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인터뷰] 9·9 시국선언의 座長 姜英勳 前 국무총리

『우리의 非常 시국선언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글 정순태 기자  2004-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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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9일 발표된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시국선언문」의 서명자 난의 맨 앞에 「姜英勳(강영훈·82)…」 등 역대 총리 일곱 분의 명단이 나열돼 있었다. 신문에 보도된 명단 첫머리에서 「강영훈」이라는 이름 석 자를 확인한 독자들 중에는 『그러면 그렇지』라며 고개를 끄덕거린 분들이 적지 않았다. 꼿꼿하고 맑은 삶으로 그는 역대 국무총리들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분 가운데 하나로 손꼽혀 왔다. 지난 9월11일 오후 5시,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경기대학교 부근의 좁은 비탈길 골목에 위치한 姜英勳 前 총리의 자택으로 찾아갔다.

─선생님의 이름이 (9·9 시국선언문 서명자의) 맨 앞에 나왔습니다.

『가나다 順으로 적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요』

─그날 선언식에 참가한 분들이 선생님의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고 위기의 時局에 대한 주장하는 바가 명백하다고 평가하더군요.

『선언문에서 밝힌 취지를 깊이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위기의 시국에 대해 한마디 해 달라」고 해서 저의 所懷(소회)를 잠시 피력했을 뿐입니다』

─왜 위기입니까.

『지금 우리 사회가 위험에 빠진 것을 단순한 진보와 보수의 싸움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진보」를 자처하는 親北·反美·좌익 세력들이 대한민국을 끊임없이 훼손하고 있어요.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망하겠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국민들에게 대한민국의 진실을 알려야 하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우리 기성세대가 앞에 나선 것입니다.

지금은 보수니 진보니 하는 한가한 논쟁이나 벌일 때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가 보수든 진보든 우리의 非常 時局선언에 귀를 기울여 주었으면 합니다』

─盧武鉉 대통령을 만난다면 어떤 말씀을 하시고 싶습니까.

『盧대통령에게 「진보」를 自處하는 것보다 社會黨을 만드는 것이 차라리 좋겠다고 건의하고 싶어요. 지금, 민중노선을 걸으면서 포퓰리즘 정치를 하고 있잖아요. 江南사람, 서울大, 朝·中·東을 敵으로 돌리면서 선동정치를 하면 나라가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盧정권은 미래를 향한 집권 프로그램이 없기 때문에 정권유지의 편법으로서 수도 이전, 과거사 규명, 국가보안법 폐지 등으로 평지풍파를 계속 일으키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결국 심각한 사회적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盧대통령과 대통령을 보좌하는 386 운동권 세대가 일찍이 나라 잘되는 일을 해본 적이 있었습니까. 아직도 사회주의를 외치는 곳은 북한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現 정권은 金正日이와 가까이 하려는 대신에 미국과는 자꾸 멀어지고 있습니다』


『韓美동맹 깨지면 우린 주변국에 짓밟힌다』

─미국의 페리 前 국방장관은 「韓美 양국 정부는 북한의 위협에 대한 인식을 共有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공동의 정책을 만들기 어렵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러다간 韓美동맹이 깨지는 것 아닙니까.

『미국은 한국이 자유민주국가이기 때문에 우방이고 동맹관계였으며, 韓美 양국은 최악의 독재정치가 강행되고 있는 북한지역을 민주화시키겠다는 공통의 목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체계를 무시하면서까지 民族共助(민족공조) 운운하는 북한을 비호·대변하면 韓美동맹은 할 수 없는 것이고, 함께 노력할 목표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제 미국이 韓美동맹관계를 再조정하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전통적인 對北·통일정책이 金大中-盧武鉉 정권에 와서 갈수록 변질되고 있지 않습니까.

『미국은 동맹국으로서 대한민국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나머지 해외주둔 미군기지 再조정 계획(GPR)의 확대적용을 통해 駐韓美軍의 규모를 대폭 감축할 뿐만 아니라 기능과 임무를 바꾸려고 합니다.

이제 미국은 미국과 이념·이익을 함께 하는 나라에 「戰力投射중심기지(PPH·Power Projetion Hub)」를 만듭니다. 東아시아의 PPH는 일본에 설치됩니다. 이제까지 미국 4星 장군이 주둔한 곳은 나토 이외엔 한국뿐이었습니다. 앞으로 미국은 일본에 4星 장군의 사령부와 1개 군단을 배치합니다. 그만큼 주한미군의 位相이 格下되는 겁니다. 한국에는 한 단계 아래의 「주요작전기지(MOB·Main Operation Base)」가 설치될 예정입니다』

─MOB가 평택·오산 지구로 설치될 예정이라지만, 북한의 주장대로 親北·反美·左派 세력은 지역주민들을 상대로 「미군기지 이전 반대」를 관철하기 위한 대규모 시위를 선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지이전用 토지를 확보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할 우려가 있습니다. 땅이 있네 없네 하고 시비가 벌어지게 되면 미국은 한국에 MOB보다 한 단계 아래의 「전진작전지휘소(Forward Operating Site)」, 그것도 어렵다면 두 단계 아래인 「협동안전지역(Cooperative Security Location)」 정도로 낮춰 설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과 동맹을 안 하겠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盧武鉉 대통령은 「우리가 바짓가랑이를 붙든다고 해서 나가려고 했던 美軍이 안 나가는 것이 아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미국은 이미 기준(GRP)을 정해 놓고 한국에 대해 어디에 맞출 것이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순전히 우리의 선택입니다. 최근 韓美 간의 철군 협상을 보면 미국은 그렇게 집착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땅 없으면 그만두라는 식입니다』

─일본은 韓美동맹이 이미 훼손된 것으로 보고 美日동맹을 보강하기 위한 방안을 적극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은 미군기지 再조정 계획에 大환영입니다. 미국의 힘이 投射되는 중추적인 허브(Hub)가 되면 그만큼 일본의 안보가 단단해지고 돈(국방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입니다』

─韓美동맹은 한국의 안보를 보장하여 우리의 경제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해 왔습니다. 그런데도 盧武鉉 대통령은 시도 때도 없이 自主국방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일본이나 영국이 우리나라보다 힘과 돈이 없어서 미국과 동맹을 합니까. 韓美동맹이 훼손되면 한국의 국제적 지위는 낮아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예컨대 중국의 公安이 한국의 외교관을 구타하고, 중국 정부가 「東北工程」이라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渤海(발해)뿐만 아니라 高句麗(고구려)까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중국은 韓美동맹이 굳건했던 한국에 대해서는 정중하게 대접했습니다. 한국을 위협하면 미국을 자극하게 되는 거니까요. 미국은 중국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시장이니까요. 그러나 미국과 멀어진 한국은 주변국에게 짓밟힐 수 있는 존재로 전락해 버립니다. 그런데 집권당 소속 의원의 3분의 2가 미국보다 중국이 중요하다고 했다는데, 우리에게 중국은 미국의 代案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生徒들의 5·16 지지 시가행진 반대한 陸士 교장

姜英勳 前 총리는 1922년 평북 창성의 압록강변 마을의 중농가정에서 태어났다. 집에서 120리 떨어진 영변농업학교 4학년까지 다니다가 대학진학을 위해 일본 히로시마 소재 다카다(高田)中學에 전학하여 졸업한 뒤 滿洲(만주) 長春(장춘) 소재 建國大學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3학년 때 學兵으로 차출되어 일본의 동북지방인 센다이(仙臺)에서 甲種간부후보생 교육을 받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少尉로 임관된 것은 일본의 敗戰 닷새 후인 8월20일이었다고 한다.

『아키다(秋田)에 있는 일본군 聯隊(연대)에 배속되었습니다. 그곳에 朝鮮 출신 병사가 600명 있었는데, 저는 그 가운데 200명의 귀국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해 일본에 큰비가 내려 철로가 끊기는 바람에 온갖 고생을 하며 복구를 기다리다가 그해 12월 들어서야 부하 200명을 인솔하여 부산항을 통해 귀국했습니다』

그는 고향 창성으로 올라가 지역의 自生的 치안조직인 보안대의 보안과장으로 일했다. 1946년 들어 북한에서는 소련군의 행패, 좌익들의 발호, 신탁통치문제 등으로 들끓었다.

『좌익들이 처음엔 反託(반탁)을 하라고 하더니 소련의 지령을 받고 하루아침에 贊託(찬탁)으로 돌아서라고 해요. 이에 반발하던 내 친구들을 출신성분이 나쁘다며 구속하려고 합디다. 이건 안 되겠다 싶어 친구 다섯 명과 함께 창성-영변-평양-원산-속초까지 내려와 속초에서 배를 타고 38선을 넘어 주문진에 도착,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군사영어학교(軍英)에는 어떻게 입교하셨습니까.

『그때 저의 수중에는 단돈 5원밖에 없었어요. 糊口之策(호구지책)으로 어디든 취직을 하려고 했는데, 우연히 만난 대학 선배가 建軍사업 중인 李應俊(이응준) 장군을 안다면서 소개장을 써주는 겁니다. 軍 간부 양성기관인 軍英에 들어가면 나라 세우는 일에 나름의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 데다 당장의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李장군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응모기간이 지나 우여곡절을 거친 뒤에야 겨우 軍英에 입교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그는 중대장, 대대장, 陸本 인사국장, 駐美 한국대사관 附 무관, 국방부 차관, 제2사단장, 제6군단장 등의 보직을 거쳐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맡고 있다가 1961년 5·16 군사혁명을 만나 군복을 벗게 된다.

『육사 생도들에게 5·16 군사 쿠데타를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벌이라는 겁니다. 후배를 정치도구로 써서는 안 된다고 거절했어요. 그랬더니 연행하여 마포형무소에 10일간 집어넣은 다음 헌병대 지하실 영창에 4개월간 가둬놓습디다』


『역사 평가는 그렇게 단순한 것 아니다』

출옥 후 육군중장으로 예편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10년간 석사·박사 과정을 밟아 1972년 51세의 나이로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한국외국어大 대학원장(1977년), 외교안보연구원장(1978~1980년), 영국대사, 로마교황청 대사 등을 역임했다. 盧泰愚 정부 때는 국무총리가 되었으며(1988~1990년),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6년간(1991~1997년) 맡아 남북교류에도 힘썼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그는 다음과 같은 우리 사회의 淸職(청직)을 맡아 봉사해 왔다.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육당 최남선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現), 올림픽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 100년 계획 천진암 대성당 건립위원회 위원장, 「세계를 깨끗이, 한국을 깨끗이」 운동 조직위원회 위원장, 韓英협회 회장, EXPO지부 중앙협의회 회장, 유엔환경계획(UNEP) 한국위원회 총재(現), 대한에이즈협회 초대 회장, 한국골수협회 초대 회장, 한국봉사단체협의회 회장, 철기 이범석 장군 기념사업회 회장(現), 석오 이동녕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육사발전기금 초대 이사장, 仁村賞 운영위원장….

인터뷰를 마치면서 『朴正熙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물었다.

『저는 朴正熙 장군의 5·16 쿠데타는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朴正熙 대통령의 산업화·근대화 혁명은 높이 평가합니다. 朴正熙 리더십에 의해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가는 물적 토대를 이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의 좋은 점은 龜鑑(귀감)으로 삼고, 나쁜 점은 점진적으로 개선해 나가야죠. 과거 정부의 것은 모두 나쁘다고 때려부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난도질할 만큼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2시간30분에 걸친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78세의 부인 金孝洙(김효수) 여사가 조용한 모습으로 자리를 함께 했다. 내외분 모두 건강했다. 슬하의 2남1녀는 모두 출가하여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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