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인터뷰]「9·9 時局선언문」기초한 李東馥씨

『대한민국 지키기 위한 萬民共同會를 개최한다』

글 정순태 기자  2004-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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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발표한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시국선언문」은 『現 시국의 위기를 제대로 진단한 글』이라고 평가되었다. 9월11일까지 선언에 동참한 사회의 원로는 1119명에 달했다. 선언문 기초자는 「북한민주화포럼」 상임대표 李東馥(이동복)씨다. 지난 9월11일 그와 아침을 함께하며 인터뷰했다.

─원로들의 시국선언문이 나오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지난 6월 하순부터 安應模(안응모) 前 내무부 장관·柳基南(유기남) 참전단체연합회장·李鍾九(이종구) 前 국방장관 등 몇몇 분들이 모여 시국을 걱정하다가 모임의 폭을 넓혀 대책을 협의해 보기로 했습니다. 7월6일 모임에는 위의 세 분을 포함하여 金東吉(김동길·연세大 명예교수)·金聖恩(김성은·前 국방부 장관)·蔡命新(채명신·前 주월군사령관)·李範俊(이범준·前 교통부 장관)·吳滋福(오자복·성우회 회장)·鄭起勝(정기승·前 대법관)·朴翊柱(박익주·예비역 장군)씨 등도 참석하셨어요. 저도 7월6일 모임에 처음 갔습니다』

─7월6일 모임에서 어떤 논의가 있었습니까.

『盧武鉉 대통령이 5월27일 연세大 특강에서 이상한 말을 했는데, 우리들이 가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데 공감대가 이뤄졌어요』

─盧대통령의 발언 중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盧대통령은 「고쳐 가며 살자는 것이 진보」라면서 「합리적 보수, 따뜻한 보수, 별 놈의 보수 갖다 놔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는 것이다」라고 막말을 했습니다. 이 같은 진보·보수에 대한 대통령의 시각이야말로 전적으로 그릇된 것임은 대한민국 역사가 증명해 주지 않습니까.

1948년 건국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력은 북한에 비해서도 훨씬 뒤져 있었어요. 그나마 金日成의 남침에 의한 6·25 전쟁으로 조국은 폐허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반세기의 세월이 경과하는 동안 대한민국은 문자 그대로 지각변동의 무대였습니다. 1953년 14억 달러였던 대한민국의 GNP는 2003년에는 무려 그 432배인 6050억 달러에 이르렀고, 같은 기간 1인당 GNP는 67달러에서 188배인 1만2646달러로 늘어났습니다.

이제 한국은 세계 제1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북한으로부터의 끊임없는 안보위협 속에서 대한민국을 이렇게 바꿔놓은 것은 盧대통령의 말과는 정반대로 이 나라 보수세력과 기성세대가 이룩한 업적이었습니다. 자칭 「진보세력」은 나라 발전에 벽돌 한 장 올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서 親北·親美·좌파 세력이 득세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산업화시대를 주도하던 권위주의 정권이 단시일 내에 나라 발전을 이룩하려고 무리한 방법을 동원했잖아요. 과거 정권은 이런 사정을 설명하는 노력도 하지 않고 우격다짐으로 끌고 나가면서 반대자를 탄압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기성세대와 젊은이들 사이에 의사단절이 구조화되었고, 북한은 이 틈을 헤집고 들어와 이른바 「해방공간」을 확보하고 여기에 親北·좌파·反美 세력을 키웠습니다. 그들이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왜곡·변조하여 우리 젊은이들을 誤導(오도)해 온 것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조국의 진실을 설명하기 위해

─李선생께서 쓰신 「9·9 시국선언문」은 現 위기의 시국을 제대로 진단한 名文으로 평가받고 있습디다.

『7월6일 회의에서 저는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조국의 미래를 이끌고 갈 젊은이들의 마음을 바로잡는 일이 제일 긴요하다. 우리 기성세대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株主로서 젊은이들에게 진실을 알리는 데 無限책임을 져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모임에 참석한 여러 원로들께서 「그러면 李의원이 非常時局 선언 同參을 위한 취지문을 쓰라」고 하셔서 제가 草案의 집필을 맡은 겁니다』

─草案에 대한 원로들의 반응이 어떻습디까.

『제가 원로들의 의견을 받들어 취지문의 초안을 작성해 7월 하순 모임에서 그걸 낭독하니까 몇몇 원로들은 눈물까지 흘리면서 감동하십디다. 이 「비상시국 선언 동참을 위한 취지문」을 官界·政界·예비역장군·교육계·법조계·언론계의 원로 6000명에게 발송, 서명해 줄 것을 요청했어요. 우선, 1차로 서명한 분이 600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힘입어 8월27일 모임에서 9월9일 시국선언대회를 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대회 전까지 여러 번의 讀會(독회)를 거쳐 선언문의 文案을 확정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서명자는 1119명으로 늘어났습니다』

─9·9 시국선언문 발표 이후에는 어떻게 하실 방침입니까.

『서명운동은 앞으로도 계속 확대해 나갈 생각입니다. 한 번의 행사로 끝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현재 조직도 집행부도 없습니다. 가까운 장래에 龍山 전쟁기념관 같은 곳의 회의실을 빌려 「萬民共同會(만민공동회)」 같은 시국토론회를 개최해 볼 계획입니다.

이틀이고 사흘이고 간에 토론회를 열어 말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나와서 말하도록 할 것입니다. 이 토론회에서 앞으로 우리가 어떤 조직을 갖고 어떤 운동을 벌일지가 결정될 것입니다. 북한의 首領獨裁(수령독재)가 설 땅은 대한민국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 줄 것입니다』 ●
Copyright ⓒ 정순태의 역사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