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들 ⑩ - 大韓해협海戰

도고의 日本 연합함대,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멸시키다

글 정순태 기자  2004-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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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발틱함대와의 大海戰에서 필승을 위해 日本 연합함대는 맹훈련을 거듭하고 있었다. 1905년 5월18일, 待望(대망)의 정보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연합함대 司令長官에게 날아들었다.

『발틱함대는 5월14일 반폰灣(만)에서 닻을 올려 北上을 개시했다』

반폰灣이라면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베트남 캄란灣 바로 북쪽의 작은 港灣(항만)이다. 즉각 일본 측의 哨戒(초계)활동이 개시되었다. 발틱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할 확률이 높았지만, 반폰灣 출항 이후 한동안 행방이 묘연했다. 일본 해군 수뇌부는 초조했다.

일본 혼슈(本州)와 홋카이도(北海道) 사이의 쓰가루(津輕)해협인가, 홋카이도와 러시아 사할린 사이의 소야(宗谷)해협인가, 아니면 大韓海峽(대한해협)인가? 발틱함대의 진로는 아직 不明의 상태였다. 발틱함대가 어떤 코스를 취할 것인지는 연합함대로서는 차후 決戰에서 결정적으로 중대한 문제였다.

도고가 기대했던 것은 단지 승리가 아니라 발틱함대의 궤멸이었다. 발틱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港에 입항, 장장 6개월에 걸친 大항해에 따른 船體(함체)의 손상 등을 수리하고 전열을 가다듬기만 한다면 섬나라 일본은 하룻밤도 발을 뻗고 잠들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所在不明 발틱함대의 針路(침로)를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참모진 일각에서는 어떤 코스에도 대응할 수 있는 혼슈 서부지역의 노토(能登)반도 부근에서 대기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도고는 그러나 大韓海峽을 통과할 것으로 판단, 한반도 남단의 鎭海灣(진해만)에 主力함대를 이동시켜 놓고 있었다.

5월26일, 드디어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다. 前日인 5월25일, 러시아 함대의 수송선 6척이 上海에 입항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발틱함대가 태평양 쪽으로 크게 우회할 확률은 줄어들었다. 이제, 대한해협 說이 유력해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단언할 수 없었다.

드디어 5월27일, 오전 2시45분. 초계艦 「시나노마루(信濃丸)」가 규슈 서쪽 五島열도 西方 앞바다에서 파도 사이로 흔들리는 등불을 발견했다. 그로부터 2시간 후, 여명 속에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접근한 시나노마루는 본의 아니게 발틱함대 대열의 한가운데로 끼어들게 되었다. 드디어 시나노마루는 운명의 제1보를 날렸다.

『敵 함대, 203지점에서 발견. 시각은 오전 4시45분』

이어 제2보.

『敵 침로 동북동. 쓰시마 東水道로 향하는 것 같음』

필자는 지난 9월25일 대한해협 해전과 일본 해군의 「요람」을 답사하기 위해 인천공항發 가고시마行 KAL기에 탑승했다. 탑승 30여 분 후부터 대한해협 해전의 현장이 눈아래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부산항 상공에서 서쪽으로 눈을 돌리면, 부산新港 건설현장인 加德島(가덕도) 수역, 그리고 그 너머로 천혜의 軍港 진해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대한해협 결전을 앞두고 日本 연합함대의 主力은 진해港과 加德島 해역에 집결, 北上하는 러시아 발틱함대의 출현을 기다렸다.

여객기는 곧 쓰시마 상공을 가로질러 규슈의 후쿠오카 상공으로 접근하더니만 나가사키 하늘을 난다. 나가사키 앞바다에 떠 있는 五島 열도가 보인다. 지금 인천-가고시마 여객기는 러일전쟁 때 발틱함대의 진로 위를 逆順(역순)으로 날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뇌리에선 대한해협 해전의 「조감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日本 연합함대의 출격

연합함대의 旗艦(기함) 「미카사」에서 도고가 제2보를 受信한 시각은 오전 5시5분. 그는 全함대에 출동을 명했다.

한편 로제스트벤스키 사령장관이 이끄는 발틱함대는 2열 종대로써 北東으로 항진했다. 제1戰艦戰隊(스보로프 이하 4척)가 조금 선행했다. 그 왼쪽에 제2戰艦戰隊(오스라비아 이하 4척), 그 뒤편에 제3戰艦戰隊(니콜라이 1세 이하 4척)이 이어졌다. 기타 순양함·구축함·특무함을 포함한 합계 38척의 진용이었다.

로제스트벤스키는 전날 밤을 旗艦 「스보로프」의 함교에서 꼬박 새웠다. 오전 6시30분, 쓰시마에서 40마일 떨어진 해역에 이르렀을 때 발틱함대는 그들의 오른쪽 6마일 해상에서 연합함대의 신예 순양함 「이즈모(出雲)」를 발견했다. 몇 분 후 수평선을 덮고 있던 안개가 걷히면서 또 다른 일본 함선 3척의 모습도 드러났다. 일본 함선들은 6마일의 거리를 유지했기 때문에 교전에 이르지는 않았다.

도고 사령장관이 이끈 연합함대의 주력이 발틱함대를 발견했던 것은 오후 1시39분이었다. 발틱함대는 연합함대의 旗艦 「미카사」의 西南 약 7해리(약 13km)를 北東으로 항진하고 있었다.

도고는 러시아 함대 左翼列의 선두부터 격파하려고 제1·제2戰隊를 北西微北으로 變針(변침)시켜 속력을 15노트로 높였다.

오후 1시55분, 「미카사」의 마스트에 신호기가 올랐다. 위가 黃, 아래가 赤, 좌우가 黑과 靑의 Z旗였다.

『皇國의 興廢(흥폐), 이 一戰에 있다. 各員 일층 奮勵(분려) 노력하라』

두 함대의 거리는 좁혀졌다. 「미카사」의 砲術長(포술장·소좌)이 외쳤다.

『이제 8500m입니다만…』

도고는 침묵했다. 포술장이 다시 부르짖었다.

『거리 8000m. 어느 쪽에서 전투하겠습니까』

그 순간, 도고의 오른손이 왼쪽으로 半圓을 그렸다. 가토 토모사부로 참모장(少將)의 금속성 음성이 터져 나왔다.

『함장, 取舵一杯(취타일배: 토리카지 잇빠이)!』

일본어 取舵一杯는 가능한 한 빨리 艦首(함수)를 左의 극한까지 急轉(급전)시키라는 것이다. 함장(대좌)은 놀랐다.

『어! 取舵하라는 겁니까?』

지금 막 포격을 시작할 참인데, 敵 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함대의 진행방향을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대담하다기보다는 위험한 행동이었다. 함장은 자기가 잘못 들은 것 아닌가 해서 되물은 것이었다.

『그렇다, 取舵!』

참모장은 단정적으로 답했다.

기함 「미카사」는 맹렬한 기세로 뱃머리를 左로 돌렸다. 동쪽으로 急轉(급전)을 개시한 것이다. 이것이 그 후 유명해진 敵前大回頭(적전대회두), 소위 T字전법의 돌입 순간이었다.


敵前의 T字 戰法

T자형으로 敵을 가로막으면 전투에 매우 유리하다. T자의 수평 부분(─)처럼 전개하면 T자의 수직 부분처럼 縱隊(종대)를 이루면서 다가오는 적함들에 대해 全화력을 동원하여 포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T자의 수직 부분을 이루고 있는 함대는 매우 불리하다. 왜냐하면 맨 앞쪽에 있는 함선만이 포격할 수 있고, 다른 함선들은 함포를 제대로 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敵前에서 T자형의 대형을 취한다는 것은 공격자로서 매우 위험한 전술이다. 함선이 大回頭를 진행하는 경우 그 半圓(반원)으로부터 탈출하는 사이의 수분간은 不動의 停滯点(정체점)을 만들어 낸다. 이 순간 적에게 공격당한다면 함대는 궤멸할 수밖에 없다. 적함에 대한 應射(응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발틱함대로서는 천재일우의 호기였다. 연합함대의 主力 제1·제2戰隊 15척이 回頭에 들어간 것은 오후 2시5분. 全함선이 回頭를 끝내고 발틱함대의 정면에 橫隊(횡대)를 이룬 것은 오후 2시20분이었다.

일본의 함대가 갑자기 정면에서 옆구리를 보이자 로제스트벤스키 中將은 즉각 (오후 2시8분) 휘하의 함대에 일제 포격을 명했다. 포격은 선두의 기함 「미카사」에 집중되었다. 타이밍은 완벽했다. 하지만 훈련 부족으로 명중탄에 의한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 발틱함대는 이 10여 분간의 好機를 뻔히 보면서도 놓치고 말았다.

한편 도고의 제1戰隊와 제2戰隊는 적함의 포격 중 回頭를 계속했다. 오후 2시10분, 回頭를 끝냄과 동시에 「미카사」의 砲들이 발틱함대의 기함 「스보로프」를 향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거리 6400m. 回頭를 끝낸 「시키시마(敷島)」, 「후지(富士)」, 「아사히(朝日)」, 「하루카(春日)」, 「나치신(日進)」 등 연합함대의 전함들도 잇달아 포격에 가세했다. 「이즈모(出雲)」 이하 순양함대도 포격을 개시했다.

일본 함대의 포격은 처음엔 조준이 정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5분쯤 지나자 연합함대의 포병들은 T자형 隊形의 利點(이점)을 최대한 이용, 집중포격을 가했다. 러시아 제1전함대의 「스보로프」와 제2전함대의 「오스라비아」에 잇달아 일본군의 포탄이 명중했다. 러시아 함대에서는 혼란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쌍방의 거리는 5000m로 좁혀졌다. 「오스라비아」가 검은 연기를 뿜기 시작했고, 로제스트벤스키 中將이 탄 「스보로프」에서도 화재가 일어났다. 이때 「스보로프」의 艦上(함상) 구조물은 전부 붕괴하고, 갑판도 무너졌다. 이어 「알렉산드르 3세」와 「보로디노」도 黑煙(흑연)을 뿜기 시작했다.




시모세 火藥과 이쥬인 信管의 위력

기함 「스보로프」를 참담한 모습으로 몰아넣은 일본 함대의 포격은 射手의 숙련도에 힘입은 것만은 아니었다. 러일전쟁에서 처음 實戰 사용된 일본의 포탄에는 「시모세 火藥」과 「이쥬인(伊集院) 信管」이 장치되어 있었다.

1887년 당시 프랑스에 주재하고 있던 도미오카(富岡定恭) 소좌는 프랑스가 실용화에 성공한 新폭약의 試藥(시약)을 비밀리에 입수, 귀국했다. 일본의 해군 병기제조소에서 분석한 바, 원료는 피크르酸(산)으로 판명되었다. 이에 同 제조소의 시모세 技手가 프랑스 新폭약을 모델로 개발에 착수, 폭약제조에 성공했다. 그리고 「시모세 火藥」이란 이름의 制式폭약으로 채용되어 1903년 양산태세가 완성되었다.

이 강력한 新폭약의 효과를 더욱 높인 것이 「伊集院 신관」이었다. 伊集院五郞(이쥬인 고로) 해군 소좌가 고안, 1900년에 완성한 이 彈底着(탄저착) 신관은 예민하게 작동했다. 포탄이 함정에 직접 명중하지 않고 부근 海面에 떨어져도 폭발, 함상의 병사들을 폭풍으로 날려버릴 정도로 폭발력이 강렬했다.

일본의 각 함선도 상당한 명중탄을 맞았다. 특히 제2戰隊의 「아사마(淺間)」는 舵機(타기)가 파괴되어 전열에서 이탈, 응급수리를 받아야 했다. 집중포화를 받았던 「미카사」도 첫날 전투에서 좌우 兩舷(양현) 50개소에 적탄을 맞았다. 그러나 러시아 주력艦들처럼 大화재를 일으킨 함선은 1척도 없었다.

러일 海上결전은 전투개시 30분 만에 실질적으로 승패를 갈랐다. 발틱함대의 주력함은 거의 모두 화재를 당했다. 기함 「스보로프」는 舵(타: 키)를 조작하는 스팀 파이프에 포탄이 명중했기 때문에 조타가 불가능해져 전열을 이탈했다.

더욱이 함장 이그나티우스 大佐에 이어 로제스트벤스키 中將도 사령탑에 명중한 포탄의 파편에 머리와 등을 다쳤고, 왼발 복사뼈의 신경이 절단되어 인사불성이 되었다. 기함과 함께 사령부도 궤멸상태에 빠졌다.


발틱함대의 궤멸

그렇다면 러시아 측에서는 패전의 이유를 어떻게 분석했을까. 다음은 舊소련의 소비에트 과학아카데미 地政學센터 소장을 재임했던 콘스탄틴 플레샤코프(현재 미국 마운트 홀리오크 대학 국제관계학 교수)의 저서 「차르의 마지막 함대」의 인용이다.

<도고가 승전한 주된 이유, 어쩌면 유일한 이유는 일본의 우세한 함포에 있었다. 일본의 함포는 그 폭발력과 발사의 빈도, 발사량에서 러시아군을 압도했던 것이다. 물론 발사된 일본군의 포탄이 모두 표적에 명중되었다는 러시아 수병들의 보고는 과장이었다. 도고의 해군이 발사한 포탄의 실제 명중률은 아마 10% 이하였을 것이다.(중략)

일본군의 포탄은 강력했던 반면에 러시아군의 포탄은 불발탄이 많았다. 폭발력이 러시아군 포탄의 4배 가량 되었다. 일본군의 포탄은 러시아 함선의 裝甲(장갑)을 꿰뚫을 수는 없었지만, 시모세 폭약은 수많은 화재를 일으켰고, 이 화재가 裝甲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해 버렸다. 일본군의 포탄은 또한 수많은 파편을 만들어 냈고, 그 파편이 러시아 수병을 죽였다.

도고는 또한 스피드에서도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낡고 느린 함선을 거느려야 하는 부담이 없었다>

사령장관이 지휘 불능 상태의 경우 즉각 次席 지휘관이 지휘권을 자동 인수한다. 발틱함대의 次席 지휘관은 펠케르삼 少將이었지만, 그는 결전을 목전에 둔 5월23일 밤 암으로 病死(병사)했다. 그러나 로제스트벤스키 中將은 함대의 사기 저하를 염려하여 각 사령관들에게조차 펠케르삼 少將의 죽음을 숨겼다.

그 때문에 펠케르삼 少將의 다음 지휘권 계승자인 제3戰艦隊사령관 네보가토프 少將의 지휘권 장악 시점은 더욱 늦어졌다. 발틱함대는 開戰 후 한 시간도 되지않아 一時 지휘관 不在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오후 3시7분경 전함 「오스라비아」는 드디어 침몰했다. 기함 「스보로프」도 행동의 자유를 잃고 일본군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지휘함을 잃은 발틱함대는 이미 陣形(진형) 같은 것을 갖출 수 없었다. 제각기 필사의 전선이탈을 꾀하고 있었다. 일본 측에선 구축함도 가세, 도주하는 러시아 함정을 추격했다.

오후 5시경 煙霧(연무) 속에서 발틱함대의 主力을 놓친 연합함대의 제1戰隊는 북방으로 反轉(반전)했다. 제2戰隊는 제3戰隊가 발틱함대의 순양함과 포격전을 벌이는 것으로 보이는 南西 방향으로 항진했다.

러시아 함대를 꽁무니로부터 습격하기 위해 南進했던 제3戰隊와 제4戰隊는 오후 2시50분경 거리 약 7800m에서 「올레크」, 「오로라」, 「드미트리 돈스코이」, 「나히모프」 등 러시아 순양함대와 특무선대에 포격을 개시했다. 戰艦끼리의 전투가 이미 치열했던 상황이어서 러시아 측의 戰艦隊는 假裝(가장) 순양함 및 특무함선을 호위할 여유가 없었다.

러시아 측의 陣形은 곧 허물어졌다. 「우랄」을 비롯 화재를 일으킨 艦, 진퇴의 자유를 잃은 艦이 속출했다. 공작함 「캄차카」는 半침몰 상태로 표류했다. 「올레크」 및 「아우로프」 등 순양함이 구조에 나섰다. 그것을 일본 측 순양함이 저격했다. 「올레크」는 화염으로 뒤덮였다. 지그재그로 도주하는 러시아 함정들, 해상 이곳저곳은 아비규환의 지옥도를 그리고 있었다.


일본 연합함대의 추격

연합함대의 제3·제4 戰隊가 패주하는 러시아艦을 추격, 동북으로 針路를 잡은 오후 4시30분경 일본의 주력함대와 교전하다 도피해 온 러시아의 戰艦隊가 돌연 북방의 몽롱한 대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포격이 개시되었다. 순양함은 전함의 전투상대가 될 수 없다. 主砲에서 열세인 일본의 순양함대가 곧장 위기에 빠졌다.

연합함대의 제3·제4 戰隊(순양함대)가 속력을 올려 북방으로 도주하려 할 때 마침 발틱함대의 주력을 추격·南下해 온 도고의 제1·제2 戰隊를 목격했다. 제3·제4 戰隊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오후 6시25분 기함 「미카사」가 적함 「보로디노」를 발견, 포격을 개시했다. 이어 표적을 「아료르」와 「알렉산드르 3세」로 옮겨 공격을 속행했다. 러시아의 함정은 좌우로 針路를 바꾸며 필사의 탈출을 반복했다. 드디어 「알렉산드르 3세」가 大화재를 일으켜 좌측으로 기울다가 곧 전복했다.

일본함대의 공격 재개 직전, 중상을 입은 로젠스트벤스키 中將은 廢艦(폐함) 「스보로프」로부터 구축함 「브이누이」에 옮겨졌다. 그는 함대의 지휘권을 네보가토프 少將에 넘기며 블라디보스토크로 향진하도록 명했다.

지휘권을 위양받은 네보가토프 少將은 즉각 『동북 23도, 함대는 나를 따르라』의 신호기를 내걸고 우회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생존한 함선들 모두가 상처투성이였던 만큼 즉각 지휘함을 따를 수 없었다. 특히 「보로디노」는 파손상태가 극심했고, 장교의 태반이 전사한 상태였다.

주변은 어둠에 싸였다. 오후 7시20분, 도고 사령장관은 각 戰隊에 포격 중지와 北上을 명하고, 다음날 아침 울릉도 앞바다에 집합할 것을 電令했다. 주력함대를 대신하여 밤 바다로 출격한 것은 구축함과 水雷艇(수뢰정)이었다.

아침부터 불던 바람도 잦아들던 이날 오후 7시30분경, 21척의 구축함과 약 40척의 수뢰정은 세 방면으로부터 러시아 함대를 습격했다. 다만 각대의 협조와 작전의 不備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일본 함정끼리 충돌이 잇달아 수뢰정 세 척이 침몰하는 사고를 일으켰다. 그중에는 러시아 함선에 수백m 거리까지 육박하여 어뢰를 발사한 어뢰정도 있었다.

그러나 발틱함대의 잔존 艦 중에 전투의욕을 지닌 것은 없었다. 일본의 함정이 야습을 중지한 0시경 네보가토프 少將의 「니콜라이 1세」를 뒤따른 것은 전함 「아료르」와 裝甲海防艦(장갑해방함) 「세냐빈」, 「아프락신」, 2등순양함 「이즈무르드」의 네 척뿐이었다. 전함 「나바린」은 침몰하고, 같은 전함 「나히모프」와 순양함 「모노마프」는 대파되어 밤의 바다로 표류했다.


항복기를 올린 네보가토프 少將

일본의 연합함대는 敗走艦(패주함)의 퇴로를 끊기 위해 울릉도를 향해 北上하고 있었다. 5월28일 오전 5시경 주력함대의 남방 60해리(약 111km)에서 北上하고 있던 제5전대로부터 『적함 발견!』의 무선이 들어왔다.

도고 장관은 제1·제2戰隊에 전투준비를 명하고, 전속력으로 정보지점에 급행했다. 제5戰隊 가까이로 북상하고 있던 제4戰隊와 제6戰隊도 무전을 받고 러시아의 패주함을 향해 돌진했다.

일본의 각 戰隊는 러시아 함대를 포위했다. 기함 「미카사」는 오전 10시30분경 거리 7000m에서 포격을 개시했다. 다른 艦도 뒤따랐다. 러시아 측에서는 「아료르」가 응전을 개시했다. 그 직후 네보가토프 소장 座乘(좌승)의 「니콜라이 1세」가 돌연 군함기와 將旗(장기)를 내리고 「항복한다」는 뜻의 만국신호기를 올리면서 뒤따르는 艦들에도 「적의 우세한 함대에 포위된 지금 나의 함대는 항복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이때 일본 측은 주력함 28척이 집결, 포위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료르」, 「아프락신」, 「세냐빈」도 군함기를 내리고 항복기를 걸었다.

「니콜라이 1세」가 항복기를 내건 직후, 네보가토프 少將은 戰艦 3척의 함장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이 이상 무익한 전투를 중지함으로써 승조원 2500명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항복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로제스트벤스키 提督의 항복

첫날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로제스트벤스키 中將은 구축함 「브이누이」에 수용되어 있었다. 그러나 「브이누이」는 석탄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기관 고장도 잦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의 도주는 불가능했다. 막료들은 회의를 열어 항해 중 일본 함선과 조우할 경우 長官을 적의 포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白旗와 赤十字旗를 내걸고, 「브이누이」가 투항하기로 결정했다.

새벽의 어둠이 물러가고 동이 텄다. 「브이누이」는 북방 울릉도를 향해 항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前方 멀리 순양함 「돈스코이」가 2척의 구축함과 함께 항행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브이누이」 함장은 무선으로 「돈스코이」에 구원을 요청했다.

함장은 長官에게 「돈스코이」로 옮겨 탈 것을 권했지만, 로제트벤스키는 「돈스코이」를 따라온 구축함 「베도비」에 옮겨탔다. 「베도비」가 아직 2晝夜(주야)분의 석탄을 적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제3구축대의 「사자나미」 (漣·함장 相羽恒三 소좌)가 蔚山灣(울산만)을 출항하고 있었다. 「사자나미」는 灣口에서 제5구축대의 「陽炎」을 만나 동행했다. 오후 2시가 지날 무렵, 수평선상에 2本 마스트의 구축함 2척이 출현했다. 당시 일본 해군에서는 2本 마스트의 구축함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사자나미」와 「陽炎」은 25노트로 속력을 올려 추격했다. 속력이 빠른 일본 구축함은 순식간에 러시아의 구축함 두 척을따라잡아 오후 4시45분 4000m의 전투거리에 돌입했다.

러시아의 2함도 전투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베도비」의 艦橋(함교)에 막료들이 집합, 先後策(선후책)을 협의했다. 함장 바라노프 中佐가 로제스트벤스키 中將이 누워 있는 선실로 내려가 전투를 재개할 것인지의 여부를 물었다.

로제스트벤스키는 『포격을 개시할 필요는 없다. 우리들은 포로가 된다. 「그로즈누이」에게는 신호를 보내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하라고 전하라』고 말했다.

바라노프 中佐는 신호병에게 白旗 준비를 명했고, 참모장 코론 大佐는 전투준비에 들어간 포술병에게 해산을 명했다. 「그로즈누이」에는 전속력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때 일본의 구축함 2척은 마스트에 전투기를 걸고 포격을 개시했다. 러시아의 선두함 「그로즈누이」는 도주하면서도 응전을 개시했다. 그런데 「사자나미」의 승조원 하나가 러시아 後續艦(후속함)의 마스트에 白旗(백기)가 올랐음을 보고했다. 그 후속함은 정지한 다음에 「汽罐(기관: 보일러) 고장」의 萬國信號(만국신호)를 보냈다. 「炎陽」은 「그로즈누이」를 추격하고, 「사자나미」는 白旗를 건 「베도비」를 노획하러 나섰다.

5월28일 오후 7시20분, 「사자나미」는 「베도비」를 예선하여 戰場을 떠났다. 배수톤수 350t짜리 소형 함선으로 발틱함대 司令長官이 탄 구축함을 잡은 것이었다.

5월29일 오전 6시 鎭海灣 근해에서 순양함 「明石」을 만난 相羽 소좌는 「明石」에 예선을 의뢰한 다음 무선으로 「미카사」의 도고 司令長官에게 이후의 지시를 요망했다.

처음엔 『鎭海港으로 가라』는 명령이 나왔지만, 곧 『사세보(佐世保)로 직행시켜라』는 訂正電(정정전)이 내려왔다. 5월30일 오후 0시45분 「베도비」는 사세보港에 입항했다. 로제스트벤스키 中將은 곧 일본 해군병원에 운반되어 치료를 받았다.

플레샤코프 박사는 그의 저서 「차르의 마지막 함대」에서 敗將 로제스트벤스키를 다음과 같이 변호하고 있다.

<애초부터 로제스트벤스키는 작전의 성공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그래서 極東(극동)으로 함대를 이동시키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에게는 장병들을 훈련시킬 시간도, 포격 연습에 쓸 탄약도 충분치 않았다. 포수들의 서투른 솜씨와 함대의 작전수행 능력 부족은 항해가 계속되는 동안 늘 그를 괴롭힌 걱정거리였다. 처음부터 그는 낡고 느린 배들을 極東으로 파견하는 것에 반대했었다.

그의 항해는 마다가스카르에서 두 달 이상, 그리고 인도차이나에서 또 한 달 지체됨으로써 도고에게 (여순港 봉쇄작전 기간 중 손상을 입은-편집자 注) 그의 함선들을 수리할 시간을 주었다>

장장 220일간 지구 둘레의 4분의 3에 달하는 2만9000km의 항해를 강행했던 발틱함대의 함선들은 도크에 올라 수리를 받지 못했다. 당연히 함선들의 바닥에는 해초류·패각류 등이 서식하여 속력을 내지 못했다. 대한해협-동해 海戰에서 발틱함대 전함의 속력은 연합함대에 비해 절반 정도였다.




볼셰비키 혁명운동에 불질러

東海해전으로 러일전쟁의 승패는 결정되었다. 러일전쟁은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사건이었다. 러시아가 전쟁을 종결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은 1905년 들어 폭발하기 시작한 혁명의 기운 때문이었다.

1월22일(러시아曆으로는 일요일인 1월9일), 帝政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들의 스트라이크가 일어났다. 노동자들은 황제에게 올리는 청원서를 앞세워 평화적인 데모 행진을 벌였다.

데모행진에 대한 군대의 발포로 유혈사태를 빚었다. 그 결과 1000여 명이 사망하고 4000여 명이 부상했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은 황제에 대한 민중의 환상을 깨고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발전해 간다.

일본의 승전은 유럽 열강의 침략에 허덕이던 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에게 매우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란·인도·베트남·중국 등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일본을 따라 배우려는 운동이 붐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러일전쟁 후에 일본이 선택한 국가진로는 이와 같은 아시아人의 기대를 배반해 버렸다.

러일전쟁은 애당초 제국주의자들의 세계 분할 전쟁이었다. 일본의 배후에는 영국과 미국이 있었다. 미국은 영국과 함께 일본이 발행한 戰時公債(전시공채)를 구입해 줌으로써 일본의 전쟁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1902년,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 이외의 나라가 對日戰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英日동맹은 1905년에 갱신되었는데, 영국이 일본에 대해 朝鮮 보호국화를 인정해 주는 代價로 일본은 영국의 印度 식민지배의 강화를 지원한다는 것이 그 골자이다.

이처럼 러일전쟁 후의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 블록의 일원으로 지위를 향상시켰지만, 이것은 일본을 아시아로부터 고립시키고, 갈수록 아시아 여러 민족과 敵對的 관계를 이루게 했다. 특히 朝鮮에 대해서는 러일전쟁을 기화로 삼아 保護國化하고, 1910년에는 일본의 영토로 병합했다.

일본 국민의 대외적 의식 면에서는, 아직 봉건적 排外主義(배외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었던 터에 러일·청일 전쟁의 전승에 의해 턱없는 우월감이 조장되었다. 또한 군사대국의 길을 걷는 국가의 진로를 반영, 주변 아시아 諸민족에 대한 멸시감이 일본인의 內面에 뿌리를 깊이 내렸다.


三國干涉과 러일의 朝鮮 침략

이제, 말머리를 돌려 왜 러시아와 일본이 開戰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추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894년, 韓半島에 대한 헤게모니 쟁탈전이었던 淸日戰爭(청일전쟁)은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종결되었다. 淸國의 무력함을 목격한 열강은 빈사상태의 중국을 분할하는 경쟁에 돌입한다.

1895년 4월17일, 淸日 양국은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강화조약에 조인했다. 淸은 요동반도, 대만, 澎湖島(팽호도)를 일본에게 할양했다. 그러나 바로 6일 후인 4월23일, 러시아·독일·프랑스는 강화조약에 개입, 일본 정부에 크레임을 걸었다.

『대륙의 일부인 遼東半島(요동반도)를 일본이 영유한다는 것은 극동 평화의 장애가 된다. 일본은 요동반도의 영유권을 放棄(방기)해야 할 것이다』

삼국간섭을 주도한 나라는 러시아였다. 극동 진출과 不凍港(부동항) 획득을 갈망해 온 러시아는 일본의 대륙 진출에 위협을 느끼고 독일과 프랑스를 설득하여 함께 일본에 「武力 행사 不辭」의 압력을 가했던 것이다.

일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였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와 일전을 겨룰 만한 군사력이 없었다. 5월5일, 일본은 요동반도의 영유권을 방기하겠다고 삼국에 통보할 수밖에 없었다. 승전 무드에 들떠 있던 일본 사람들로서는 찬물을 뒤집어쓴 꼴이었다.

청일전쟁 후 일본은 朝鮮의 종속화를 획책했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의 민족적 저항 및 러시아의 朝鮮 진출과 충돌했다. 1895년 閔妃(민비) 일파는 朴泳孝(박영효) 등을 추방하고 反日정권을 수립했다. 이에 대해 미우라(三浦梧樓) 일본 공사는 일본 수비대·경찰·浪人(낭인) 등을 동원, 景福宮(경복궁)에 난입하여 閔妃를 살해했다.

閔妃 살해사건을 자행한 일본에 대한 朝鮮人들의 적대감은 갈수록 증폭되어 각지에 反日운동이 일어났다. 高宗은 1896년 러시아 공관으로 도피하여 공관 내에서 親러정권을 세우고 親日派를 추방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조선에 있어서 일본의 고립화가 진전되는 한편으로 러시아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삼국간섭을 계기로 유럽 열강은 본격적으로 청국의 이권 쟁탈경쟁에 뛰어들었다. 2개월 후인 6월, 삼국간섭으로 청국에 「恩義」를 입힌 러시아와 프랑스는 공동으로 청국에 대한 4억 프랑의 차관을 교부하고, 이어 9월에는 露佛 양국의 출자에 의한 露淸銀行을 설립하여 청국의 國庫(국고)업무를 잠식했다. 이듬해인 1896년, 러시아는 東淸철도의 부설권을 획득했다.

독일도 가만있지 않았다. 山東省의 폭동에서 독일 선교사가 살해당한 것을 好機로 삼아 上海에 입항해 있던 독일함대에게 膠州灣(교주만)을 점령케 하여 이를 租借(조차)해 버렸다.

1896년 3월27일, 러시아는 旅順(여순)·大連(대련)을 租借함과 더불어 長春-旅順 간의 철도부설권도 획득했다. 삼국간섭에 의해 반환한 여순·대련을 러시아가 租借했다.


군비 확장 10개년 계획

일본 정부는 청일전쟁의 종결과 함께 방대한 군비 확장을 입안했다. 야마가타 (山縣有朋) 육군상은 강화 회의중이던 1895년 4월에 벌써 『利益線(이익선)을 보다 넓혀 東洋을 제패한다』는 목적으로 사단 편성을 1.5배로 증설하고, 사단을 전략 단위로서 운용할 수 있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제안했다.

더욱이 러시아가 주도한 三國干涉에 의해 전리품(요동반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일본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臥薪嘗膽(와신상담)」이라는 四字成語가 시대적 유행어가 될 정도였다.

日本 육군참모본부는 그해 9월 極東(극동) 러시아군을 격파하기 위해 『현재의 7개 사단에다 7개 사단을 더 증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목표는 병력을 평시 15만 명·전시 60만 명으로 늘리고, 동시에 포병·기병을 비약적으로 확대하여 근대전에 대응할 수 있는 군대로 개편하는 것이었다.

사이고 쓰구미치(西鄕從道) 해군상도 해군 확장 계획을 제출했다. 그것은 러시아가 독일 혹은 프랑스와 연합하여 東洋에 함대를 파견할 때 이를 격파할 수 있는 해군력을 목표로 했다.

당시 1만2000t급 이상의 군함은 흘수선 때문에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없었다. 그 이상의 대형 군함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우회해야만 했다. 그 우회항로上에 석탄 저장소를 설치해 놓은 나라는 당시 영국뿐이었다. 만약 영국이 중립만 지켜도 戰時에 대형 전함의 극동 파견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일본 해군은 러시아에서 증원 함대를 파견하더라도 수에즈 운하 통과가 가능한 순양함 이하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공격력·방어력이 모두 압도적으로 우세한 1만5000t급 戰艦 4척을 영국에서 건조했다. 여기에 이미 건조 중인 후지급 전함 2척을 합한다면 東아시아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군사력 증강에 소요되는 경비는 육·해군 합쳐 3억 엔에 달했다. 특히 지출이 절정을 이루었던 1897년에는 청일전쟁 전의 국가총세출에 필적하는 8200만 엔을 국방경비로 지출했다.

군비의 확장 계획은 국민의 부담능력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하지만 삼국간섭에 충격을 받았던 일본 여론은 군비 확장에 찬성이었다. 야당계의 「報知新聞」조차 『세 끼를 아껴 두 끼로 하더라도 해군을 확장하라』고 거들었다.


英日동맹의 체결

1900년 중국에서 排外的 민족주의 운동인 義和團(의화단) 사태가 발생했다.

의화단의 세력은 만주에서도 확대되고 있었다. 이에 러시아는 건설 중인 東淸철도 보호의 명목 아래 대군을 파견했다. 청국과 열강이 강화를 진행시키고 있는 사이에 일거에 만주 전역을 군사적으로 점령해 버린 것이었다.

당시의 만주에 일본의 특별한 권익은 없었다. 그러나 만주가 러시아의 실질적 영토로 된다는 것은 일본으로선 상당한 위협이었다. 영토확장을 계속하는 러시아가 만주로부터 다시 한반도로 남하할 것은 명백했기 때문이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영국도 極東에 있어서 러시아의 행동에 주목했다. 영국은 이미 中國 경제에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만큼 급격히 대두한 러시아가 長城線(장성선)을 넘어 南下, 그 권익이 침해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은 南아프리카의 「보어전쟁」 때문에 極東 정세에 적극 개입할 여유가 없어 협력자를 구해 러시아에 대항하려는 정략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對러시아 관계에서 이해가 일치한 영국과 일본의 동맹 구상이 부상했던 것이다.

일본 지도부 내에서는 異見이 빚어졌다. 야마가타(山縣有朋)·가쓰라(桂太郞) 등 군부 및 가토(加藤高明)·고무라(小村壽太郞) 등 外務省 주류는 對러 開戰에 대비하고 조선·만주의 확보를 겨냥하여 英日동맹을 주장했다. 반면 이토(伊藤博文)·이노우에(井上馨)·무쓰(陸奧宗光) 등은 러시아와 싸울 군사적·경제적 실력이 충분하지 않은 현재, 잠시 러시아와 타협하여 만주의 권익을 인정해 주는 대신에 조선에서의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러일 協商論(협상론)을 주장했다. 이 논쟁에서 결국 야마가타-가쓰라派가 승리하여 1902년 英日동맹이 체결되었다.

당시 세계 제1의 군사대국 영국이 極東의 일개 小國과 대등한 동맹을 맺었다고 하는 사실은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높임과 동시에 러일전쟁을 준비해 오던 일본에 밝은 전망을 열어 주었다. 英日동맹의 체결은 러시아에 대해 상당한 압력으로 작용했다. 동맹체결로부터 2개월이 경과한 4월8일, 러시아는 청국에 대해 군사적으로 점령해 있던 만주로부터 1년 반에 걸쳐 축차적으로 철병할 것을 약속했다.

러시아는 제1차 철병은 실행했지만, 이후 제2차·제3차 철병은 이행하지 않고 청국에 대해 새로운 조건을 붙였다. 만주에 있어 러시아 이외의 국가에 대해 어떠한 권익도 부여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라는 것이었다.

러시아의 세력은 한반도에도 진입했다. 1903년 5월 조선과의 국경지대인 丹東(단동)과 鳳凰城(봉황성)에 군대를 주류시키는 한편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 龍巖浦(용암포)에 포대를 구축하고,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압록강 연안에서 대규모 산림벌채 사업에 착수한다는 것이었다.

만주로부터의 철병 不이행에 더하여 압록강 연안에서의 세력확장은 일본을 크게 자극했다.


선전포고 없이 開戰

일본은 一戰을 결심하고 1904년 2월6일 러시아에 국교단절을 선언했다. 이어 2월8일, 선전포고도 없이 日本 육군 제1군 별동대가 仁川에 상륙하면서 러시아 함선 2척을 침몰시키고, 2월9일에는 해군이 旅順港의 러시아 함대에 대해서도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일본 육군의 작전목표는 요동반도와 遼陽(요양) 그리고 奉天(봉천: 지금의 심양)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제1군은 한반도에서 북진하여 압록강을 건너, 丹東·鳳凰城으로 진격하고, 제2군은 요동반도에 상륙하여 대련·요양 방면으로 진격하고, 제3군은 張家屯(장가둔)에 상륙하여 여순을 공략했다.

러시아는 초전에 기습을 받아 다소 고전했으나 곧 전열을 가다듬었다. 1904년 8월25일, 遼陽회전이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크로포트킨 大將 휘하 25만의 대군을 동원했지만, 일본군은 9월4일 제1·제2·제4 軍의 합동작전으로 요양을 점령했다.

노기(內木希典) 대장의 제3군은 9월19일 여순에 대한 총공격을 재개했으나 실패했다. 제3군은 무려 8개월간의 소모전 끝에 1905년 1월2일 여순을 함락시켰다.

陸戰의 결전은 奉天大會戰(봉천대회전)이었다. 1905년 3월10일에 끝난 봉천대회전에서는 러시아 만주군 총사령관 크로포트킨 휘하의 30만 명과 일본의 만주군 총사령관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휘하의 25만 명이 2주일에 걸쳐 격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이 辛勝했다. 일본군의 인적손실은 7만 명, 러시아군은 인적손실 9만 명에 포로가 2만 명에 달했다.

일본군은 간신히 이기기는 했지만 추격의 餘力(여력)은 없었다. 일본군의 주력은 봉천-鐵嶺(철령) 간에, 러시아군의 주력은 公主嶺 부근에 머물면서 대치했다.

한편 이 시기, 일본의 연합함대는 이미 함정의 수리·정비를 완료하고 鎭海灣을 근거지로 삼아 감시망을 넓히며 발틱함대를 迎擊(영격)하기 위한 맹훈련을 거듭하고 있었다.

발틱함대와 연합함대의 일전이야말로 러일전쟁의 향방을 가늠할 최후의 결전이 될 것이었다. 그러면 발틱함대의 동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904년 4월30일 러시아 정부는 발틱함대를 「太平洋제2함대」로 개편, 여순 및 블라디보스토크를 기지로 삼는 종래의 태평양함대를 「太平洋제1함대」로 개칭한다고 발표했다. 발틱함대를 극동의 戰域(전역)에 증파하겠다는 최초의 의사표시였다.


발틱함대의 약점

발틱함대가 발트海의 리예파야港을 출항한 것은 1904년 10월15일이었다. 사령관에는 軍令部長 代行이며 侍從長官(시종장관)인 로제스트벤스키 해군소장(원정항해 중 中將으로 진급)이 임명되었다.

함대는 전함 7척, 순양함 9척, 구축함 9척, 운송함 14척, 공작선 1척, 특무선 1척이었다. 이어 전함 1척, 순양함 1척, 海防艦(해방함) 3척, 공작함 1척, 운송선 3척 등으로 구성된 「태평양제3함대」가 증파되어 발틱함대는 제2함대와 제3함대를 합쳐 49척에 달하는 大함대가 되었다.

이런 大함대를 멀고 먼 極東으로 파견한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당시 함선의 연료는 운항효율이 나쁜 석탄이었다. 석탄을 대량으로 소비하게 마련인 大함대로선 석탄의 조달과 그 수송선의 확보 문제만 해도 難題(난제)였다.

발틱함대는 戰時(전시) 국제법上 각국의 항만시설을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항해를 중단, 洋上에서 석탄을 반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파도가 높은 洋上에서 석탄수송선으로부터 석탄을 거룻배에 옮기고, 거룻배로부터 다시 군함에 옮기는 일은 대단히 혹독하고 위험한 작업이었다. 이런 작업을 수일마다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발틱함대로선 항해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일이어서 전투훈련 같은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발틱함대의 東航(동항) 목적은 어떻게든 블라디보스토크 또는 여순항에 입항하는 것으로서 일본 해군의 격파는 그 다음의 목표였다.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의 大함대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 전투조직이라는 것은 지휘·전투·보급·통신 등의 諸임무를 균형 있게 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함대도 大·中·小 함정 및 수송선에 의해 諸(제)임무를 분담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러나 발틱함대는 전함·순양함 위주로서 中·小 함정, 보조함이 극단적으로 적은 불균형 함대였다.

발틱함대의 약점을 러시아 측이 모를 리 없었다. 다만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極東에 잔존한 각종 함정을 합쳐 불균형을 수정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발틱함대의 리예파야港 출항은 개편 발표로부터 5개월 반 후인 10월15일이었다. 지연된 이유는 內海用 함선을 外洋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보수공사를 했기 때문이지만, 그것도 매우 불완전했다. 공사 후에도 각 함의 복원력이 약하고, 艦首部(함수부)의 裝甲도 얇았고, 照準器(조준기)·測距儀(측거의) 등의 정밀도도 개선되지 않았다. 더욱이 그것을 움직이는 승무원도 원정 항해를 위해 급히 보충된 신병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항을 서두른 것은, 難攻不落(난공불락)의 旅順에 대해 일본 육군이 어떠한 희생을 치러서라도 함락시키겠다는 결의가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러시아로선 어떻게든 旅順 함락 전에 발틱함대를 보내야 했던 것이다.

발틱함대는 정비부족·훈련부족이었는데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洋上에서 석탄보급을 거듭 감행해야 하는 핸디캡을 지니고 있었다. 더욱이 세계 최강의 해양대국인 영국이 일본편에 서자 러시아 해군은 항해 중 운항 연료인 석탄을 공급받고 선체를 수리할 수 있는 항구를 구하기 어려웠다. 발틱함대는 戰時 국제법상 제3국의 항만에 24시간 이상 정박할 수 없었다. 24시간 정박으로는 석탄 및 船用品의 적재작업을 끝낼 수 없어 발틱함대는 갖은 편법을 사용하였지만, 그로 인해 큰 고통을 받았다.

항해 도중 두 패(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우회한 主力함대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한 함대)로 나눠진 발틱함대는 1905년 1월9일 마다가스카르島 西北 노시베港 앞바다에서 합류했지만, 「旅順 함락」의 충격적 뉴스가 날아들었다. 또한 本國에서는 「피의 일요일」(제1차 러시아혁명)이 발발, 首都 페테르부르크가 소란상태에 있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다.

旅順 함락으로 원정항해의 전제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던 것인 만큼 발틱함대는 여기서 귀환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틱함대는 마다가스카르 해역에서 두 달간을 허비했다.

그러나 1월 말 페테르부르크의 政情이 다소 호전됨에 따라 강경책으로 돌아선 러시아 정부는 전쟁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어 실추된 정치적 위신의 회복을 꾀했다. 차르를 비롯한 러시아의 수뇌부는 일본의 해군력을 얕잡아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東航 계속」의 명령과 함께 제3함대 증파까지 결정했다. 노후함뿐이어서 함대의 편성이 더욱 불균형을 이루는 바람에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의 고민은 깊어졌다.

5월9일, 발틱함대는 베트남 해역에서 1개월의 기다림 끝에 뒤따라온 제3함대와 합류했다. 5월14일, 로제스트벤스키의 함대는 드디어 베트남 해역을 떠났다. 旅順 함락에 의해 일본 해군의 動靜(동정)을 살피는 촉각을 상실한 러시아 측으로서는 암흑 속에다 大함대를 투입하는 꼴이었다.




日本 海軍의 對應

1904년 12월 하순부터 1905년 2월 상순,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는 야마모토 곤베에(山本權兵衛) 해군대신, 이토 스케유키(伊東祐亨) 軍令部長 등과 발틱함대에 대한 기본전략을 협의했다. 그 때 금후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해 세 가지 예상을 세우고, 그에 따른 검토를 거듭했다.

세 가지 예상은 다음과 같다.

1. 발틱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에 入港하여 그곳을 기지로 작전을 할 것이다.

2. 東中國海 또는 黃海 연안으로 直進, 戰局의 타개를 꾀할 것이다.

3. 臺灣 또는 南中國 연안에 기지를 획득, 이것을 거점으로 작전을 할 것이다.

日本 해군으로서는 어느 쪽이라도 대응할 수 있는 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있었다. 旅順港 포위작전으로부터 해방된 일본 함대는 귀국하여 수리를 받고, 한반도 남부 鎭海港에 집결했다. 발틱함대가 어느 해협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더라도, 혹은 東中國海 및 黃海에서 행동하더라도 大韓海峽에만 들어오면 어떻게든 對應 가능하다는 것이 일본 해군 수뇌부의 결론이었던 것이다.

러시아 측은 일본 해군의 戰力이 분산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 예상은 빗나갔다. 일본 해군의 全전력이 집결된 大韓海峽에서의 전투는 일본 측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備蓄 탄약이 1개월분밖에 없었던 일본군

1905년 5월27일과 28일의 이틀 만에 발틱함대가 궤멸당한 해전의 결과는 이 글의 冒頭(모두)에서 쓴 대로이다. 49척의 발틱함대 가운데 目的港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한 함정은 단 3척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일본은 小型 어뢰정 3척을 상실했을 뿐이었다.

만주에 있어서 육군의 攻勢, 대한해협 해전에서의 壓勝(압승)에 의해 일본은 戰局에서도 외교 면에서도 優位(우위)에 섰다. 講和(강화)의 好機가 도래했던 것이다. 그러나 「大勝」에 취한 일본 국민들은 열광, 전쟁의 계속을 부르짖었다.

『하얼빈으로 진격하라.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하라. 바이칼湖까지 공격하라』

그러나 일본군의 전쟁 수행 능력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러시아 해군은 격멸되었지만, 陸戰에서는 러시아군에게 결정타를 가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증원군이 속속 만주로 투입되고 있었다.

반면 일본군은 常備軍은 물론 後備軍까지 소집하는 상황이었고, 재정적으로도 파탄 직전에 처해 있었다. 당시, 일본 육군의 備蓄(비축) 탄약은 1개월분에 불과했다. 이 같은 일본군의 實相이 누설되면 러시아 측이 강화 회담에 응할 리가 없었다.

東海해전 3일 후인 5월31일, 일본 정부는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강화 알선을 의뢰하도록 駐美공사 다카히라 코고로(高平小五郞)에게 訓傳(훈전)을 보냈다. 6월2일, 루스벨트는 일본으로부터 강화 알선 요청이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고 駐美 러시아 大使 카니시를 백악관으로 불러, 일본과의 강화를 정식으로 요청했다. 主戰派였던 카니시는 강화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滿洲에 있어 우리 軍이 劣勢(열세)에 있다고 하지만, 우리 러시아는 일본군에게 寸地의 영토도 점령당한 바 없습니다. 이런 만큼 강화를 먼저 요구해 이제까지 훼손된 러시아의 명예를 더욱 실추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루스벨트는 카니시를 통한 강화 알선을 체념하고 사흘 후인 6월5일, 마이어 駐러 美대사에게 러시아 황제를 직접 만나 강화를 제의하도록 훈령을 발했다.

6월7일, 루스벨트는 일본 特使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를 백악관으로 불러 강화 斡旋(알선)의 경과를 설명한 다음, 일본군이 사할린(樺太)을 점령하라고 가만히 권고했다.

『지금까지 러시아에 대해 몇 번이나 강화 담판을 개시하도록 설득해 왔으나 러시아의 영토가 寸地도 점령되지 않았다면서 거절하고 있다. 일본은 빨리 사할린에 출병해서 즉각 점령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보기엔 1개 旅團(여단)의 육군과 2, 3척의 砲艦(포함)을 파견한다면 용이하게 日章旗(일장기)를 게양할 수 있다. 강화회담이 개시되지 않은 지금이 기회다. 당신이 日本 정부에 전하라』

루스벨트과 가네코는 하버드 대학 동기생이었다. 더욱이 루스벨트는 일단의 사무라이들이 옛 主君의 원수를 갚고 집단 자결하는 일본의 역사소설 「추신쿠라(忠臣藏)」의 애독자로서 매우 親日的인 인물이었다. 루스벨트의 권고는 다음날인 6월8일 駐美 일본공사관을 통해 일본 정부에 전달되었다. 제3국의 대통령이 交戰國의 일방에게 상대 교전국의 영토 탈취를 권고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7월7일, 일본군은 사할린 남부에 상륙했다. 7월31일, 사할린의 러시아군이 항복하고 일본은 사할린 全島에 軍政을 개시했다.


朝鮮의 운명을 결정한 포츠머스 講和회의

일본군의 사할린 全島 점령 이틀 전인 7월29일, 가쓰라(일본 총리)-태프트(미국 육군상) 사이에 비밀각서가 교환되었다. 한국과 필리핀 문제에 관해서 美日 상호의 이익을 승인하는 내용이었다.

드디어 8월10일, 미국 뉴햄프셔州 포츠머스에서 제1회 강화회의가 열렸다. 양측의 全權위원은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 외상과 위테 前 藏相(장상)이었다.

강화회담에서 일본 측은 승전국임을 自處(자처)했으나 러시아 측은 결코 敗戰(패전)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한 치의 땅도, 한 푼의 배상금도 지불할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국내에서 혁명의 기운이 감돌았던 러시아는 회담을 깰 수 없었다.

강화회담이 위기에 빠지자 초조했던 것은 오히려 일본 측이었다. 8월28일 御前會議(어전회의)를 열어 대책을 숙의했지만, 묘책을 얻을 수 없었다. 이대로 전쟁을 계속할 경우 군사적으로 하얼빈을 점령할지는 몰라도 러시아 육군을 제압하기는 불가능했다. 러시아 증원군에 대항하는 데에는 수개 사단의 증설이 필요했지만, 당시 일본에는 그럴 수 있는 兵員도 예산도 없었다.

우여곡절을 거쳐 러시아가 사할린 南部를 일본에 할양하기로 함으로써 9월5일 마침내 「포츠머스조약」이 조인되었다.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러시아 정부는 일본이 조선에 대해 정치·경제·군사상의 우선적 이익을 가진다는 것을 승인한다.

2. 租借權(조차권) 지역을 제외하고 러일 양국 군대는 18개월 이내에 철수한다.

3. 러시아 정부는 淸國 정부의 승인을 받아 旅順·大連灣의 조차권 및 이에 관련된 일체의 특권을 일본에 양도한다.

4. 러시아 정부는 長春-旅順 간의 철도와 支線(지선), 이에 부속되는 일체의 권리와 재산 및 同 철도의 이익을 위해 경영되는 탄광을 淸國 정부의 승낙을 받아 일본 정부에 양도한다.

5. 러시아 정부는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남부를 일본 정부에 양도한다.

이 조약에서 일본이 전승국으로서 얻은 代價는 러시아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거의 모두 中國에서 탈취한 것이었다. 특히 포츠머스조약에 의해 朝鮮왕조의 운명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결정되었다.

러일전쟁의 승패를 결정한 대한해협-東海해전에서 발틱함대를 완벽하게 격파함으로써 일본은 세계 5大 강국의 하나로 뛰어올라 東아시아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후 日帝는 「滿洲의 獨食(독식)」으로 인해 美國과의 긴장관계를 빚었고, 이어 中日전쟁을 도발하여 長期戰의 수렁에 빠졌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잉태된 「皇軍 不敗」의 神話를 맹신하여 太平洋전쟁을 도발했다가 1945년 8월 원자탄 두 발을 맞고 패망했다.

러시아는 러일전쟁의 패배로 혁명의 불길에 휩싸였다. 차르(황제) 니콜라이 2세가 타도되고 결국은 볼셰비키들에 의해 1黨독재의 나라 蘇聯이 성립되었다. 이후 70년에 걸친 左派실험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는데, 다만 인류사에 『공산주의는 인민을 춥고 배고프게 만드는 체제』라는 교훈을 남겼다.●



⊙ 러일전쟁 치른 가고시마의 맨파워

일본 軍閥의 子宮

KAL 785편은 인천공항을 이륙한 지 1시간30분 만에 규슈(九州)의 남단 가고시마(鹿兒島) 공항에 착륙했다. 필자가 굳이 인구 55만의 가고시마市를 답사하려고 작정한 까닭은 이곳이야말로 「일본 軍閥(군벌)의 子宮」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해군 수뇌부는 가고시마 인맥 일색이었다. 러일전쟁 당시 해군대신 야마모토 곤베에(山本權兵衛), 軍令部長 이토 스케유키(伊東祐亨),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의 3인 모두가 가고시마(鹿兒島) 출신이다.

육군에서도 가고시마(막부시대의 薩摩藩)와 야마구치(막부시대의 長州藩) 인맥이 삿초바츠(薩長閥)를 이루며 요직을 독점하고 있었다. 육군참모총장의 직위에 있다가 러일전쟁 開戰 직전에 滿洲軍(만주군) 총사령관을 자청하여 육전의 결전인 奉天대회전에서 러시아의 만주군 30만 명을 격퇴했던 오야마 이와오(大山巖)뿐만 아니라 오야마 예하의 제1군사령관(육군 대장) 구로키 타메모토(黑木爲楨) 등이 가고시마 출신이다.

가고시마 중앙역 광장에서 지하도를 건너면 바로 「나폴리路」다. 고츠키가와(甲突川)를 끼고 1km쯤 올라가면 코라이(高麗·고려)町이며 천변에는 코라이橋가 걸려 가지야町과 연결하고 있다.

다음날 「維新고향館」의 역사해설원 후쿠다 겐지(福田賢治)씨를 만나 처음 들은 얘기지만, 高麗町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잡혀갔던 조선인들의 집단거주지였다고 한다.


가지야 마을의 인맥

길이 100m쯤 되는 高麗橋를 건너면 가지야町이다. 도고 헤이하치로의 生家부터 찾아나섰다. 그러나 마을 외곽 전차길 옆 대로변에서 먼저 발견한 것은 러일전쟁 당시 해군대신으로 그후에 총리를 두 번 역임한 야마모토 곤베에(별항기사 참조)가 태어난 집터를 알리는 자그마한 비석이었다. 현재 이곳에는 「정형외과 田中병원」이 들어서 있다. 곤베에의 조카인 야마모토 에이스케(山本英輔)의 출생지도 이곳이다. 에이스케는 해군항공의 중요성을 내다보고 항공본부장을 지냈으며 그후 해군대장에 올랐다.

도고 헤이하치로(별항기사 참조)의 생가 터는 야마모토 곤베에의 출생지로부터 300m쯤 떨어진 가고시마 縣立 중앙고교 건물 옆 골목 안에 있다. 중앙고교 정문 앞으로 나와 대로를 건너면 제법 큰 비석이 서 있다. 비석에는 「元帥 公爵 大山巖 誕生之地」(원수 공작 대산암 탄생지지)라 쓰여 있다. 오아야 이와오(大山巖)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두 번 모두 원정군의 총사령관직을 맡았다.

오야마의 출생지에서 북쪽으로 150여m 떨어진 곳에는 오야마 휘하의 제1군사령관(육군 大將)을 지낸 구로키 타메모토의 생가 터가 있다.

오야마의 생가 터로부터 골목길을 따라 동쪽으로 100m 쯤 걸어가면 갑돌천변에 「유신후루사토(고향)관」이 있다. 이것은 근대일본의 출발점인 명치유신의 기념관(입장료 300엔)이다. 「유신후루사토관」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小공원이 있는데, 서쪽 小공원은 「維新3傑」의 1인으로 명치유신 이후 근대일본의 건설을 주도한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청소년 시절에 살던 집터다. 그의 생가 터는 高麗町의 갑돌천변에 있다.

동쪽 小공원에는 명치유신의 최고 공로자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그의 동생 쓰구미치(從道)의 생가 터이다. 다카모리는 도고와 오야마를 영국·프랑스로 유학을 보내 근대 군사학을 배우게 했다. 다카모리는 이와오의 사촌형(이와오의 아버지가 大山 집안에 養子로 가서 姓이 바뀜)이며, 도고는 다카모리의 숭배자이다.

다카모리의 동생 쓰구미치는 해군대신(현역 해군대장)으로 재직하다가 러일전쟁 2년 전에 병사했는데, 그의 후임 해군대신은 그가 뺨까지 때리며 후계자로 키운 야마모토 곤베에였다.

가지야町 출신을 포함시키지 않더라도 가고시마市 출신 「明治 인물」은 많다. 청일전쟁 때의 연합함대 사령장관과 러일전쟁 때의 군령부장을 지낸 이토 스케유키, 러일전쟁을 앞두고 파괴력이 강한 이쥬인信管을 제작한 이쥬인 고로(伊集院五郞: 후일 해군대장·원수 역임) 少佐 등이 그들이다.


開明藩主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근대화 사업

그렇다면 가지야 마을을 비롯한 가고시마 인맥 형성의 에너지는 무엇일까. 가고시마는 도쿠가와 막부 시절 사쓰마藩(번)의 다이묘(大名)인 시마즈(島津)家의 영지였고, 가지야町에는 사쓰마藩의 下級 사무라이 가옥 70戶가 취락을 이루고 있었다.

사쓰마번은 16세기 말부터 하급 사무라이의 자제들에게도 특유의 全人敎育을 시행했다. 그것이 鄕中교육이다. 향중교육은 6~7세로부터 24~25세까지 청소년들을 연령에 따라 3개 組로 나눠 사무라이 교육을 시키는 것이었다. 사이고와 오쿠보는 향중교육을 통해 육성된 대표적 인물이다.

답사 이틀째인 9월26일, 필자는 가고시마 중앙역 앞 관광안내소에서 「가고시마市 관광지 周遊 버스」 1일 승차권을 샀다(값 600엔). 市 교통국에서 발행하는 이 승차권 하나만 있으면 市營 버스·전차를 하루 동안은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적지 입장요금의 10%를 할인받는다.

도고 헤이하치로의 묘소와 동상은 가고시마 앞바다 錦江灣(금강만)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多賀山 공원의 정상부에 있다. 錦江灣에는 가고시마의 상징인 사쿠라지마(櫻島·앵도)가 떠있다. 사쿠라지마는 세계유수의 활화산으로 지금도 그 꼭대기에서는 하얀 연기를 쉬지 않고 뭉텅뭉텅 뿜어내고 있다.

가고시마市 답사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곳은 사쓰마의 開明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1809~1858)의 업적과 유물을 보존하고 있는 박물관 「尙古集成館」(상고집성관)이었다(입장료 1000엔). 이곳은 나리아키라가 서양문명을 도입하여 수많은 산업(集成館 사업)을 일으켰던 현장이다.

박물관에는 당시 철을 제조했던 용광로, 대포를 제조했던 반사로 등이 전시되어 있다. 집성관 일대에서 나리아키라는 서양식 범선인 昇平丸, 일본 최초의 증기선인 雲行丸 등을 건조했고, 기계방적, 인쇄·출판, 電信, 제당, 제약 사업도 운영했다.

변경에 위치한 사쓰마藩이 일본에서 가장 먼저 개화한 것은 막부의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막부 몰래 서양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중국 상인 등과의 밀무역을 통해 富를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쓰마藩이지만, 막부가 미국의 砲艦外交(포함외교)에 굴복하여 개국정책을 취하려 하자 죠슈번과 더불어 삿쵸(薩長: 사쓰마-죠슈)동맹을 맺고 막부 타도를 겨냥한 攘夷(양이)운동의 선봉에 섰다. 개국을 하면 막부의 본거지이며 미국과 가까운 東京灣이 중시되고 에도 막부의 지위도 강화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쓰마-죠슈를 중심으로 하는 명치유신 정부가 들어서면 그 주체들의 대외정책은 開國 방침으로 급격히 전환한다. 이같은 표변은 후세의 史家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지만, 실은 이미 예정된 행동이었다. 명치유신의 주체들은 외국과의 경계선에서 성장했던 만큼 외국사정에 정통했다.

더욱이, 사쓰마는 영국함대와의 전쟁(薩英전쟁·1863), 죠슈는 4개국(英·佛·美·和) 연합함대와의 전쟁(1864)에서 막강한 포격을 받고 놀라 일찌감치 開國에 의한 富國强兵(부국강병)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명치유신 이후 일본의 부국강병은 우리 민족에겐 큰 재앙이 되었다.



⊙ 李舜臣 장군을 軍神으로 존경한 運이 따른 提督 도고 헤이하치로

당시 일본의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해군대신의 推擧(추거)에 의해 천황이 보임했다. 러일전쟁 開戰 직전,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常備함대 사령장관이었던 히다카(日高壯之丞)의 수평이동이 예상되고 있었다. 그러나 야마모토 해군대신은 마이쓰루(舞鶴) 鎭守府 사령장관이었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를 추거했다. 그렇다면 도고가 발탁된 배경은 무엇일까. 연구자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이유를 손꼽고 있다.

첫째, 도고는 歷戰(역전)의 勇者였다는 점이다.

도고는 소년 시절에 이미 薩英(사쓰마-영국)전쟁에 참전했다. 明治維新(명치유신) 직후 해군사관이 되어 戊辰戰爭(무진전쟁: 1868~1969년에 전개된 舊 幕府軍에 대한 정벌전)의 여러 海戰에서 海上 포격전의 경험을 쌓았다.

그에겐 近代 해전의 경험도 있었다. 청일전쟁 때 豊島(풍도)해전·黃海해전·威海衛(위해위) 포격작전에 참가했고, 전쟁 말기에는 常備함대사령관으로 승격하여 澎湖島(팽호도) 점령작전을 지휘했다.

도고는 일본의 정규 해군사관 양성기관인 海軍兵學寮(해군병학요) 출신이 아니다. 1871년부터 1878년까지 정부 파견 유학생으로 영국에 건너갔는데, 영국 해군병학교의 입학이 허락되지 않아 우스타 商船학교에서 항해술을 배웠다. 그는 상선학교 입학 때 나이(24세)가 너무 많아 生年을 10년 낮추는 허위신고를 했다. 아무튼 7년간의 영국 생활이 도고의 국제성을 키워준 것 같다.

청일전쟁의 첫 전투였던 豊島해전 때 「浪速」의 함장(대좌)이었던 도고는 청군 1000여 명을 수송하던 영국 국적선 高陞號(고승호)를 격침시켜 물의를 빚었지만, 戰時國際公法(전시국제공법)에 저촉되지 않게 교묘한 사전조치를 구사하여 명성을 올렸다.


好敵手들의 不運

도고는 運이 따르는 군인이었다.

러일전쟁 開戰 때 러시아의 旅順함대(태평양함대)를 지휘했던 제독은 스타르크 中將이었다. 스타르크는 함대 근무의 경험이 없었고, 소극적이었다. 함대의 사기가 오를 리 만무했다. 도고로선 손쉬운 相對였다.

러시아 宮廷에서 도고의 好敵手(호적수)가 될 것으로 판단했던 제독은 마카로프 中將과 로제스트벤스키 少將(極東원정 항해 중 中將으로 진급)이었다.

마카로프는 러시아-터키 전쟁에서 혁혁한 武功을 세워 함장·사령관·사령장관을 역임했고, 러일전쟁 開戰 때는 크론슈타트 鎭守府 사령장관이었다. 그의 저서 「海軍戰術論」은 세계적으로 유명하여 도고 提督도 기함 「미카사」에 그 책을 꽂아두고 읽었다.

로제스트벤스키는 지휘관으로서의 경력에 있어서 마카로프보다 상당히 뒤진다. 실전 경험은 露土전쟁 때 마카로프 휘하 水雷艇長(수뢰정장)으로 종군한 정도였다. 영국 주재 武官으로 장기간 근무했으며, 귀국 이후 포술·폭약 관계의 직무에 종사하여 砲術(포술)의 大家라는 명성을 얻었다. 長身으로 容姿·태도가 우아했는데, 얄궂게도 上官 마카로프 中將의 부인이 그의 情婦였다. 開戰 때는 軍令部長 대리 겸 侍從長官에 올라 있었다. 독선적이어서 人望은 낮았지만 知的 수준은 높았다.

결국 스타르크는 질환 때문에 본국으로 귀환했고, 마카로프가 旅順함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1904년 3월6일, 마카로프의 여순 着任과 함께 태평양함대의 사기는 急상승했다.

그러나 러시아로서는 不運했다. 1개월 후인 4월13일 오전, 旗艦 「페트로파브로프스크」가 일본 연함함대 측에서 전날 밤 여순港 밖에 부설해 놓은 機雷에 부딪쳐 爆枕(폭침)할 때 마카로프 제독도 운명을 함께 했다.

마카로프가 戰死함으로써 도고는 好敵手와 겨루지 않게 되었다.

다음으로는 黃海海戰에서 도고에게 행운을 가져온 이른바 「미카사의 제1탄」이었다.

마카로프가 戰死한 후 함대 참모장인 少將 우이트게프트가 임시 사령장관으로서 여순함대를 지휘했다. 함대는 황제의 명령에 의해 8월10일 블라디보스토크로 回航(회항)하려고 대거 출격해 黃海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오후 6시경 기함 「스레자레비치」의 艦橋(함교)에 미카사의 제1탄이 명중하여 우이트게프트 少將을 날려 버렸다. 이로써 러시아 함대는 대혼란에 빠져 블라디보스토크로의 回航 기도가 꺾이고 말았다.

세 번째로는 대한해협 해전에서 도고가 T字전법을 구사하려던 순간에 발틱함대가 陣形變換(진형변환)의 미완성 때문에 혼란에 빠져 있었다는 점이다.

애당초 러시아 함대는 제1·제2·제3 戰艦隊의 12척이 單縱陣(단종진)을 이뤄 전투하려고 했다. 그러나 「2열의 혼란」에 의해 전투 개시의 순간, 제1戰艦隊를 제외한 러시아 戰艦隊의 대부분은 속력을 늦춰 거의 정지하는 전함도 있었다. 결정적인 시점에서 러시아 함대는 砲戰力(포전력)을 발휘하지 못해 일본 함대의 먹이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軍神이라고 할 提督이 있다면 李舜臣뿐』

도고의 배후에서 해군의 軍政을 총괄하고 해군작전을 지도한 사람은 당시 가쓰라(桂) 내각의 부총리 겸 海軍大臣이었던 야마모토 곤베에(山本權兵衛)였다. 따라서 야마모토가 연출자라면, 도고는 무대에서 각광받은 「배우」였다고 할 수 있다.

도고는 고향의 大선배(스무 살 차이) 사이고 다카모리를 존경하여 戊辰(무진)전쟁 등에 종군했다. 그는 정규 해군사관 교육을 받지 못한 데다 長期 영국 유학(7년간)으로 고향의 5년 後輩(후배)인 야마모토보다 진급이 늦었다.

도고는 러일전쟁 후 海軍軍令部長, 元帥, 東宮御學文所 총재, 侯爵(후작)이 되었다. 그는 담담한 인품이었다. 전승을 축하하는 한 연회에서 참석자들이 그와 英國의 넬슨 제독을 軍神으로 추어올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넬슨은 軍神에 비유될 수 없다. 해군 역사상 軍神이라고 할 提督이 있다면 李舜臣(이순신) 한 사람뿐이다. 李舜臣과 비교하면 나는 下士官도 못 된다』

도고가 이처럼 李舜臣 숭배자였던 때문인지 東海해전을 앞두고 도고 휘하의 참모들도 閑山島의 이순신 祠堂(사당)에 찾아가 참배를 드렸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일본제국은 발틱함대를 격파하기 위해 나라 전체가 도고를 지원했다. 李舜臣은 혼자 힘으로 戰船을 건조하고, 兵糧(병량)을 모으고, 敵을 물리칠 방법을 연구한 고독한 提督이었다.

韓國人에게 도고는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 宣戰布告(선전포고)도 없는 상황에서 첫 포탄을 날림으로써 戰端(전단)을 열었던 인물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올린 일본 勝戰의 결과가 韓半島의 식민지화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선전포고하지 않은 상황에서의 先制공격은 이후 일본군의 상용수법이 되었다. 훗날의 滿洲事變, 中日전쟁, 太平洋전쟁에서도 이런 악습이 되풀이되었다. 그것이 일본의 전쟁 최고 수뇌부의 전략적 판단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런 일본군의 악습이 그의 實行(실행)에 의해 비롯되었는 점에서 名제독의 그에게 그림자가 될 수밖에 없다.

도고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애정은 대단했다. 도고가 죽기 3년 전에 그의 숭배자들은 「도고神社」를 건립하려고 그의 허락을 청했다. 이에 대한 그의 답변은 『어째서 그런 바보짓을 생각했는가!』였다. 그는 政界에 진출하지 않고 군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1934년 6월 88세로 사망했을 때 일본제국의 國葬(국장)으로 예우되었다. 금년으로 러일전쟁 開戰 100주년을 맞은 日本에서는 東京에 있는 도고 기념관과 도고神社를 중심으로 갖가지 행사가 벌어지고 있다.●



⊙『인재양성 以外의 秘訣은 없다』

「日本海軍 건설의 아버지」 야마모토 곤베에

야마모토 곤베에(山本權兵衛)는 「일본 해군 건설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사쓰마(薩摩)藩의 사무라이 출신으로 사쓰마-英國전쟁, 戊辰전쟁에 종군한 후 해군에 투신, 兵學校의 前身인 海軍兵學寮(해군병학요)의 제2기생이 되었다. 제1기생은 2명뿐이었던 만큼 조직적으로 교육된 海軍士官의 정점에 섰다.

일찍이 독일 군함에 승함하여 세계의 곳곳을 연습 항해, 해상 근무의 실무를 체득했다. 미국 및 유럽 선진국의 實相을 상세하게 견학·조사하여 軍政家로서 예비지식을 얻었다.

청일전쟁 3년 전인 1891년, 해군대신官房主事(관방주사)가 되어 해군 軍政의 중추에 진입했다. 이후 러일전쟁의 종료까지 海軍省(해군성) 군무국장, 해군대신으로 재직했다.

야마모토가 海軍省에 재직했던 40세부터 55세까지 15년간에 일본 해군의 제도·조직·人事가 확립되었고, 군함은 8만t에서 30만t으로 증강되었다. 일본은 後進해군국에서 세계 제3위의 해군국으로 발전했다.

야마모토는 1895년에 少將으로 진급하는 동시에 軍務局長으로, 1898년 중장으로 진급한 뒤 반 년 만에 海軍大臣이 되었다.

일본 해군의 급속한 발전은 列國(열국)이 경탄하는 바 되었다. 러일전쟁 초기에 駐日 브라질공사관 武官이 『어떤 방침에 의해 고작 수년 만에 이 같은 발전이 가능했는가』라고 물었을 때 야마모토는 『人材양성에 全力을 기울였다. 인재만 있으면 艦船砲機(함선포기)는 뒤따라 온다. 그 이외의 비결은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야마모토의 本領은 적재적소의 人事에 있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1893년 해군의 인원정리가 단행되어 將官 8명을 포함, 97명의 士官이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그 原案을 입안했던 사람이 야마모토였다.

일본 해군이 주창한 國防論의 최고권위자는 사토 데쓰다로(佐藤鐵太郞)였다. 그는 야마모토의 후원 아래 영국·미국에서 연구한 후 1902년 「帝國國防論」을 저술했다. 야마모토는 이 책을 즉각 천황 메이지(明治)에게 바쳤다.

러일전쟁에 참전했던 참모의 다수는 전쟁 직전에 해군대학에서 참모교육을 받았다. 교장은 사카모토 토시아쓰(坂本俊篤) 소장, 전술담당 교수는 아키야마 사네유키(秋山眞之) 소좌였다. 이 교육은 일본 해군의 사상통일에 기여, 러일전쟁 승리에 크게 공헌했다.

원래 일본 해군은 포술·水雷(수뢰)·항해·기관 등의 術科(술과)교육만을 실시하고, 참모교육은 시행하지 않았다. 군무국장 시절의 야마모토는 사카모토의 의견을 채택함과 동시에 사카모토를 敎頭로 임명하여 1897년부터 甲種학생에 대한 참모교육이 시작되었다.

야마모토 人事의 압권은 러일전쟁을 앞두고 해군성 차관에 사이토 마고토(齊藤實)를, 연합함대사령관으로 도고를 배치한 것이었다.

야마모토는 해군대신에 취임하면서 대좌가 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이쓰시마(嚴島)」의 함장 사이토를 일약 차관으로 발탁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사이토는 그림자처럼 야마모토를 보좌하여 후일 해상·조선총독·총리가 된다. 특히, 오래 전부터 러시아 함대와의 決戰 방법을 연구해 왔던 도고의 기용은 戰勝의 큰 요인으로 평가되었다.


英日동맹과 艦艇 정비

영국으로부터 내밀한 동맹 제의가 들어왔던 제1차 가쓰라 내각에서 이를 제일 먼저 찬성했던 大臣이 야마모토였다. 이어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 外相이 찬동, 조약은 1902년 런던에서 조인되었다.

英日동맹의 존재가 러일전쟁에 있어 일본 승리의 기본적 이유가 된 것은 역사를 연구하면 할수록 명백해진다.

전략·전술적 견지에서 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한 것은 전함이 장착한 대포의 위력이었다.

야마모토는 군무국장 시절에 1만2000t급 전함 2척에 이어 1만5000t급 전함 4척의 추가 건조를 주장, 예산을 획득했다. 4척은 「시키시마(敷島)」, 「아사히(朝日)」, 「하츠세(初瀨)」, 「미카사(三笠)」이었다. 이 6척은 모두 영국에서 건조된 것으로 개전 전에 일본에 도착하여 主전력이 되었다.

러시아의 해군력은 일본의 2배에 달했다. 여순항에 7척의 전함이 있었는데다, 원정해 올 발틱함대는 8척의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야마모토는 개전 직전의 御前會議에서 러시아의 여순艦隊와 본국艦隊를 각개격파하는 전략을 天皇 메이지에 進言했다. 그리고 이 전략을 도고에게 실행시켜 승리를 거두게 된 것이다.

다만 여순항의 봉쇄작전 중 전함 「初瀨(초뢰)」와 「八島(팔도)」가 수뢰에 부딪혀 침몰했다. 그러나 이 缺落(결락)은 야마모토가 영국의 정치적 지원을 받아 이탈리아에서 건조 중이던 아르헨티나의 裝甲巡洋艦 「모레노」와 「리바타비아」의 구입에 성공함으로써 거의 보완되었다. 이 두 艦은 「日進」과 「春日」로 명명되어 開戰時에 인수, 實戰에 투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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