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病床의 前 신민당 총재 李敏雨옹(90) 인터뷰

『과거 野黨을 함께 했던 金泳三·金大中·盧武鉉씨가 집권, 나라가 이 모양 됐으니 얼굴을 들 수가 없어. 빨리 죽고 싶을 뿐이야』

글 정순태 기자  2004-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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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共 때 제1야당(新民黨)의 총재로서 한국의 민주화운동史에서 결코 그 이름 석 자를 지울 수 없는 李敏雨(이민우)옹이 위독하다. 금년 90세인 仁石(인석: 李敏雨옹의 아호)은 지병인 심부전증의 악화로 현재 서울대학병원에 입원 중이다.

仁石은 지난 9월1일 이후 同병원에 이미 두 차례 입원한 바 있다. 그 후 또다시 병세가 악화되어 지난 10월30일 同병원 중환자실에 옮겨져 위기를 넘기고, 지난 11월6일 이후 일반병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아직 언어가 자유롭지 못한 상태인 仁石은 문병을 사양하고 있지만, 옛 친구 몇 분에 대해서만은 『내가 언제 다시 일어날 수 있겠느냐』며 『얼굴이라도 보고 싶다』는 연통을 놓은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11월8일 오전 10시30분, 李敏雨 前 총재를 만나기 위해 그의 병실로 찾아갔다. 병실은 비어 있었다. 기자는 주인 없는 병실에서 30분쯤 기다렸다. 오전 11시쯤 仁石은 부인 金東粉(김동분) 여사와 막내아들 李相烈(이상열)씨가 미는 카트에 실려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을 비운 것은 「정밀검진」 때문이었다고 한다.

노년에도 유별나게 기골이 장대했던 仁石이었지만, 이제는 몰라보게 야윈 모습이었다. 그는 가족들에 의해 병상에 눕혀졌다.

─근자에 들어 입원을 자주 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뵈러 왔습니다.

『이번이 세 번짼디…, 이리루 가까이 와.

심장이 안 좋아. 숨차서 말을 잘 못 혀』

─선생님, 힘드시면 말씀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국민들에게 미안하고 죄송스러워. 과거 야당을 함께 했던 金泳三·金大中·盧武鉉씨가 정권을 잡아 나라를 이 모양으로 망쳐 놓았으니께 나는 부끄러워 얼굴을 못 들겠어. 나라 되어가는 것이 걱정이여. 이제 나는 병이 나고, 나라와 후손에게도 보탬이 되지 않는 사람 아녀. 빨리 죽고 싶을 뿐이여』

─쾌차하셔서 우리들에게 좋은 말씀 해주셔야지요.

『무엇 때문에 평생 이렇게 험한 길을 걸어왔는지, 자괴감뿐이여』

─金泳三의 문민정부, 金大中의 국민의 정부, 盧武鉉의 참여정부가 그전의 군사정권보다 잘했어야 민주화운동이 빛날 터인데, 그러지 못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들(군사정권)은 해놓은 게 있지만, 우리는 한 것이 없어』


『독재로 되돌아가고 있다』

─군사정권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했다면 민간 출신 정치인들은 민주화를 이룩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盧武鉉 정권이 하고 있는 것 봐. 민주화가 뭐여, 독재로 되돌아가고 있지 않으냐 말여. 나는 盧武鉉 정권이 우리 국민을 어디로 끌고 가려는지….

金大中씨 같은 사람은 과거 함께 야당할 때도 그랬지만 조금 좌익이여. 그런 金大中씨가 盧武鉉 정권을 낳은 것 아녀. 따지고 보면 金泳三씨의 잘못 때문이란 말여』

─左派의 집권이 왜 金泳三씨의 잘못 때문입니까.

『(1997년 大選에서) 金大中씨하고 李會昌씨가 맞붙었잖어. 金泳三씨는 李會昌을 공천해 놓고는 李仁濟(이인제)를 밀었거든. 자기 아들(김현철)을 2인자로 만들려고 그랬던 것이여. 보통 정치인이라면 생각도 하덜 못할 그런 짓을 하지 않았어요. 李仁濟씨가 경북과 경남에서 표를 많이 모아 500만 표나 얻었잖어.

그때 金大中과 李會昌의 표차가 38만 표에 불과했거든. 金泳三씨가 대통령이란 現職을 이용하여 李仁濟를 밀지만 않았다면 李會昌씨가 몇백만 표 차이로 이겼을 거야. 정치하는 사람이 그럴 수는 없는 법이여. 정치道義(도의)도 없구, 信義(신의)도 없었던 일 아녀』

이 대목에서 아들 李相烈씨는 『아버지, 그만 하세요. 힘들지 않으세요』라고 참견했다. 그러나 仁石은 멈추지 않았다.

『金大中씨가 대통령 되어 감옥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죄 풀어 주고 이북으로 보냈잖습니까. 5년간 공산당(간첩) 하나 안 잡아들이고 金正日이와 연방제 합의를 했다니 뭐니 해서 나라가 이렇게 위험하게 되지 않았소. 그리고는 金大中씨가 자기의 (햇볕정책) 노선을 유지시키기 위해 盧武鉉씨를 밀었던 거요.

그런 덕택으로 (지난 大選에서) 盧武鉉 후보가 광주 같은 데서 표를 93%나 얻어서 당선되지 않았소. 이제 盧武鉉 정권은 국회에서 다수당까지 차지해서 나라를 훼손하고 있어. 정권이 이렇게 방자해져서는 안 되는데, 이제 보니 막가는 거여. 큰일 났어. 그런데도 나 지금 병들어 제대로 말도 못 해』

─선생님 말씀 잘 알아들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병원까지 찾아오셨는데, 할 말을 못 해 미안합니다. 언론인이 나라의 일에 관해 묻는데, 이런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는 것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들 相烈씨는 인터뷰를 하던 내내 시퍼렇게 멍이 든 仁石 선생의 팔과 다리를 주물렀다.

─퇴원하신 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때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십시오.

『다시 일어설지 모르겄소. 요즘 누워서 곰곰이 생각하니 내가 정치를 하면서 사람을 잘못 알아본 일도 더러 있었던 것 같아』


素石 같은 애국자 드물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素石(소석: 李哲承씨의 아호) 말이오. 과거 민주당할 때 素石은 新派고 나는 舊派를 했고, 그 후 같은 야당(新民黨)을 하면서도 자주 부딪쳤거든. 나는 그의 「中道통합노선」을 반대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 사람만큼 나라를 위해 일한 사람도 드물어. 素石은 나이를 먹어도 아주 건강하잖아요. 그런 분이 아직도 자유민주주의 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해 주어서 참 다행이여. 고맙기도 하구』

─仁石 선생께서는 金泳三씨를 많이 도와주시지 않았습니까.

『金泳三씨도 나를 믿고 여러 가지로 거시기 했어요. 그랬지만 大義를 저버려서는 안 되겠다… 이래 가지고 그때부텀 딱 끊었어요』

金泳三씨와 李敏雨씨는 제2공화국 시절의 제5代 국회에서 함께 신민당 원내부총무를 지냈다. 1974년 8월, 柳珍山(유진산) 당수의 病死 후 개최된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金泳三씨가 총재로 당선되고, 李敏雨씨는 珍山直系(진산직계: 堅志同友會)를 이끌면서 金泳三 체제를 적극 뒷받침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金泳三 총재는 제1야당의 몫이었던 9代 국회 후반기의 국회부의장 자리를 李敏雨씨에게 배정했다.

그러나 1976년 전당대회에서 李哲承(이철승) 대표최고위원 체제가 성립됨으로써 金泳三·李敏雨씨는 非主流(비주류)가 되었다. 1979년 전당대회에서는 온건노선의 李哲承 대표체제가 패배하고 金泳三씨가 다시 당권을 탈환했다. 이때 李敏雨씨는 부총재로 뽑혔다. 金泳三 총재 체제의 신민당은 직전제 개헌을 요구하며 朴正熙 정권에 대한 강경투쟁을 벌였다.

이런 와중에서 對野 공작의 부진 및 실패의 책임문제와 관련, 중앙정보부장 金載圭(김재규)와 대통령경호실장 車智澈(차지철)의 암투가 빚어지고, 이것이 朴正熙 대통령 시해 사태(1979년 10·26 사건)로 번지게 되었다.

朴正熙 사후의 「서울의 봄」 기간에 金泳三·金大中·金鍾泌(김종필)의 大權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학생 등의 시위도 잇달았다. 이런 혼미한 시국의 틈을 타 全斗煥의 新軍部가 사실상의 쿠데타로 국회를 해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1983년 金泳三의 上道洞系(상도동계)를 중심으로 「민주산악회」가 조직되었다. 李敏雨씨는 그 회장이 되어 金泳三씨를 도왔다. 이어 金泳三씨의 上道洞系와 金大中씨의 東橋洞系(동교동계)가 연합하여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했고, 이 조직은 新民黨의 모태가 되었다. 1985년 金泳三·金大中씨가 정치규제법에 묶인 상황에서 李敏雨씨는 신민당의 총재가 되었다.

1985년의 2·12 총선에서 李敏雨씨는 종로·중구에서 당선되어 6選 의원이 되었고, 신민당은 官製 야당이었던 民韓黨을 누르고 제1야당이 되었다. 이후 李敏雨 총재는 신민당의 개헌추진본부장을 겸하며 직선제 개헌운동에 앞장섰다.


「李敏雨 구상」이 몰고온 파문

仁石은 국민적 인기를 누렸다. 그것은 변두리(三陽洞) 산꼭대기의 허름한 집에 살면서 부인 金東粉 여사의 양계업으로 가계를 꾸려온 그의 청렴성, 정치적 꼼수를 부리지 않는 그의 정직성 때문이었다. 그의 별호는 「愚直(우직)선생」이었다. 어느덧 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되던 李총재는 兩金의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당시 개헌문제를 둘러싼 與野의 극한대립은 「하나의 궤도 위를 마주보고 달리는 충돌 직전의 기차」로 비유되었다. 1986년 12월24일, 李敏雨 총재는 기자들에게 『정부 당국이 언론의 자유, 구속자의 석방, 지방자치제 등 여러 민주화 조치를 단행한다면 내각제 개헌도 생각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것이 바로 「李敏雨 구상」이었다.

사실 「李敏雨 구상」은 평소 신민당 정무회의 등에서 李총재가 간혹 거론하던 내용이었지만, 그때까지 별다른 黨內 반발은 없었다. 최형우·김동영씨 등 상도동계의 실력자도 李敏雨 총재의 이런 발언에 별다른 이의를 걸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李敏雨 구상」으로 포장되어 언론에 크게 보도되자 黨內의 반발이 들끓고, 국민의 반응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당시 집권 民正黨(민정당)은 합의 개헌에 아무런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신민당도 개헌문제는 제쳐둔 채 「李敏雨 구상」을 둘러싼 내분에 휩싸였다. 신민당 내분의 장기화는 李총재와 兩金 모두에게 부담이었다.

1987년 1월16일 우여곡절을 거쳐 李敏雨 총재와 金泳三 고문이 회동했다. 이날 회동에서 두 사람은 다시 손을 잡았다. 『「李敏雨 선언」은 직선제 개헌 관철의 한 방안』이라고 李총재가 후퇴한 결과였다. 그러나 金泳三씨의 참모들은 「李敏雨 구상」의 피력을 『李총재 자신의 정치적 야심』으로 보았다. 결국 두 사람의 연대는 오래 가지 않았다.

그 해 봄, 7년 단임 헌법 때문에 再출마할 수 없었던 全斗煥 대통령은 느닷없이 내각제 개헌 용의를 밝혔다. 국회에서 다수파를 장악함으로써 집권을 연장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그것은 교묘한 야당 분열책이기도 했다.

李敏雨 총재의 정치적 立地는 더욱 옹색해졌다. 신민당의 실질적 「오너」였던 兩金은 그해 4월8일 자신들을 따르는 의원 74명을 한꺼번에 탈당시켜 李敏雨 총재의 신민당을 「껍데기」로 만들었다. 兩金은 「통일민주당」을 만들었다. 이후 직선제 쟁취를 위한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6월사태)가 일어나고, 이것이 「6·29 선언」과 직선제 쟁취로 이어졌다.

『1987년 11월6일 내가 성명을 내고 정계를 은퇴했잖아. 내가 오죽했으면 그랬겠어』

李敏雨 신민당 총재는 의원직까지 깨끗이 사퇴했다. 이재형 당시 국회의장은 李총재의 의원사직서를 수리하지 않고 再考를 요청했지만, 그의 정계은퇴 결심은 확고했다. 그는 칩거생활에 들어갔다.

『11월8일, 金大中씨가 내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합디다. 그래서 「나는 정계를 은퇴했는데, 黨을 깨고 나가 대통령 후보로 나서려는 사람이 나하고 얘기해서 뭐 하겠소」라며 거절했어요. 金大中씨는 11월22일 결국 「平民黨(평민당)」을 따로 맨들어 대통령 후보로 나서지 않았소』

李敏雨 총재는 야당에 힘을 모아 준다는 차원에서 정계를 떠났지만, 兩金의 「대통령病」은 치유불능이어서 결국 또다시 분열하여 민정당의 盧泰遇 후보에게 漁父之利(어부지리)를 주고 말았다.

『金泳三씨도 대통령 후보로 나서 11월14일 光州에서 연설을 하다가 달걀세례를 받고 나서 나한테 전화를 걸어왔습디다. 「(11월) 16일 서울로 올라가니 만나자」고 합디다. 그때도 나는 「이제 만나서 뭐 하겠소」라고 거절했어요』

仁石은 이렇게 날짜까지 기억하며 말머리를 이어갔으나 숨이 차 간간이 「아이구」하며 신음을 토하기도 했다. 인터뷰를 계속하기 어려웠다. 仁石 선생에게 하직을 고하고 병실을 물러나왔다. 아들 李相烈씨가 전송하러 뒤따라 나왔다. 그에게 정계은퇴 후 仁石이 어떻게 소일해 왔는지 물었다.


『나라 되어가는 모양이 걱정』

仁石과 부인은 3년 전 삼양동 산골에 있던 집을 처분하고 지금은 중랑구 묵동에 있는 46평 아파트로 이사하여 막내아들 내외와 함께 산다. 부인 金東粉 여사도 고령(82세)에다 당뇨병 등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편이다.

중병 앓기 전 仁石은 전직 국회의원들의 모임인 憲政會(헌정회)에 나가 옛 동지들과 만나거나 동년배의 고향친구 두 분과 자주 어울리기도 했다. 相烈씨는 『아버지가 병석에서도 자꾸 「나라가 큰일 났다」고 걱정하신다』고 전했다.

인터뷰 후 필자의 심경은 몹시 씁쓸했다. 1987년 당시, 時流(시류)에 휩쓸렸던 필자 같은 사람들은 제2인자를 인정하지 않았던 兩金의 독선적 정치행태를 바로 보지 못하고, 「李敏雨 구상」에 대해서만 몹시 비판적이었다. 대통령직선제―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것은 민주화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 大權을 향한 兩金의 방편으로 이용되었을 따름이다.

兩金은 「文民 독재자」, 「帝王的(제왕적) 대통령」이 되었지만 국정운영에는 무능함을 드러냈다. 심지어 그 아들들은 아버지의 집권 기간에 國政을 농단하고 돈에 탐닉했다. 兩金의 獨善(독선)이 만들어 낸 盧武鉉 정권은 이제 대한민국의 훼손작업을 그들의 역사적 사명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仁石 선생은 인터뷰에서 『나라 되어 가는 모양이 걱정』이라고 거듭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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