착하여 부대의 재정비를 마친 다음에 파미르 고원을 넘어 小勃律國에 이르는 제1차 원정을 감행했다.

6월20일 오전 9시, 우리 답사단은 버스를 타고 高仙芝 장군의 원정로를 따라 파키스탄과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카라쿠리湖를 향해 출발했다. 파미르 고원으로 오르는 가파른 通路 초입에서 공안부대원이 답사단 버스에 올라와 우리들의 얼굴을 스윽 한번 살피고 내려갔다. 이곳 검문소 일대에서는 사진촬영을 금지한다는 경고 푯말이 세워져 있다.

파미르 고원을 넘는 하이웨이는 무스타그峰의 기슭을 통과한다. 무스타그峰은 萬年雪을 이고 있다. 계곡에는 만년설이 녹아내려 물줄기를 이루고 있다. 물줄기 건너편으로 폭 2m 남짓한 좁은 길이 뱀처럼 이어져 高地를 향해 뻗어 있다. 이 좁은 길이 옛 실크로드의 흔적이다. 그 옆으로는 천길 낭떠러지, 졸기만 하면 추락사해야 했던 위험구간이었을 것이다.

붉은 산이 유별나게 많다. 한때 이곳의 붉은 흙을 파내어 페인트 代用으로 중국 공산당의 구호를 썼다고 한다. 홍위병이 난동을 부렸던 30년 전에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이다. 철부지들은 「專(나라의 발전)」 보다 「紅(이데올로기)」을 유별나게 좋아해 중국 사회를 30년 후퇴시켰다. 노새를 탄 위구르族 남자가 짐을 실은 낙타 세 마리를 밧줄 하나로 꿰어 끌고 가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네 시간을 달려 카라쿠리 호반에 도착했다.

카라쿠리湖畔은 표고 3600m. 호반에서 중국돈 20위안을 지불하고 관광용 낙타와 말을 번갈아 탔다. 호반 음식점의 계단을 오르다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산소 부족에 의한 고산증세였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주저앉아 있었더니 금세 편안해졌다.

이곳 음식점에는 화장실이 없다. 용변은 음식점 뒤로 나가 아무데서나 보게 되어 있다. 이런 걸 꺼려하는 사람은 중국 오지여행을 포기해야 한다. 갑자기 속이 더부룩하여 기름진 중국음식에 견디려고 준비해 간 소화제를 입속에 털어넣었다.


香妃는 위그르族의 자존심

6월21일, 시내에서 10km 떨어진 香妃墓에 들렀다. 香妃라면 카슈가르 출신으로 1757년 淸나라 乾隆帝의 제3비가 된 절세미인이다. 이 여인의 몸에서 향기가 감돈다고 해서 香妃라고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香妃는 乾隆帝와의 잠자리를 끝내 거절하고 창가에 기대어 서쪽 고향만 그리워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황태후가 황제의 지방순시 중에 환관을 시켜 목졸라 죽였다고 한다.

香妃가 죽자 카슈가르 사람 124명이 특수한 상여를 메고 3년 반이나 걸려 北京에서 이곳으로 그녀의 시신을 운구해서 돌아왔다고 전해진다. 현재도 香妃는 이곳 위구르人들에게 자존심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민족적 독립 열망과 무관치 않은 듯하다. 香妃에겐 고향에 정혼자가 있었기 때문에 乾隆帝가 동침을 요구해도 칼을 빼들고 거절했다고 위구르人들은 믿고 있다.

향비묘는 이곳의 豪族이었던 호자 一族 72명이 묻힌 가족묘이다. 사실, 香妃는 河北省 遵化縣에 위치한 東陵에 묻혀 있다. 따라서 이곳의 향비묘는 虛墓(허묘)인 것이다. 香妃처럼 투구와 갑옷 차림에 칼까지 찬 위구르 처녀 모델과 기념사진을 한 장 찍었다.

10세기 후반 이 땅에는 투르크系 언어가 사용되었고, 西方 이슬람의 사료에도 「카슈가르」의 지명이 등장하게 된다. 특히 투르크系 유목민 카르루크가 수립한 카라한 朝가 오아시스 지배의 거점 중 하나를 카슈가르에 설치, 그 君主 사토크 보그라 汗이 이슬람으로 개종함으로써 이곳은 東方이슬람권의 요지로서 유명하게 되었다.

이 땅의 출신자로서 바그다드에서 활약했던 하흐무드 카슈가리는 11세기에 아라비아語로써 중앙아시아의 투르크 諸언어를 해설했던 辭書를 편찬했다. 이것은 그때 이미 카슈가르에 이슬람문화가 정착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현재 카슈가르는 16세기 몽골의 차카다이(칭기즈칸의 제2자) 汗의 자손이 축조한 都城을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이다. 18세기 중반에 淸이 타림분지를 지배하게 되면서 그 행정·군사의 거점을 舊城(구성)의 서남쪽에 건설했다. 현재 카슈가르 중심부의 동북쪽 대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그 유적이 있다.


아쿠스―타림분지 西北의 교통요지

6월21일, 이제부터 우리 일행은 오아시스 北路를 따라 중국 內地 쪽으로 東進을 하게 된다. 카슈가르에서 버스로 470km의 거리를 무려 9시간이나 달려 아쿠스에 도착했다. 아쿠스 시내로 들기 직전에 갑자기 길이 막혔다. 트럭 한 대가 진입로를 막고 있었다. 도로 보수공사 중이었다. 1시간10분을 기다린 끝에 길이 열렸다. 아쿠스友誼賓館의 현관에 들어서니 위구르 전통의상 차림의 여종업원들이 우리 일행에게 일일이 물수건 하나씩을 나눠 주었다. 최상의 환대로 느껴졌다.

아쿠스는 타림분지 서북부의 오아시스. 동쪽으로 쿠차, 서쪽으로 카슈가르, 남쪽으로 타클라마칸 사막을 종단하면 호탄, 북쪽으론 천산산맥을 넘어 이씩湖와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이다. 옛적에는 姑墨國(고묵국)·跋祿迦國(발록가국) 등으로 불렸고, 都城은 南城 또는 撥換城(발환성)이라고 했다. 漢書 西域傳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姑墨國의 왕은 南城에서 다스린다. 長安에서 8150리, 호수는 3500, 인구 2만4500, 兵 4500인…. 東은 都護 治所에 이르는 2020리, 南은 호탄에 이르는 馬行 15일, 北은 烏孫과 접한다. 銅·鐵·雌黃(자황) 등이 산출된다>

7세기 초에 이곳을 지나간 玄奬은 이 나라를 발록가국이라 부르고, 東西 600여리, 南北 300여 리, 풍속·물산·문자는 쿠차와 동일하지만, 언어는 약간 다르고, 모직물의 생산이 성하다. 불교는 소승불교로서 가람은 수십 개소, 승려는 1000여 명이라고 했다. 648년, 唐이 서역을 평정하고 安西4鎭을 설치하고 이 땅을 姑墨州라고 불렀다.

657년, 唐은 蘇定方(소정방)·蕭嗣業(소사업) 등을 파견하여 西돌궐의 阿史那加路(아사나가로) 軍을 격파했고, 679년에는 키르기스로 진출, 스이아브에 碎葉城(쇄엽성)을 쌓고 여기를 安西4鎭의 하나로 삼았다. 이후 투르크族 및 티베트軍의 공격에 의해 唐의 서역지배는 차츰 동요하지만, 대체로 8세기 중엽까지는 그 판도가 쿠차·아쿠스로부터 天山을 넘어 碎葉城에 이르고, 여기로부터 서쪽으로 탈라스江 유역을 거쳐 타슈켄트·사마르칸트에 이르는 교역로는 唐의 느슨한 지배하에 있었다. 소구드人 등 중앙아시아 상인들은 이 길을 통하여 唐과 교역했다. 그러나 751년 高仙芝 장군이 탈라스 전투에서 아랍軍에게 패전한 이후 唐은 이 지방에서 전면 퇴각했다.

현재의 아쿠스(阿克蘇)는 천산산맥의 남록에 펼쳐진 오아시스의 중심도시다. 그 무렵부터 한자로 姑墨이라고 썼던 이 오아시스는 中世 들어 아쿠스(투르크語로 「흰 물」이라는 뜻)로 부르게 되고, 중부 天山의 유목민과의 관계를 심화시켜 번영했다. 특히 몽골제국의 4칸국의 하나인 차가타이칸국의 시대엔 타클라마칸 사막에 점재하는 여러 오아시스와 유목의 본거지 이리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 번영, 그 직할령이 되었다. 즉, 天山 남쪽의 오아시스路와 天山 북쪽의 스텝路를 연결하는 도로였던 것이다.

18세기 淸朝의 지배시대에 舊아쿠스의 남쪽에 주둔관병을 위한 新城이 축조되고 이를 阿克遜(아극손)이라 명명했다. 그 후 아쿠스 오아시스는 정치·경제적 중심지가 西部의 카슈가르 지구로 옮겨진 탓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아쿠스는 西北 대개발의 중심도시가 되어 활기에 차 있었다. 특히 시내 중심가에는 맵시 있는 신축 백화점 두 개를 비롯한 고층빌딩이 꽉 들어차 있었다.

네 거리의 도로폭이 눈짐작으로 80m는 되는 것 같았다. 여기서 천산산맥을 너머로 뚫린 大路로 200리 쯤 달려서 중국 국경을 넘으면 바로 키르기스이다. 올 연말에 중국-키르기스의 국경구간이 개통될 것이라고 한다. 高仙芝 장군의 3차 원정 때 行軍路였던 이 길은 碎葉에서 스텝路와 만나는데, 여기서 계속 西進하면 우즈베키스탄을 거쳐 러시아의 카스피海 연안에 이르게 된다.


中國 오지 여행은 느긋한 마음으로

6월22일 오전 9시, 아쿠스에서 쿠차를 향해 출발했다. 한 시간쯤 달려 五團場이라는 곳을 지나니 쿠차로 가는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우리 일행은 拜城을 거쳐 쿠차의 대표적 유적지 키질千佛洞을 먼저 답사하고 난 뒤에 쿠차 시내로 들어가기 위해 윗길을 택했다.

윗길을 한 시간쯤 달려 拜城이란 곳에 거의 다가갔는데, 여기서 버스를 돌려 五團場으로 원위치할 수밖에 없었다. 도로보수공사를 이유로 차량통행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차량통행 금지」를 알리는 표지판 하나만 세워 두었어도 이런 헛수고는 하지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이만한 일로 화를 낸다면 중국 오지여행은 하기 어렵다. 『그러려니』 하며 마냥 느긋해져야만 한다.

버스는 拜城에 좀 못 미친 지점에서 五團場 되돌아가 아랫길로 달렸다.

쿠차(龜玆)는 천산산맥 중부의 高峰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눈 녹은 물에 의해 오아시스를 이루고 있다. 기원전 2세기 말에 이미 龜玆라고 명명될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닌 땅이다. 당시 주민은 아리아系로서 인도·유럽語族에 속하는 쿠차語를 사용했다. 오아시스의 경지에 더하여 鐵 등 광물자원에 힘입어 기원전부터 타림분지에서 가장 거대한 오아시스 국가를 성립시켰다. 중국은 漢과 唐 시대에 쿠차로 진출, 현재 遺構(유구)가 남아 있는 광대한 성(漢唐故城) 및 烽火臺 등을 쌓았다.

이 시기의 쿠차는 白(혹은 帛)이란 姓의 왕가가 代를 잇고, 小乘불교가 번영했다. 小乘은 修行을 통한 개인의 解脫을 가르치는 敎法이다. 이란系의 벽화 및 歌舞예술이 성행했는데, 그 흔적은 쿠차 교외 키질 千佛洞 및 사원유적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는 중앙아시아 굴지의 敎團이 조직되어 구마라습·佛圖澄(불도징) 등 불교의 중국 전파에 크게 공헌한 天竺僧이 장기 체류했다.

6세기 들어 유목민족인 돌궐이 발흥해 天山 산중의 유르도스 계곡에 본거를 정하자 南隣의 白氏 쿠차국은 돌궐의 영향권下에 들게 되었다. 7세기 중반, 돌궐을 멸하고 이 땅에 진출한 唐은 쿠차에 安西都護府를 설치하고 西域 경영의 총본부로 삼았다.


절도사 高仙芝의 治所―쿠차

751년 탈라스 전투 이후 唐의 세력이 후퇴, 이 지역의 투르크化가 진행되면서 주민의 사용 언어도 투르크語로 변했다. 특히 서쪽으로부터 들어온 이슬람 세력에 의해 쿠차 일대의 불교문화는 소멸되었다.

현재 쿠차는 地區 중심의 지위를 인근 아쿠스에 넘기고 조촐한 시골거리의 풍정이다. 그러나 쿠차에는 유적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우선, 漢唐시대의 龜玆城의 土壘跡(토루적)이 시내 곳곳에 보존되어 있고, 동북 교외 쿠즈르가河에는 뛰어난 벽화로 장식된 千佛洞과 함께 20m 높이의 봉화대 유적도 현존하고 있다.

시내로부터 북쪽으로 나아가 천산을 넘어 「이리」로 가는 도로를 중도에서 서쪽으로 길을 바꿔 50km쯤 나아가면 키질의 大石窟群에 이르게 된다. 붕괴의 우려 때문에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窟院의 수가 제한되어 있다. 같은 불교굴원이지만, 돈황의 그것이 중국적인 데 비하여 키질 석굴의 벽화는 이란-인도적인 점에서 흥미롭다.

현재의 쿠차 거리는 1957년 키지르江의 대홍수로 옛 시가가 괴멸했기 때문에 동쪽 高지대에 건설된 新시가가 중심부를 형성하고 있다. 새로 지은 쿠차빈관은 국도 연도의 新·舊시가의 중간에 있어, 舊시가에 있는 쿠차 大모스크, 淸代의 庫車 성벽, 그 안에 있는 쿠차박물관 등에는 걸어갈 수 있다. 舊城의 남문에서 나와 쿠차大橋로부터 新시가 사이에 활기 넘치는 바자르가 2km 쯤 이어져 있다.

6월23일 오전 9시 쿠차를 출발, 쿠얼러로 떠나야 했다. 쿠차까지 와서 高仙芝 장군이 지휘했던 安西都護府의 유적지를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오전 7시, 쿠차빈관 앞에서 택시를 타고 安西都護府 治所가 있었다는 성벽을 찾아나섰다. 성벽은 호텔에서 택시로 10분 미만의 거리다. 흙으로 쌓은 성벽이 1300년의 세월을 견디며 아직도 300~400m 쯤 남아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 安西都護府 병력 3만 명이 주둔했다. 高仙芝는 이곳에서 성장하여 아버지 고사계를 뒤이어 安西軍에 입대했다. 高仙芝는 용모가 아름답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숙해 나이 20세에 유격장군이 되었다. 安西都護府의 성벽을 촬영하고 서둘러 호텔로 돌아와 답사단을 쿠얼러(庫爾勒·고이륵)로 이동시킬 대절버스에 올랐다. 쿠얼러라면 高仙芝가 일찍이 호탄에 이어 鎭守使로 재임했던 安西 4鎭의 하나였던 焉耆(언기)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黑風

여행 제8일차인 6월23일은 사막과 황무지를 헤맨 날이었다. 오전 9시 쿠차빈관을 출발하여 砂漠公路 0km 기념비가 서 있는 룬타이(輪臺·윤대)에 이르렀다. 여기서 野生 호양림을 보기 위해 타클라마칸 사막 안쪽으로 南行하다가 黑風을 만나고 말았다. 시커먼 모래바람이 버스의 정면을 후려쳐 1m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버스는 오도가도 못 하고 제자리에 서서 모래바람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렸다. 일행 중 누군가가 버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다가 질겁을 하고 문을 도로 닿았다. 그 순간 버스의 차체가 크게 흔들렸다.

갑자기 흙비가 후드득 내렸다. 마치 중국 무협영화 「新용문객잔」의 한 장면처럼 으스스했다. 타클라마칸 사막은 원래 「들어가면 살아나오지 못하는 사막」이라는 뜻이다.

금세 비가 그치고 시야가 트여 버스가 출발했다. 그러나 버스 운전사는 곧 사막의 미로에서 방향을 잃어버렸다. 그래도 불안하지는 않았다. 사막 곳곳에 석유시추 시설이 가동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너야 했던 시절의 캐러밴이 이런 경우를 당했더라면 몹시 당황했을 터이다. 우리를 실은 버스는 사막 안에서 두 시간쯤 뱅뱅 돌다가 野生 호양나무 숲 비슷한 곳을 일별하고 쿠얼러로 가는 큰길로 다시 올라왔다. 우리 일행은 격려하는 뜻에서 버스 운전사에게 박수를 쳐주었다.


바다와 같은 보스팅湖

실크로드의 요새 鐵門關(철문관) 답사를 포기하고 쿠얼러 시내에 진입한 시각은 오후 5시40분이었다. 당초엔 쿠얼러 시내의 개덕빈관에 들 예정이었지만, 숙소가 보스팅(博斯騰·박사등) 호반의 金沙灘賓館(금사탄빈관)으로 바뀌었다. 쿠얼러에서 新疆의 內몽골자치주 공산당 창립 50주년 기념행사가 벌어져 시내의 호텔 객실이 모두 징발당했다는 것이었다. 현지 가이드는 『공산당이 방을 빼라 하면 우리로선 어쩔 수 없다』고 국제기준으론 해명이 될 수 없는 해명을 했다. 화가 좀 났지만 역시 『그러려니…』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쿠얼러 시내에서 보스팅湖까지 지도상으로는 불과 13km. 그러나 도로보수공사 때문에 길을 멀리 둘러가야 했기 때문에 무려 4시간이 소요된다고 했다.

밤 12시30분경에야 新疆의 몽골자치주에 소재한 보스팅湖畔 金沙灘빈관에 도착했다. 버스로 5시간 걸린다던 260km의 길을 돌고돌아 15시간이 소요된 것이다. 「금사탄」이라면 水滸志에 등장하는 108두령의 산채 梁山泊(양산박)의 소재지와 같은 이름이다. 「금사탄빈관」이란 간판을 보니 길손에게 몽한약을 타 먹이고 금품을 빼앗던 朱貴의 금사판 호수변 酒店이 얼핏 생각났다. 독한 배갈을 곁들인 늦은 저녁밥을 먹고 나니 몽한약에 취한 것처럼 곧장 곯아 떨어졌다.

6월24일 오전 7시, 아직도 객실의 침대에 누워 있는데, 누군가가 「똑 똑 똑」 세 번 노크를 했다. 일어나 객실 문을 열고 보니 열 살 가량의 소녀였다. 이 까무잡잡한 얼굴의 소녀가 객실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모닝콜을 해주는 셈이었다. 이색적 모닝콜을 받으니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객실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객실 바로 앞에 이렇게 엄청나게 큰 호수가 버티고 있었는지 어제 밤에는 미처 몰랐었다. 호수변 모래밭에는 파도가 계속 밀려오고 있었다. 『이건 호수가 아니라 바다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수평선 너머가 보이지 않았다. 둘레가 1000km에 달하는 新疆 최대의 담수호인 것이다. 그동안 사막에서 뒤집어쓴 마음속의 모래까지 모조리 떨쳐버린 듯했다. 보스팅湖에서 잡은 민물고기들로 장만한 요리도 그럴듯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버스로 380km를 달려 「불타는 大地」로 이름난 투르판(吐魯番·토로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투르판의 여름철 온도는 섭씨 40도를 넘는다. 1년 강수량은 40mm에 불과하다고 한다.


불타는 대지―투르판

오전 9시에 출발한 우리 일행은 버스 편으로 험준한 천산산맥의 협곡 2개를 통과하는 銀山路로 넘고 넘어 오후 4시경에 점심을 먹기 위해 아이스케키로 유명한 고장 토크선(托克遜·탁극손)에 들렀다. 미지근한 생수에 질린 끝에 맛보는 아이스케키를 한 입 베어 무니 오장육부가 시원했다. 우선 수박과 하미菓로 허기를 달랬다. 오후 5시경에야 허름한 현지인 식당의 노천 식탁에 둘러 앉아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볶음국수 한 사발씩이었지만 그래도 맛있었다. 銀山路는 唐代에 병력과 군량을 수송하는 군사도로로 개설되었다고 한다. 투르판에 진입하기 전인 오후 6시경 交河故城(교하고성)에 들렀다.

交河故城은 야르호트(야르는 위구르語에서 낭떠러지를 뜻함)라 불리는데, 높이 30m 정도의 절벽 위에 건설된 도시의 유적이다. 남북으로 가늘고 길게 이어진 船形의 성곽이다. 漢唐시대에는 풍부한 수량의 江이 이 城을 휘감으며 흘러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강바닥까지 바짝 말라 있다. 「史書」에는 이곳에 우거진 숲이 있다는데, 이제는 황량한 모래땅뿐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곳에는 前漢시대로부터 5세기 중엽까지 車師前國의 수도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나라는 동쪽의 高昌故城을 중심으로 한 沮渠氏 高昌國(저거씨 고창국)에 의해 멸망되어 투르판 분지는 그 후 8세기까지 중국 內地 및 河西지역으로부터 유입된 세력이 지배하게 되었다. 交河故城 서방에 펼쳐진 야르호트 古墳群(고분군)은 이 시기에 조성된 것이다.

城의 구조는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는 만큼 성벽이 없지만, 남단과 동쪽 그리고 서쪽에 성문을 설치했다. 성내의 遺溝(유구)는 寺院區·居住區·官署區로 나눠져 있다. 이곳은 당이 중앙아시아 정복 당시에 交河城에 설치하고 있었던 安西都護府의 遺溝로 인정된다.

투르판 시내 민속빈관에다 짐을 풀고 바로 곁에 있는 카레즈를 보러 갔다. 카레즈는 투르판 주민에게 식수와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地下水路이다. 만년설로 뒤덮인 천산산맥과 투르판 사이에 수없이 많은 우물을 파고 연결하여 天山의 눈 녹은 물을 흐르게 하는 것이다. 카레즈는 물의 증발을 방지하기 위해 대개 지표 밑 30m에 건설되어 있다. 투르판 분지에 거미줄처럼 연결된 카레즈의 총길이는 5000km에 달한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투르판의 카레즈를 萬里長城·京杭(경항)大運河와 더불어 중국의 3대 不可思議라고 자랑한다.

투르판은 新疆위구르자치구 東部 천산 남록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이다. 포도와 綿布의 산지로서 예로부터 중국에 그 이름이 알려졌다. 天山 남북 및 중앙아시아에서 河西走廊(하서주랑)으로 통하는 길목으로서 북방 유목세력과 중국 사이에 쟁탈의 요지였다.

바다보다 낮은 이 땅은 漢代엔 車師人의 거점이었다. 그들은 본래 天山 북방 유목민이었는데, 그 일부가 투르판 분지로 남하, 半農半牧(반농반목)의 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몽골 초원에서 흉노가 발흥하면 그 지배를 받게 되는데, 이에 漢은 軍을 파견하여 흉노와 싸우는 한편 투르판 동방의 高昌壘(고창루: 카라호자 인근)에 주둔군을 두었다. 5세기 중엽, 차사국은 고창성에 웅거한 沮渠氏 고창국에 멸망당해 투르판 분지는 정치적으로 통일되었다.

6세기 초에는 麴氏(국씨) 고창국이 성립되어 640년 唐에 멸망당할 때까지 이 땅을 통치했다. 唐은 이곳을 內地와 같이 직할지배지로 통치했지만, 8세기 말에는 이 땅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 후 9세기 중엽, 위구르의 西遷을 시초로 타림 분지의 투르크化가 본격화한다. 이때 투르판 분지는 西위구르 왕국의 영지가 되고, 고창성은 冬都가 되었다. 13세기 초두, 몽골제국이 발흥하면 西위구르 왕은 투항한 뒤 몽골의 公主와 결혼하여 몽골제국內에서 칭기즈 일족에 準하는 지위를 얻어 활약했다.


火焰山의 孫悟空, 아스타나의 미라

6월25일 오전, 투르판 동쪽 20km에 위치한 火焰山(화염산)을 보러 갔다. 산의 모습이 타오르는 불꽃 모양과 같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화염산은 海水面보다 낮은 지대의 분지에 솟은 풀 한 포기 없는 붉은 산이다. 해발 800m 안팎의 봉우리가 우글쭈글한 마른 오징어 다리 같은 모습으로 수십km 이어져 있다. 지표온도는 섭씨 80도를 넘는다고 한다.

화염산은 중국의 4大奇書 중 하나인 西遊記에도 등장할 만큼 이름난 산이다. 西遊記는 玄奬 법사가 불경을 구하기 위해 印度로 여행하면서 겪은 고초와 모험을 픽션화한 것이다. 소설에서 현장법사와 孫悟空(손오공)·저팔개·사오정 일행은 이곳 화염산에 이르렀지만, 화염산에서 내뿜는 불길로 800리 협곡이 활활 타올라 도저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이런 위기에서 손오공이 우마왕이란 괴물을 제압하여 芭蕉扇(파초선)이란 부채를 탈취하여 화염산의 불길을 끈다는 스토리로 전개되는 얘기이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玄奬은 長安을 떠난 지 반 년 만에 이곳 화염산에 도착했고, 그때 이 지역은 高昌國이 지배하고 있었다. 고창국왕의 간청에 따라 玄奬은 고창국의 王城에 1개월간 머물며 불법을 가르쳤다.

高昌國의 王城址(왕성지)가 高昌故城이다. 투르판의 남동쪽 약 40km에 위치한 고창고성은 투르판 분지 최대의 도시 유적이다. 약 5k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城의 내부에 王城·景敎사원·마니교사원·불교사원址 등 다양한 유적이 남아 있다.

이곳은 高昌國, 唐의 西州도독부, 西위구르 왕국의 중심부로서 장기간에 걸쳐 번영했다. 故城에서는 불교문헌 및 여러 종류의 공문서 이외에 비단·麻·종이에 묘사된 회화 혹은 벽화·조각류 등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故城에는 중앙 북쪽에 「可汗의 궁전」이라는 유적이 있고, 많은 사원 터도 널려 있다. 불교 사원 터는 4각 基壇 위에 스투파(塔)를 중심으로 하여 4방에 25基의 작은 탑들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창고성의 북방 4km에는 아스타나(阿斯塔那·아사탑나) 古墳群이 있는데, 이곳에서도 다양한 문물이 출토되고 있다.

무덤 내부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나는 다섯 구의 미라를 보았다. 갈색의 피부와 뼈, 모발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생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위구르語 「아스타나」는 「永眠(영면)과 휴식」을 뜻한다고 한다.

그런데도 미라는 나와 같은 「침입자」 때문에 영면과 휴식을 방해받고 있는 것 아닌가. 미라의 주인공들도 생전에 그들의 死體가 後世사람의 구경거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을 터이다. 관람자들은 미라에 대한 죄송한 마음 때문인지 무덤 안 곳곳에 소액 지폐를 놓고 나갔다. 그게 死者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문득, 미라로 보존되고 있는 레닌·毛澤東·金日成 등의 시신은 장차 어찌 될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이어 우리 답사단 일행은 葡萄溪谷(포도계곡)을 찾아갔다. 진입로 양측에 높은 가설된 포도시렁이 공중에서 만나 터널을 이루고 있다. 주변에는 포도농장이 즐비하다. 포도가 익을 철은 아니어서 포도알은 아직 콩알만 했다. 한 농장에 들렀더니 하미과, 「남」이라고 불리는 위구르族의 빵, 건포도 등을 대접했다. 「암말 젖꼭지 乾포도」는 소문에 값할 만큼 맛이 좋았다. 그러나 중국의 赤포도주는 아직도 세계 수준과는 차이가 크다.


세계 최대의 불교미술관―敦煌 莫高窟

6월25일 오후 9시47분, 투르판驛에서 甘肅省(감숙성)의 敦煌(돈황)으로 가는 야간열차를 탔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新局量, 즉 西域의 마지막 밤을 지내게 된 것이다. 4인1실의 침대칸에서 길동무들과 컵라면 파티를 벌인 다음에 잠들었는데, 다음날(6월26일) 오전 5시30분에 눈을 떴다. 커튼을 열어젖히니 기차는 모래땅 위를 여태 달리고 있었다. 거무튀튀한 모래땅 이외엔 볼썽사나운 전봇대의 행렬뿐이었다. 모래바람으로부터 철로를 보호하기 위한 나지막한 흙담이 간간이 보이기는 했다.

오전 8시 무렵 기차는 柳園驛(유원역)에 도착했다. 2년 여 전에 유원역은 돈황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유원에서 돈황까지는 버스로 2시간이나 달려야 하는 제법 먼 거리이다. 역전 음식점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비가 옷을 흠뻑 적실 만큼 제법 세차게 내렸다. 버스를 타고 돈황시내를 향해 달렸다. 현지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이날 돈황에 내린 비는 年中 강우량의 75%에 달하는 30mm였다고 한다.

돈황빈관에다 짐을 푼 후 우리들은 버스 편으로 鳴沙山(명사산)으로 갔다. 이곳의 모래는 유별나게 입자가 곱다. 고운 모래가 바람에 날려 줄줄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마치 산의 울음같이 들린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명사산 아래엔 초승달 모양의 月牙泉(월아천)이 있다. 사막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지난 3000년 동안 마른 적도 없고 모래에 파묻힌 적도 없다는 조그마한 호수이다.

돈황은 河西지방 최서단에 있는 실크로드의 요충이다. 원래 大月氏(대월지)와 匈奴의 교역거점이었는데, 漢의 軍 주둔지가 설치되었다. 玉門關과 陽關을 지나 만나는 첫 오아시스로서 캐러밴(隊商)이 짐을 내리고 피로를 푸는 곳으로 번영했다.

그러나 오늘날 돈황이 세계적 명성을 누리게 된 이유는 동남부에 소재한 大석굴사원 유적인 莫高窟(막고굴)의 존재 때문이다. 막고굴의 창건은 4세기 중엽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그 이후 1000년에 걸쳐 조영이 계속되어 대승불교 예술의 집대성이라고 해야 할 많은 벽화·건축·불상·飛天像이 지금도 다수 보존되어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南北으로 약 2km에 걸쳐 석굴의 수가 492개, 불상이 3000여개나 된다. 세계 최대의 불교미술관인 셈이다.

돈황 막고굴은 20세기에 들어와 역사에 화려하게 컴백했다. 제17굴 藏經洞(장경동)에서 대량의 문서·두루마리 그림·장엄구 등이 마치 타임캡슐로서 보존되었듯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귀중한 자료들을 영국의 슈타인, 프랑스의 펠리오, 일본의 오다니(大谷) 탐험대, 러시아의 오르딘브르그 등이 제각기 절취하여 자기 나라로 가져갔다.


호탄의 玉이 들어오는 통로―玉門關

藏經洞에서 발견된 수많은 문서들은 세계의 역사학계에 敦煌붐을 일으켰다. 이로써 敦煌學(돈황학)이라는 학문이 탄생했다. 오늘날 세계의 유명 박물관 혹은 전시회에서 잘 보존된 돈황의 명품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제국주의적 약탈」의 결과라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다.

현재, 우리나라 중앙박물관에도 일제시대 오다니 탐험대가 돈황 막고굴에서 도려내어 훔쳐온 벽화 등 수천 점이 보관되어 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면서 본국으로 미처 반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6월26일 오전, 돈황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250리 길을 달려 玉門關으로 갔다. 감숙성의 서쪽 끝인 玉門關을 나서면 바로 新疆의 땅이다. 玉門關은 그 섹스어필한 명칭에 의해 인구에 널리 회자되어 온 명소이다. 중국인이 유별나게 선호했던 호탄의 玉이 들어오는 관문이어서 이렇게 불렸다고 한다.

玉門關의 설치는 前漢代의 일이었다. 흉노의 토벌과 西域의 제압을 위한 漢武帝의 원정군 파견에 의해 河西지방의 오아시스에는 점차 군사거점이 구축되었고, 이어 중국 본토 이민의 손으로 개척되어 드디어 武威·張掖(장액)·酒泉·敦煌의 4郡과 그것에 부속되는 여러 縣으로 발전했다.

이 郡들은 長城과 봉화대 등의 경비시스템에 의해 긴밀히 연결되어 멀리 서역으로 왕래하는 使者 및 상인을 보호하는 한편으로 원정군을 위한 병참거점이었는데, 그러한 長城線의 서쪽 끝에 위치한 것이 玉門關이었다. 漢代 玉門關의 위치는 출토된 木簡 文面의 해석에 의해 여러 說이 있지만, 어떻든 玉門關의 서쪽에도 몇 개의 봉화대가 연이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陽關은 漢代에 玉門關과 짝하여 돈황의 서쪽에 설치된 關所이다. 처음에는 돈황의 서방 약 100km에 있는 玉門關이 국경의 관문으로 유명했지만, 돈황이 大宛(대완) 원정의 기지로서 발전, 郡이 설치되면 陽關도 설치된다. 陽關은 玉門關 남쪽 약 60km 지점에 있다. 敦煌·陽關·玉門關은 거의 삼각형의 정점을 점하고 있다.


西域에 다시 가고 싶은 이유

이날 밤 늦게 우리 일행은 돈황공항에서 중국 민항기 편으로 北京으로 이동했고, 다음날 6월28일 北京을 출발, 귀국했다. 12박13일간의 빠듯한 일정으로 광활한 타클라마칸 사막 주위를 돈 탓인지 한동안 뇌리에 남은 것은 바람과 모래였다. 오아시스라면 「야자수가 우거진 낙원」일 것이라는 짐작은 어림없는 몽상이었다.

西域의 오아시스에는 야자수가 없었다. 물도 부족하고 砂防시설도 빈약했다. 여러 호텔 정원에서 발견한 야자수는 진짜가 아니라 모두 가짜였다. 그곳은 불모의 땅이 아니면 불타는 大地이다.

그렇다고 실망했던 것은 아니다. 기회만 있으면 다시 가고 싶다. 그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西域은 풍부한 歷史의 지역이다. 그곳은 東西교류의 메인 루트인 동시에 중국의 농경민족과 북방의 유목민족이 지배권을 놓고 격렬하게 충돌했던 현장이다.

그런 특이한 자연풍광은 일찍이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위구르族을 비롯한 소수민족의 삶과 문화에도 다가갈 수도 있었다. 엄혹한 환경과 漢族의 移住 러시 속에서도 그들은 민족적 아이덴티티(正體性)를 굳세게 지키고 있었다. 이런 이유들로 西域은 매력적인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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