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한 해방둥이의 나이테] 대한민국 60년-우리들의 이야기

『앞으로 15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하니 童心으로 돌아가 청년들과 대화하자』

글 정순태 기자  2005-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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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西域(서역)의 타클라마칸 사막과 파미르 高原을 2주간 답사할 때의 일이다. 젊은 길동무들과 처음 만나 자기소개를 하는 자리에서 필자는 스스로를 「해방둥이」라고 일컬었다. 그냥 「1945년생」이라 말하면 혹시 길동무들이 세대차에 따른 어색함을 느끼지 않을까 ―이런 노파심에서 「해방둥이」 운운했던 것인데, 그로부터 길동무들에게 「동이오빠」라고 불렸다.

해방둥이는 2005년 중에 만 60세를 맞는다. 지난 60년 동안 우리 민족은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다. 이런 변화의 물결 속에서 「해방둥이」는 어떤 삶의 궤적을 그려왔는가―이것이 이 글의 話頭(화두)가 될 것이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1960년부터 1995년까지 35년간 年평균 경제성장률에서 세계 제1위인 7.1%를 기록했다. 이것은 민족사, 나아가 세계사에서 결코 경신되지 않을 대기록이다. 왜냐하면 세계 220개국 가운데 단 1년 만 1위를 차지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年평균 경제성장률에 있어 대한민국의 뒤를 잇는 나라들은 싱가포르(6.4%), 사이프러스(6.2%), 보츠와나(6.1%)와 같은 인구가 수십만 혹은 400만 이하의 도시국가 혹은 소국가들이다. 한국처럼 인구 5000만 규모의 국가가 경제성장률 上位에 랭크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의 통계에 따르면 2003년도에 대한민국은 6054억 달러의 가치를 생산(GDP: 국가 총생산량)하여, 경제규모에서 세계 220개국 가운데 제11위를 차지했다. 경제규모에서 대한민국은 미국(1위)의 18분의 1, 일본(2위)의 7분의 1에 해당하지만, 공산주의 宗主國이었던 러시아(GDP 4328억 달러)보다 크다. 한편 북한의 경제규모는 170억 달러(한국은행 통계)로 대한민국 경제의 3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170억 달러라면 인천市 경제규모보다 작다.

해방둥이가 軍복무를 끝내고 사회로 진출한 시기는 대략 1970년 무렵(大卒남자의 경우)이었다. 1970년 당시 대한민국의 GDP는 83억 달러에 불과했다. 해방둥이는 한국의 GDP가 급증하는 시기에 일한 대표적 세대이다.


해방둥이는 키가 작다

2003년 대한민국의 국민 1인당 소득은 1만2499달러로서 세계 제36위였다. 평균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들은 4만 달러가 넘는 룩셈부르크·노르웨이·스위스 등 인구 수백만의 소국가들이다. 경제규모가 큰 나라로서 높은 국민소득을 누리고 있는 나라는 미국·일본·영국 등으로 3만 달러 이상의 수준이다.

1960년의 한국인 1인당 국민소득은 방글라데시(東파키스탄)·잠비아·필리핀보다 낮은 80달러였다.

해방둥이로서 필자가 대표성을 가진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 글의 집필이 필자에게 맡겨진 이유는, 다만 30년 넘게 記者라는 관찰자의 역할을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해방둥이는 다른 세대에 비해 키가 작고 몸집도 갸름한 편이다. 거의가 태평양전쟁 말기에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식량배급 시절이라 해방둥이를 회임한 어머니들의 영양상태가 대체로 좋지 않았다. 따라서 해방둥이들은 「젖배」를 곯았다.

아기 시절의 필자는 젖이 많은 이웃집 아주머니만 보면 대번에 그 품속으로 파고들어 젖꼭지를 물었다고 한다. 물론 어머니에게 전해들은 얘기다.

2002년 일본 문부성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 남자의 평균 신장은 173.3cm로 세계 제24위이다. 한국인은 일본의 170.7cm, 중국의 169.7cm 등을 앞서는 아시아 국가 최고 순위에 있고, 유럽인에 비해서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

해방둥이들 중에서는 평균 키인 필자(168cm)는 요즘 청소년들과 함께 서면 그들의 턱 밑에 놓이게 된다. 요즘 우리 청소년들은 175cm는 되어야 키 작다는 소리를 듣지 않는다.

그러면 8·15 광복 당시 남한 사람보다 오히려 키가 컸던 북한 사람은 어떤가. 현재 북한 남성의 평균 키는 158cm로서 한국과는 무려 15cm의 차이가 나고 말았다. 金日成·金正日의 독재정치 아래에서 북한은 세계적으로 가장 키 작은 나라가 되었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해방둥이는 「해방 정국」의 혼란상이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등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들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해방둥이 나이로 여섯 살 때 6·25 전쟁이 발발했다. 6·25 전쟁은 해방둥이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필자는 1950년 6·25 전쟁 발발 당시 최후방인 부산에 살았다. 당연히 전쟁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다. 전쟁 직후 부산 동대신동의 동신국민학교에는 육군종합학교가 들어섰다. 육군종합학교에서는 「전쟁의 소모품」이었던 일선 소대장을 단기교육으로 양성했다. 필자는 그때 후보생들이 거리를 행진하며 부르던 군가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 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우리 또래들은 종합학교 후보생들이 행진할 때면 으레 뒤따라 다니며 그 비장한 군가를 복창했다.

그때 필자의 집과 부산사범학교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었다. 부산사범학교 건물도 징발되어 미군의 야전병원으로 사용되었다. 우리 집 장독대의 지대가 약간 높아 미군병원 마당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또래들은 우리 집 장독대에 모여 GI 動哨(동초)에게 「할로(헬로)」라고 말을 건넸다. 그러면 마음씨 좋은 GI는 레이션 박스 하나를 휙 던져 주기도 했다. 어느덧 우리들은 「쌩큐」, 「오케이」 정도의 말은 구사했다. 그때 미군은 아이들도 눈치 챌 만큼 물자가 풍부한 군대였다. 물자부족 시대에 살았던 우리는 GI들을 「산타클로스 할배」로 생각했다.

우리는 레이션 박스에 든 비스킷이나 통조림을 맛있게 먹어치웠다. 심지어는 단물을 다 빨아먹은 추잉검을 뱉을 줄 몰라 그대로 꼴깍 삼키기까지 했다. 그때 우리가 의문 품었던 것 중 하나는 작은 종이 봉지에 든 커피였다. 혀끝으로 핥다가 그 쓴맛에 질겁했다. 피란민들 중에는 미군부대의 음식 찌꺼기를 끓인 「꿀꿀이죽」으로 연명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미군 주둔 이후 동네 할아버지들은 풍기문란을 몹시 걱정했던 것 같다. 주택가인 우리 동네에서 당시 국내 제1의 도떼기시장인 국제시장으로 가려면 보수동의 「검정다리」를 건너야 했다. 「검정다리」 건너편에는 「챠라 할배」가 무시로 출몰했다. 「차랴 할배」는 높은 갓에 도포 차림에다, 손에는 지팡이까지 들고 있었다.

당시 젊은 여성들에게 「챠라 할배」는 「공포의 규율부장」이었다. 좀 멋쟁이 여성을 만나기만 하면 「챠라 할배」는 지팡이를 그녀의 코끝에다 거의 닿을 정도로 들이밀며 『꼬시랑(파마) 머리 치아라(치워라)』든가, 『몽당(짧은)치마 치아라』라고 호통을 쳤다.

당시 서른 살이던 어머니조차 「챠라 할배」와의 조우를 겁내 검정다리를 피해 경남도청 앞길로 우회하여 도떼기 시장에 다닐 정도였다. 그때 그 「챠라 할배」가 지금 만약 부활한다면 거리에 흘러넘치는 젊은 여성들의 「배꼽티」를 보고 과연 뭐라고 할까. 아마 그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기절초풍을 할 것이다.

1950년 늦가을, 필자는 아버지(당시 공무원이었다)의 근무지였던 대전으로 기차를 타고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아직 위험하다면서 가족들의 北上을 반대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3남매를 이끌고 부산역에서 기차를 탔다.

그러나 웬일인지 우리 가족 4명은 대구역에서 하차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 당시 부산에서 대전까지 직행하는 기차는 없었던 같다. 대구역 가까이에 있던 여관방에서 어머니와 3남매는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아침 대구역으로 나가 기차를 탔다.




『아버지, 우린 집이 없어 불날 염려 없지요』

그때 필자는 왜관을 지나면서 기차 차창 너머로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왜관 철교 이쪽저쪽 도로변에 새카맣게 불탄 敵의 탱크 수십 대가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우리 꼬마들에게도 敵의 탱크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나는 1951년 4월 초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대전 삼성국민학교였다.

그때 국민학교 저학년 아이들의 최고 사치품은 어깨에 메고 다니는 책가방 「란도셀」이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책과 공책을 책보에 싸서 허리에 질끈 동여매고 등·하교를 했다.

그해 6월25일,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 대전의 중심가를 관통하는 하천을 연결하는 목척교 부근 4, 5층쯤으로 기억되는 한 건물의 옥상에서 종이가 살포되고 있었다. 건물 옥상의 확성기에서는 무슨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람에 휘날리며 떨어지는 종이를 줍고 보니 거기엔 「6·25의 노래」 악보와 가사가 적혀 있었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확성기 노래를 따라 불러 보니 가사와 곡이 모두 마음에 쏙 들었다. 그날부터 우리 꼬마들의 레퍼토리엔 「6·25의 노래」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때까지 우리 또래들의 인기 넘버 제1위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로 시작되는 「전우야, 잘 자라」였다.

그해 한반도 중부지방에는 예년보다 훨씬 비가 많이 내렸다. 늦여름쯤, 대전시내 곳곳에서 물난리가 났다. 시가지 복판을 흐르는 하천 양쪽엔 높은 둑이 축조되고 그 둑 아래에 우리 집이 있는데, 급속한 증수로 인해 범람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도 우리 또래들은 둑 위에 올라앉아 물난리 구경에 정신을 팔았다. 초가집이 그대로 떠내려 왔다. 그 지붕 위에 돼지·개·닭 등 가축이 올라앉아 하류 쪽으로 표류해 가기도 했다. 사실 그때 우리나라 산은 헐벗어 나무가 없었다. 웬만큼만 비가 와도 물난리가 나게 마련이었다.

물난리 前 목척교 밑 교각에 잇댄 움막을 짓고 생활하던 걸인들이 되돌아와 그들의 보금자리를 재건했다. 그때는 화재도 자주 발생했다. 물난리 직후 무슨 잡지에 실린 짧은 풍자만화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깡통을 든 걸인 父子가 불구경을 하고 있다가 아들이 『아버지, 우리는 집이 없으니 불날 염려가 없지요』하고 묻는다. 아버지는 『그게 다 아비 덕택이란다』라고 답한다.

이웃 사람과 마찬가지로 우리 식구들도 보리밥·콩밥을 많이 먹었다. 요즘엔 건강을 위해 일부러 잡곡밥을 먹지만, 그때는 하얀 쌀밥이 몹시 그리웠다.


「읍사무소」를 「씀사무소」로 읽은 까닭

필자는 1952년 봄에 전라북도 김제군 김제읍에 있는 김제중앙국민학교로 전학했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전근 때문이었다. 그때 필자는 창졸간에 전학한 상황이라 「전학통지서」 같은 구비서류도 갖추지 못했다. 아버지와 함께 교장실에 들어갔더니 교장선생님이 벽에 붙어 있던 「교훈」을 한번 읽어 보라고 해서 좀 더듬거리며 읽었더니 「2학년 자격」을 인정해 주셨다.

「문제」는 학급에 배치되고 난 뒤에 발생했다. 담임선생님은 우리 반 아이들에게 「정순태」를 소개한 다음에 국어수업에 들어가면서 교과서를 낭독하라고 지명하셨다. 내가 읽어야 할 부분은 국어교과서의 「읍사무소」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필자는 벌떡 일어나 두 손을 앞으로 쭉 뻗은 자세로 국어교과서를 들고 목소리도 우렁차게 「씀사무소」라고 읽었다. 처음에 급우들은 좀 어리둥절했던 같다. 그런데 본문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씀사무소」라고 읽자 교실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필자는 창피하면서도 억울했다. 당시는 「하였읍니다」라고 써놓고 「하였씀니다」라고 읽던 시절이었다. 그렇다면 「읍사무소」도 「씀사무소」로 읽어야 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터였다. 그로부터 40여 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필자의 「억울함」이 풀렸다. 1990년대에 한글맞춤법을 개정하면서 「하였읍니다」의 표기가 「하였습니다」로 되었다.

그때 우리 교실에는 책걸상이 없었다. 아이들은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수업을 받았다. 그래도 당시 교육의 질이 낮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때의 아이들은 모험심이 상당히 강했다. 들짐승이 돼지를 물어갔다고 해서 동네 아이들끼리 작당하여 야밤에 매복 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때 우리들은 호랑이라도 때려 잡을 듯한 기백이 있었다.

38선에서는 치열한 陣地戰(진지전)이 전개되는 가운데 휴전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당시 李承晩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외치며 휴전을 반대했다. 우리 아이들도 붓글로 「휴전 반대」라고 쓰인 완장을 차고 김제역 앞 광장 집회에 나가 『물러가라 체코, 폴란드』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솔직히 말해 우리들은 그때 「휴전」이 무엇인지, 「체코」, 「폴란드」가 어떤 나라인지 몰랐다.

「휴전」의 정확한 뜻은 이웃집 중학교 1학년 형도 잘 몰랐다. 「체코」와 「폴란드」는 당시 「중립국 감시위원단」의 멤버였는데, 당시 그들이 소련의 위성국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입국을 거부했던 것이다.

당시 국민학교 아이들은 요즘과는 달리 학교에 월사금을 납부해야 했다. 워낙 가난했던 시절이어서 월사금 몇 달치를 내지 못한 아이들도 많았다. 늦여름의 어느 날, 담임선생님은 월사금을 못 낸 아이들에게 「월사금 받아 오라」면서 월사금을 낸 아이 하나를 딸려 집으로 돌려보냈다.

필자는 당시 반에서 가장 싸움을 잘 하는 두봉이와 그의 집으로 동행하게 되었다. 두봉이의 집은 20여 리 밖에 떨어져 있었다. 산 넘고 물 건너 그의 집에 도착한 시각은 점심때가 훨씬 지나 있었다. 바쁜 논일을 하고 있던 두봉의 아버지는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당시엔 하루 세 끼를 챙겨 먹기가 어려웠다. 「들일」을 하는 사람만 아침밥과 저녁밥 사이에 「참」을 먹는 정도였다. 두봉이는 자기 집에 남고 나만 배고픔을 참으면서 다시 20여 리 길을 혼자 걸어 학교로 되돌아왔다. 우리 반 아이들은 이미 모두 하교했고, 담임 박창순 선생님만 남아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당시 우리 또래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서도 성탄절에는 으레 교회에 갔다. 그때 교회에서는 그런 우리들에게도 섭섭지 않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 최빈국이었다. 고아도 흘러 넘쳤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부자 나라에서는 불쌍한 한국 아이들을 위해 구제품을 많이 보냈다.


「공비 총두목」 李鉉相 사살에 환호

1953년 3학년 2학기 때 필자는 김제중앙국민학교에서 全北 남원 용성국민학교로 전학했다. 남원읍에는 지리산 공비들을 토벌하는 군·경 부대가 주둔해 있었다.

당시 우리 아이들 사이에서도 「공비 총두목 사살」이 단연 화젯거리였다. 1953년 9월21일 「남부군」 총사령관 李鉉相(이현상)이 지리산 빗점골 무명고지에서 전투경찰부대의 공격을 받고 도주 중 사살되었던 것이다. 李鉉相 시신 사진이 공개되었는데, 그는 미군 군복바지, 하얀 러닝셔츠, 운동화 차림이었다. 사살 당시에 입었던 옷 그대로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아무튼 우리 또래들은 환호했다.

시절이 시절이었던 만큼 꼬마들끼리도 동네싸움을 자주 벌였다. 1954년 초겨울의 일요일 아침, 우리 동네(東春洞) 꼬마들과 옆 동네 꼬마들 사이에 눈싸움이 벌어졌다. 처음의 사소한 눈싸움은 점점 확대되어 내일모레 장가들 청년들까지 가세한 石戰이 되었다. 양측 모두 자기 동네와 우호관계에 있는 동네에 원병을 요청했던 것 같다.

양편은 모두 연합군을 형성하여, 남원방송국 앞 너른 벌판에서 大會戰을 벌였다. 싸움의 양태가 이쯤에 이르자 우리 또래들은 일선에서 물러나 후방에서 돌을 모아 앞으로 나르는 병참대의 역할을 했다. 다음날 학교에 가보니 머리가 터져 붕대를 감고 등교한 아이들이 수십 명에 달했다. 그때는 상무정신이 강조되던 시대여서 그런지 부상자가 속출한 전투 유사행위를 벌였음에도 별 말썽은 생기지 않았다.

봄이 되면 춘궁기다. 아이들이 먹을 것을 찾아 산야를 헤매었다. 우리 또래 예닐곱 명은 삽과 곡괭이를 들고 동네 멀리 칡을 캐러 다녔다. 그러다가 사고가 났다. 칡 줄기를 잡고 있는 내 손을 또래 하나가 잘못 겨냥해 내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후려친 것이다. 거의 떨어진 엄지손가락을 붙잡고 필자는 달렸다. 아이들도 달렸다. 집을 향해 10리쯤 달리다 보니 마침 軍 야전병원이 보였다. 야전병원에서는 군의관과 간호병들이 즉각 봉합수술을 해주었다. 물론 치료비는 무료였다.


자장면이 제일 맛있던 시절

1954년 봄에 우리 집은 고향 부산으로 다시 이사를 했다. 우리 가족들은 모두 트럭의 운전석에 타고 장남인 나만 트럭의 짐칸에 탔다. 함양의 육십령 고개를 넘어올 때 엄청 추웠다.

필자는 당시 전국적으로 소문난 「부자학교」에 전학했다. 입학시험을 쳐서 한 학년에 2개 학급의 학생만 입학시키는 학교였다. 오늘날 우리나라 재벌 제1위와 제2위의 회장 등이 모두 이 국민학교 출신이다. 4학년 아이의 편견일 수도 있지만, 당시 필자는 「부자학교」의 교사들이 자기희생적인 시골학교 은사들보다 못하다고 느꼈다.

「부자학교」에서 시골티가 물씬했던 필자는 곧 외톨이가 되었다. 그러다 보면 시쳇말로 「왕따」를 당하거나 얻어터지게 마련이었다. 학업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복수전」을 위해 싸움 연습에만 골몰했다. 웬만큼 「실력」을 쌓은 뒤 나를 가장 괴롭히던 우리 반의 싸움 랭킹 제3위에게 도전을 했다가 코피를 먼저 흘리는 바람에 구경꾼들로부터 「졌다」는 판정을 받았다.

「부자학교」에서는 매일 필기시험을 쳤다. 어머니는 우리 형제의 학업열의를 북돋워 주려고 『100점을 받기만 하면 자장면을 한 그릇씩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우리들에게 제일 맛있는 음식은 자장면이었다. 그러나 「100점」은 당시 필자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두 살 아래 동생이 간혹 100점을 받았다. 그럴 때면 형제가 함께 자장면을 사먹으러 갔다. 중국음식점의 자장면 한 그릇 값은 동대신동 시장의 난장에서는 자장면 두 그릇 값에 상당했다. 시장통의 값싼 자장면도 맛있었다.

1957년, 해방둥이 가운데 올배기들은 중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2학년 때 필자는 정학을 당할 뻔했다. 그때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당시 중·고등학생들은 학교 단체관람이 아니면 영화관에 갈 수 없었다. 어느 날 부산 동아극장에서 「잃어버린 사막」이라는 영화를 단체로 관람했는데, 교육적이지만 재미는 없었던 영화였다. 우리는 영화 이름을 「잃어버린 80환」이라고 불렀다. 단체 할인 입장료가 80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사막」은 꼭 「잃어버린 80환」만은 아니었다. 그 영화의 예고편이 우리를 자극했다. 스토리 전체는 알 수 없었지만, 예고편을 보건대 남자 학생이 여교사를 연모하는 내용이었다. 영화 속의 남학생은 여교사가 칠판에 글을 쓰기 위해 돌아서기만 하면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더듬는 몸짓 흉내를 내고 있었다.

사춘기의 우리가 그런 장면을 놓칠 리 없었다. 다음날 국어시간이었다. 그날 우리 반 아이들은 여선생님(참 젊고 수려한 분이었다)이 칠판을 향해 돌아서기만 하면 영화 속의 학생처럼 여선생님의 몸매를 더듬는 시늉을 하다가 그것이 그만 발각되고 말았다. 여선생님은 얼굴이 새빨개져 수업을 중단하고 출석부를 챙겨 교무실로 가버렸다.

이제 경을 칠 일만 남았다. 지은 죄가 있는지라 모두 숨을 죽이고 있는데, 「GMC(군용 트럭)」라는 별명을 지닌 우리 반 담임선생이 불같이 화를 내며 교실 문을 열었다. GMC선생은 주모자가 누군인지 추궁했다. 상균이라는 친구와 필자가 자발적으로 앞으로 나갔다. GMC선생은 시계를 교탁 위에 풀어놓고 주먹으로 우리 둘의 뺨을 후려쳤다. 둘은 제법 많은 코피를 쏟았다.

그러고 나서 『집에 가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학교로 모셔오라』고 엄명했다. 이런 자초지종을 아버지는 물론이고 어머니에게도 털어놓을 염치는 없었다. 나는 뺨이 시뻘겋게 부은 연유를 묻는 어머니에게 그냥 『싸웠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다음날엔 책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기는 했지만, 학교로 가지 않고 용두산 공원에 올라가거나 영도다리 부근에서 얼쩡거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우리 둘은 이틀 후 GMC선생의 「용서 방침」을 전해 듣고 다시 등교했다.


中3의 눈에 비친 自由黨 정권의 末期

당시 대통령은 李承晩(이승만) 박사였다. 자유당 정권은 李承晩의 종신집권을 위해 우상화 작업을 전개했다. 학교에선 전교생을 강당에 집결시켜 『우리나라 대한나라 독립을 위해 여든 평생 한결같이 몸 바쳐 오신 고마우신 우리 대통령, 우리 대통령』 운운의 「대통령 찬가」를 가르쳤다.

중3 여름방학 때인 1959년 7월31일, 송정해수욕장 캠핑을 갔다가 귀갓길에 대교동 소재 국제신문사 앞길을 지나치다가 「曺奉岩씨 사형집행」이라는 제목의 벽보를 목격했다. 曺奉岩씨는 1956년 대통령선거에 진보당 후보로 출마하여 216만여 표를 얻어 자유당 정권이 위협을 느낀 진보적 정치인이었다. 中3의 눈에도 그것은 정치보복으로 느껴졌다.

그해 추석날, 부산지방은 사상 최대의 태풍 「사라」에 강타당했다. 우리들은 모금함을 들고 거리로 나갔다. 모금함에 의연금을 넣는 사람들에게는 빨간 헝겊으로 만든 리본을 하나씩 달아주었다. 리본은 우리들이 전날에 만든 것이었다.

의연금은 그런대로 잘 걷혔다. 그때 우리들은 어떤 어른에게 다음과 같이 몹시 거북한 말을 들었다.

『공부 안 하고 왜 이런 짓을 하나. 너희들이 모은 의연금이 수재민들에게 가지도 않을 것이다』

자유당 말기 우리 사회는 몹시 부패했다. 그래도 우리가 모은 의연금은 전액 수재민들의 구휼에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아직도 믿고 있다.

1960년, 생일이 빠른 해방둥이들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런 상황에서 3·15 부정선거가 자유당 정권에 의해 강행되었다. 이를 규탄하는 시위가 경북高 등 고교생들의 궐기로 대구에서 먼저 일어났다.

학생시위는 전국적으로 번졌다. 마산의 시위가 가장 치열했다. 마산商高에 합격한 남원 출신 김주열군의 시체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마산 앞바다에서 인양되자 시민들이 불끈했다. 4월19일 서울에서는 시위하던 학생들과 시민들이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몰려가다가 진압경찰들에게 총격을 당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때 부산에서는 동래高·부산高·데레사女高 등 고교생들의 시위가 눈에 두드러졌다.

경찰서와 파출소, 親자유당 신문사는 습격당했다. 자유당 국회의원의 집들도 과격 데모대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부산 영도 출신 국회 상공위원장이던 李의원 집은 방화되었다. 그 집 담벼락을 장식하던 실장미가 불에 타고, 주인 대신에 집을 지키던 맹견 불독은 과격분자들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용감한 공직자도 눈에 띄었다. 부산 영도경찰서장은 데모대가 몰려오자 정문 앞에 꿇어앉아 『저 같은 사람이야 맞아 죽어도 좋지만, 국가재산인 경찰서는 불태우지 말라』고 호소했다. 거친 데모대들은 그 서장의 말을 듣고 감격한 나머지 경찰서 건물을 파괴하지 않고 물러갔다.

4월26일, 李承晩 대통령이 下野했다. 데모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던 우리 학교 학생들은 면목이 없었다. 우리 학교 학생 중 일부는 시내버스 몇 대를 「강제 징발」하여 뒤늦게 마산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것은 「사또 행차 뒤의 나팔」이었다. 보람도 없이 부산으로 되돌아오다 버스에 실린 채로 우리들은 부산계엄사령부가 설치된 군수기지사령부 연병장으로 연행되었다. 그때 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은 朴正熙 소장이었다. 학생대표가 계엄군 측과 교섭을 벌여 우리는 겨우 풀려났다.


여성들의 복창, 『입으나 마나』

그해 7·29 총선에서 민주당은 압승했다. 민주당 新派와 舊派는 내각제下의 집권자인 국무총리 자리를 놓고 날카롭게 대립했다. 결국 新派의 張勉(장면)씨가 국무총리가 되었다.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민주당 舊派는 탈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했다. 당시는 날이 새도 데모, 날이 저물어도 데모였다. 사회는 극도로 혼란했다.

1961년 등굣길에 부산시청 앞에 탱크 두 대가 진주해 있었다. 그날 사회과목 시간에 우리들은 담당 선생님에게 『군부 쿠데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대단히 조심스럽게 답변하셨다. 답변의 요지는 『좀 시간을 두고 관찰해 보자』는 정도였다.

그때 부산의 계엄군은 사회기강을 잡는다며 거리로 진출했다. 그해 여름엔 여성들의 옷차림까지 단속했다. 예컨대 소매가 없는 블라우스를 입은 여성 등을 길 한편에다 연행하여 『입으나 마나』를 복창하게 했다. 그런 가운데 차츰 사회질서가 잡혀갔다.

1963년 3월 우리 해방둥이 일부는 고교를 졸업했다. 필자는 대학입학시험을 치기 위해 상경, 국민학교 때의 단짝 친구 집에서 묵었다. 그때 필자는 친구와 함께 기거하면서 며칠 수험준비를 했는데, 세 가지 신기한 것을 접했다. 단짝의 부친은 당시 모 시중은행의 중역이었다.

친구 집에서 TV의 「시험방송」을 처음 청취했고, 「삼양라면」을 처음 맛보았으며, 「영진구론산」을 처음 마셔 보았다. 세 가지 경험은 모두 필자에게 대단한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야 어떻든 둘은 모두 大入에 낙방했다. 다음해인 1964년 단짝과 필자는 둘 다 같은 대학에 합격했다. 어떻든 그해 우리 대학의 1학년 다수는 해방둥이였다.


40년 뒤의 6·3 데모 평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韓日회담 반대 데모가 연일 벌어졌다. 필자는 학내 집회나 연좌데모의 단골 참석자였다. 심지어 밤샘 농성에도 참가했다. 무슨 특별한 정치의식이나 열성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숙집에 무료하게 죽치고 있기보다는 농성현장에서 또래들과 어울려 바둑도 두고 잡담도 하는 것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간혹 가두로 진출하여 경찰 진압대와 부닥치기도 했다. 그러나 시위 대학생들이 요즘처럼 사납지 않고 맨손이었던 만큼 진압대도 대학생들을 험하게 다루지는 않았다. 경찰서에 붙잡혀 갔던 대학생들은 대개 훈방 조치되었고, 주모자 몇 명만은 지명수배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러 대학교 데모대는 서울 중구 태평로 국회의사당(현재 서울시의회 청사로 사용됨)까지 진출했다. 그로부터 시위가 차츰 격렬해졌다. 드디어 6월3일, 게엄령이 발동되어 학교는 휴교에 들어갔다. 그래서 국교정상화를 위한 韓日회담 시기에 대학 재학 중이던 사람들을 「6·3 세대」라고 부른다. 우리 해방둥이는 6·3 세대의 막내쯤에 해당한다.

2003년 가을 어느 날의 일이었지만, 「6·3세대」 중 서울시내 3개 대학교 출신 40명이 저녁을 함께하며 토론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당연히 주제는 「韓日 국교정상화에 대한 역사적 평가」였다.

참석자들이 이제는 반백의 머리가 되어서 그런지 모두들 신중했다. 그때 「6·3 세대」가 들고 일어나지 않았다면 韓日협정이 더욱 굴욕적이 되었을 것이라는 데 견해를 함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그때의 韓日 국교정상화는 시의적절 했다』는 쪽으로 의견의 모아지고 있었다. 對日청구권자금이 「수출입국의 종자돈」이 되었기 때문이다.

2002년 대한민국은 1625억 달러를 수출, 세계 제12위의 수출국에 올랐다. 2004년 10월 현재 2000억 달러의 수출을 돌파하여 연말에는 24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었다. 한국은 1964년 수출실적 1억 달러를 돌파하면서 세계 90위를 기록했었다.


무장 공비 때문에 고된 軍생활

우리들은 대학 재학 중 한 해도 정상수업을 받은 적이 없다. 데모와 휴강이 잦았다. 당시 대학생은 동년배 전체의 3% 정도에 불과했다. 중학교나 고등학교 졸업 직후 산업체 등에 취업, 低임금 구조 아래에서 땀 흘려 일하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당시 대학생들 중에는 상당수가 그런 동년배 노동자들에 대해 사회적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필자는 1968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3월에 육군소위(ROTC 6기)로 임관되었다. 우리는 광주에 있던 전투병과사령부 예하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했다. ROTC 6기가 광주보병학교에서 받은 3개월간의 교육은 예년과 달랐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그해 1월, 북한 특수부대 124군 소속 김신조 일당이 서부 전선을 뚫고 남하, 청와대 바로 앞까지 진출한 1·21 사태가 발생했다.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전향하여 목사가 됨)는 방송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대자 서슴없이 『朴正熙의 목을 따러 왔다』고 외쳤다. 김신조 일당의 침투속도는 가히 놀라웠다. 124군부대의 훈련방법을 조사한 결과, 그들은 구보와 산악행군을 많이 한 것이 드러났다. 더욱이 김신조 등은 모래를 넣은 주머니를 발목에 감고 구보했다고 자백했다. 그 바람에 보병학교 피교육자들도 모래주머니를 차야 했다.

보병은 「3보 이상 구보」이다. 우리는 학과출장 등의 이동 간에 무조건 뛰어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체형에 맞춘 보병의 기본 화기 M1총도 너무 무거웠다. 지대가 떨어져 나간 고물 철모는 구보 중 머리에 고정되지 않고 전후좌우로 왔다갔다 하는 통에 참으로 애물단지였다.

우리는 3개월간의 교육기간 중 광주에서 압록강변까지 왕복하는 거리를 달린 셈이었다. 교육을 마칠 무렵, 우리들은 단독 군장을 풀고 체육복과 운동화 차림의 간편한 복장으로 30리를 달렸는데, 전혀 숨이 가쁘지 않았다. 100리라도 이렇게 달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우리도 제법 야생동물로 변해 있었다.

보병학교를 마친 ROTC 6기생 대부분은 최전방으로 올라갔다. 1·21 사태 때문에 복무기간이 3개월 연장된 ROTC 4기생들은 우리가 올라가서야 예편하기 위해 각자의 진지로부터 내려왔다. 곧 제대할 4기생들은 곧 소대장 근무에 들어갈 6기생들에게 『봉급을 받으면 주보(PX)에 가서 빵을 좀 사다가 소대원들에게 회식을 한번씩 열어 주세요』라고 당부했다.


『義擧入北하면 고깃국과 이밥을 주겠다』

드디어 6월 말, ROTC 6기 소대장들은 자기 근무지를 찾아갔다. 필자의 보직은 보병 제○○연대 제2대대 제8중대 제2소대장이었다. 우리 소대는 서부전선 ○○川 인근 철책선 정면 500m를 지키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선임하사 이하 41명의 소대원들이 땅속에 파고 들어간 소대 막사 옆에 정렬하여 소대장 취임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놀랐다. 소대원들의 군복이 매우 허술했기 때문이었다. 해진 자리에 천을 잇대어 기웠는데, 그 기운 자리 위에 또 천을 대어 기운 군복을 입고 있었다. 1968년, 그 무렵 철책선 근무 병사들의 모습은 그렇게 비참했다. 한창 먹을 때이기도 했지만 병사들은 배고픔에 허덕이고 있었다.

철책선에서는 소대 단위로 취사를 했다. 당장은 어떻게 하면 상급부대의 보급과에서 육군 정량대로 주·부식을 받아내야 하느냐가 문제였다. 나는 상급부대의 보급추진 트럭이 소대 부근에 들어올 때마다 그곳으로 내려가 기어이 우리 소대의 정량을 받아내는 데 노력했다. 당시 육군 소위의 월급은 1만원. 자기 월급을 거의 다 소대원을 위한 회식비, 즉 빵값으로 쓰는 해방둥이 소대장들도 더러 있었다.

북한 측은 확성기 방송을 통해 병사들에게 『의거入北하면 고깃국에 이밥을 먹고 기와집에서 살도록 해주겠다』고 선동했다. 심지어 『ROTC 6기 소대장 여러분의 부임을 환영합니다. 공화국 북반부로 오시면 모스크바 유학을 보내고…』 운운하는 방송을 보내기도 했다.

그 무렵, 敵 무장 게릴라에 의해 철책선이 뚫리는 사고가 자주 발생했다. 우리 연대 예하 소대는 야간 2교대로 철책선을 지켰다. 밤 11시부터 새벽 2시 사이에는 소대 전원이 철책선에 달라붙었다. 그러면서도 낮에는 진지 및 교통호 보강공사, 射界청소(철색선 앞 제초작업) 등으로 거의 쉬지 못하고 작업을 강행했다. 조명지뢰와 크레모어도 설치했다.

철책선 근무는 고통스러웠다. 장대비가 쏟아져도 우의를 입을 수 없었다. 비를 맞고 참호 속에 들어가 있으면 한여름에도 몹시 추웠다. 敵 게릴라와의 교전도 가끔 벌어졌다. 철책선 소대장 근무를 3개월쯤 하고 있을 무렵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연대 주둔지 마을까지 면회를 왔다. 그 덕에 30리 후방의 민간인 동네를 처음 구경할 수 있었다. 이제 막 닭다리 하나를 뜯으려는 참인데, 전령 하나가 달려와 『상황이 벌어졌다』고 알렸다.

스리쿼터를 타고 대대OP로 달려갔다. 대대OP 앞마당에는 敵의 무장간첩 5명의 시체가 정렬되어 있었다. 이미 「상황 끝」이었다. 대대장 얼굴 보기가 매우 민망했다.

대대 OP를 나와 소대로 돌아갔다. 소대원들 보기는 더욱 민망했다. 소대장이 외출 중이어서 상황이 벌어졌어도 경계임무만 부여되는 바람에 소대원들로서는 戰功을 세울 기회를 놓쳤던 셈이다. 당시 戰功을 세운 병사들은 헬기를 타고 포상휴가를 가는 등의 특전을 받았다.


1990년대의 추락

필자는 1970년 6월 말 육군 중위로 예편하고 취업전선에 나섰다. 1971년 1월 수습기자 입사시험을 통해 신문사에 입사했다. 입사동기생 3명은 모두 해방둥이였다

기자생활 10년 만에 동기생 3명 중 2명이 新軍部에 의해 해직당했다. 강제 해직의 사유는 1980년 봄 「신문제작 거부 운동」이었다. 그때 필자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한동안의 실업자 생활을 거쳐 민간연구소에 취업했는데, 그곳이 정부 산하기관으로 전환되는 바람에 사표를 썼다. 그 후 자유기고가가 되어 이런저런 잡지에 글을 기고했다.

1984년 11월, 나이 마흔에 언론계로 복귀했다. 1980년에 쫓겨난 신문사는 아니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현재까지 언론사는 여러 번 옮겼지만, 대체로 월간지의 기자로 일해 왔다.

1960년대 후반 이후 우리 경제는 수출이 주도했다. 1970년의 수출은 섬유·합판·가발 등 경공업품이 主를 이루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 의류·철강판·선박 등으로 경공업제품과 화학공업제품이 비중을 차지했다. 1990년 이후에는 반도체·선박 등 중화학제품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수출 구조가 변화했다. 2003년의 수출품목에는 반도체(1위), 무선통신기기(3위), 컴퓨터(4위) 등이 상위를 차지해 첨단산업 부문의 성장 정도가 수출구조에 반영되어 있다. 자동차는 제2위의 수출품목이 되었다.

가만 생각하면 우리 해방둥이는 「닭띠」라서 그런지 대체로 입바른 소리도 잘하고 오기도 좀 있는 것 같다. 이런 성격으로 격동기를 넘어왔으니 인생의 굽이굽이에서 가볍지 않은 內傷(내상)을 입었던 것 같다. 그런 해방둥이가 2005년 중에 모두 만 60세가 된다. 해방둥이도 이제 우리 사회에 대해 할 말은 해야 할 연령이다.

1990년대 이후 최근 15년 동안의 기록만 본다면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年평균 4%대로 떨어졌다.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었던 국가가 이제는 中성장국가로 전락했다. 그 책임은 이 기간에 집권했던 金泳三, 金大中, 盧武鉉 정권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최근 별세한 1980년대의 신민당 총재 李敏雨(이민우) 옹은 필자와의 생애 마지막 인터뷰에서 『과거 야당 하던 사람이 정권을, 나라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아 부끄럽다. 우리는 한 일이 없어』라고 한탄했다(月刊朝鮮 2004년 12월호 참조).

세계경제포럼(WEF)의 2004년 국제경쟁력 지수에서 한국은 세계 29위에 있다. 2003년의 18위에서 11단계나 하락한 것이다. 국제경쟁력 지수는 경제환경, 公共제도의 경쟁력, 그리고 과학기술 능력 등 3개 항목을 측정하여 평가한 것으로 중장기적 경제성장 가능성을 가늠하는 지표이다.

한국의 국제경쟁력 지수는 2003년 5.07이던 것이 2004년 4.90으로 곤두박질했다. 이것이 盧武鉉 정권의 성적표이다. 정치부문은 경제수준이나 삶의 질 수준과 비교해 볼 때 더욱 낮은 수준이다. 2004년 국제경영개발원(IMD)가 조사한 세계 국가의 정치안정성에서 대한민국은 10점 만점에 3.75의 수치로 세계 55위를 기록했다.

盧武鉉 정권의 단점은 독선적이라는 데 있다. 현재 盧武鉉 정권은 비판언론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언론 관계법의 개악을 기도하고 있다. 이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언론을 길들이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프리덤 하우스의 2004년 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언론자유는 東티모르, 피지와 함께 세계 제68위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한편으로 낙관한다. 대한민국 국민의 지능(IQ)지수는 홍콩(107)에 이어 세계 제2위인 106이다. 2004년 고교 1학년 학력조사에서도 핀란드에 이어 제2위를 차지했다. 핀란드나 홍콩은 인구 수백만의 소국가 또는 도시국가 수준인 만큼 대한민국 국민이 세계에서 제일 머리 좋다고 자부해도 어색하지 않다.


이제는 청년들을 가르쳐야

2004년, 우리나라의 지니計數는 조사대상 127개 국 중 27위를 차지했다. 지니계수란 家計의 소득분포가 완전히 평등한 상태를 0으로 상정해 산출하는 것으로 지수가 높을수록 불평등의 정도가 높아 富益富 貧益貧의 현상이 심화됨을 의미한다.

한국의 지니계수는 31.6으로 프랑스(32.7), 영국(36.0), 이탈리아(36.0), 미국(40.8)보다 분배가 오히려 잘 되어 있다. 그렇다고 개선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盧武鉉 정권의 「江南 죽이기」는 논리적 근거도 없는 포퓰리즘의 대표적 사례다. 盧武鉉 정권의 주요 정책은 「江南 죽이기」 이외에도 「서울大 죽이기」 「朝·中·東 죽이기」 등에서 보이듯, 생산성은 지극히 없으면서도, 근시안적이며, 敵과 아군을 갈라 사회분란을 야기하는 단점을 드러낸다.

2004년 上海교통대가 조사한 「대학 경쟁력 수준」을 보면 대한민국은 세계 100위권內의 대학이 하나도 없다. 오직 서울大가 200위권 안의 유일한 대학으로 평가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 서울大를 하향 평준화하려는 발상은 대한민국의 경쟁력을 죽이려는 무모한 짓이다.

이제 해방둥이는 역사를 후퇴시키는 선동정치의 폐해를 경험으로 깨닫게 되었다. 해방둥이는 체험을 통해 터득한 지혜를 활용, 젊은이들이 선동정치를 거부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해방둥이의 의무이며 애국이다.

2004년 세계보건기구(WTO)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수명 75.5세(남자 71.8세, 여자 79.4세)다. 국가별 평균 수명을 보면 일본이 81.9세로 세계 1위이고, 한국은 24위이다. 해방둥이는 앞으로 15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한다. 우리나라 국민의 고령화 추세를 보면 평균수명은 더 늘어날 것이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2003년 현재 해방둥이는 37만4426명(남자 18만7138명, 여자 18만7288명)으로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0.78%를 차지한다.

농업사회로부터 산업화시대로, 다시 정보화 사회까지 경험한 해방둥이들은 빠른 시대적 변화에 맞춰 가려고 심신을 마모시키면서 노동시간도 가장 길었던 세대이다. 나라 발전에 혼신의 힘을 다한 해방둥이들에게 영광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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