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소년기의 추억을 무너뜨린 영화「황산벌」을 보고

민족사의 가장 장엄한 장면을 코미디로 만들어서까지 꼭 돈을 벌어야 하나?

글 정순태 기자  2004-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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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은 지난 50년 동안 시나브로 필자의 話頭(화두)가 되어 왔다. 필자는 황산벌을 다섯 번쯤 답사했다. 적어도 세 번은 황산벌이라는 역사의 현장을 놓고 깊게 고민했다. 그런 경험은 조금 뒤에 털어놓으려 한다.

그보다 먼저, 화제의 영화 「황산벌」을 본 느낌부터 말하고 싶다. 『쉬지 않고 관객을 웃기려고 만든 영화』라고 하던데,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경험한 황산벌은 영화 「황산벌」과는 달리 언제나 사무치도록 장엄한 「역사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황산벌」에선 삼국통일의 주역 金春秋-金法敏(뒤에 문무왕)-金庾信 3인이 모두 어릿광대였다. 흔히 할리우드라면 「돈(흥행)만 된다면 무슨 영화든 다 만든다」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할리우드라 할지라도 「美國 건국의 세 아버지」 워싱턴-제퍼슨-프랭클린을 한 묶음으로 싸잡아 피에로로 등장시키는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겠는가, 만약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면 미국인들의 정서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이제, 황산벌과 필자의 첫 번째 만남부터 고백한다.

나는 만경평야의 중심, 전북 金堤(김제)의 중앙초등학교에서 2학년과 3학년을 다녔다. 꼭 50년 전이었다. 6·25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교실엔 책걸상도 없었다. 그냥 맨바닥에 앉아서 공부했다. 동화책이나 만화 같은 것조차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때 아이들에겐 「옛날얘기 듣기」가 제일 큰 즐거움이었다. 수업시간에도 틈새만 보이면 선생님에게 『옛날얘기 해주세요』라고 졸랐다. 그때 우리 반 담임교사는 박창순 선생님이었다.

어느 날 마지막 수업시간에 朴선생님은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황산벌」 얘기를 했다. 50여년 전의 얘기를 그대로 기억해 낼 수 없지만 줄거리는 대략 이러했을 터이다.

『신라의 金庾信(김유신) 장군이 5만 대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했다. 백제의 階伯(계백) 장군이 5000명의 결사대를 거느리고 나가 처음엔 네 번 싸워 네 번 다 이겼다. 그러나 10대 1의 병력 차이 때문에 결국은 階伯 장군과 결사대는 모두 황산벌에서 전사했다』

수업이 끝나고 담임선생이 교무실로 가기 위해 교실문을 열고 나간 직후 한 아이가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평소 나와는 서로 으르렁거리던 두곤이였다.

『여기, 신라놈 있다! 쳐부수자』

바로 나를 「왕따」 하려는 말 펀치였다. 순간 기가 팍 죽었다. 하지만 아무도 두곤이를 편들지 않았다. 만약 그 시절에 내가 우리 역사를 조금만이라도 알았다면 이렇게 대들었을 터이다.

『나, 신라놈 아녀. 난 신라에 멸망당한 가야의 후손이란 말여!』

그날 방과 후 두곤이와 나는 교실 뒤편 으슥한 곳에서 따로 만나 결투를 벌였다. 주먹질은 두곤이가 나보다 조금 나았던 것 같다. 마침 1학년 몇 반인가의 담임을 맡고 있던 金선생님이 우연히 결투현장을 지나가다 우리를 불러세웠다. 金선생님은 이제 막 사범학교 졸업하여 갓 부임한 분으로 얼굴에 여드름이 채 가시지 않았던 18세 정도의 처녀… 아이들 사이에 인기 최고였다.

그런 金선생님이 왜 그렇게 편파 판정을 했는지, 그 이유가 아직도 아리송하다. 싸움의 발단을 「신문」한 金선생은 두언이의 뺨만 야멸차게 올려붙였다. 그땐 그것이 얼마나 고소했던지….


잘못된 論山훈련소의 노래

金선생님의 나무람 때문에 그 후 학교에서 싸우자고 하지는 않았다. 두곤이는 내 편을 든 金선생님의 「존재」를 「당나라 장수 소정방」쯤으로 생각한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두곤이는 억울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두곤이는 일요일이면 작은 고개 하나를 넘어서 우리 동네로 와 줄기차게 내게 싸움을 걸었다. 어떻든 황산벌 전투는 두 아이의 주먹다짐이 되었을 만큼 예민한 부분이었다.

필자에게 있어 황산벌과의 두 번째 만남은 황산벌을 품고 있는 論山(논산)에서 軍복무(2년3개월 복무기간 중 1년여간)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논산훈련소의 교관이었다. 하루에 「제2(논산)훈련소歌(가)」를 적어도 수십 번은 들어야 했다.

<백제의 옛 터전에 계백에 정기 맑고

관창의 어린 뼈가 지하에 혼연하니

웅장한 호남무대 높이 우러러 섰고

대한의 젊은이가 서로 모인 이곳이

아아! 젊은이 자랑, 제2훈련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精兵(정병) 육성의 요람」인 훈련소의 노래에 왜 하필이면 敗戰(패전)의 장수 階伯의 이름을 첫 구절에 올려야 했는지를.

물론 階伯에게 敗戰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한 病(병)은 의자왕의 奢侈淫樂(사치음락)과 失政, 거기에 코드를 맞춘 奸臣(간신)들의 부정부패였다.

階伯은 우리 역사에 기록된 최고의 勇將(용장)이다. 그는 出戰에 앞서 처자를 모두 베었다. 後顧(후고)의 염려가 없어야 나랏일에 全心全力할 수 있다는 각오가 아니었겠는가. 三國史記 「계백傳(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한 나라의 인력으로 唐과 新羅의 대군을 당하자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나의 처자가 붙잡혀 노비가 되어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통쾌하게 죽이는 것이 낫다』

이것은 그가 이미 敗戰을 예감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동시에 武人으로서의 자존심만은 결단코 포기할 수 없다는 결의였던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것이야말로 悲壯美의 極致(극치)인 것이다.

만약 階伯의 죽음이 없었다면 백제왕조 678년의 종말은 너무 쓸쓸할 뻔했다. 그러나 논산훈련소歌는 잘못된 군가이다. 국군은 敵과 싸워 이겨 나라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階伯에 대한 존경심과 논산훈련소가의 沒전략적 歌詞(가사) 사이에 끼어 고민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敗將을 첫 구절에 올리는 「논산훈련소가」는 부르지 말아야 할 군가이다.


극복해야 할 丹齋 史觀

누가 뭐래도 황산벌 전투는 韓國史 최고의 하이라이트다. 이것을 戱畵化(희화화)한다는 것은 「누워서 침뱉기」 정도가 아니라 自己虐待(자기학대)이다.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이야말로 우리 민족 형성의 출발점인 까닭이다. 우리 민족은 통일신라 이후 하나로 융합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우리 민족의 再통일이 아니다. 신라는 우리 민족사 최초의 통일국가이다.

삼국통일의 최고 원훈은 金庾信이다. 그렇다면 金庾信은 민족사 최고의 공로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후예들의 시각은 영화 「황산벌」에서처럼 不肖莫甚(불초막심)하다. 이런 어리석음은 다음과 같은 丹齋(단재) 신채호의 史觀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異種(이종:唐나라)을 招하여(불러들여) 同族(동족:백제·고구려)을 멸함은 寇賊(구적: 침략하는 외적)을 引하여(끌어들여) 형제를 殺함(죽임)과 다르지 않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사람들은 모두 알타이어系 언어를 사용했으므로 서로 親緣性(친연성)은 느꼈겠지만, 아직 동족의식이 형성되지 않았다. 민족이 형성되지 않은 단계에서 민족적 관점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폄하하는 것은 非과학적인 태도다. 그럼에도 丹齋의 사관은 후학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북한의 주체사학은 한술 더 뜨고 있다.

<만약 삼국 시기에 고구려·신라·백제의 세 나라가 단합하여 외래 침략자들과 맞서 싸웠더라면 외래 침략자들은 우리 조국 강토에 한 걸음도 기어들지 못하였을 것이며, 세 나라는 통합되어 우리 조국은 더욱 발전하였을 것이다>

위의 구절은 북한의 사회과학출판사에서 발간한 「고구려 역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북한은 우리 민족사의 정통을 단군조선-고구려-발해 등에서 찾고 있다. 그들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고 「국토의 남부 통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소위 북한의 「주체사학」이라는 것은 正體不明(정체불명)의 人骨(인골) 몇 개를 채집, 「전자상자성 공명년대 측정법」인가 뭔가를 해서 그것이 1993년 현재 5011년 된 것이라고 「확정」해 놓고 그것을 「檀君(단군)의 유골」이라는 따위의 주장을 하는 픽션의 세계다. 북한의 이데올로그들은 민족사를 북한 주도의 통일전선에 복무할 수 있도록 변조해 왔다. 따라서 「주체사학」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원천적으로 설득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오늘의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오히려 丹齋의 시각이다. 丹齋는 국권상실기에 중국에 망명,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日帝의 관헌에게 체포되어 旅順감옥에서 복역 중에 순국한 대표적 애국지사이며 민족사학의 선구자이다. 필자는 이런 丹齋의 도덕적 秀越性(수월성)과 지금 우리 시대엔 맞지 않은 丹齋의 史觀 사이에 끼어들어 고민했다. 결론은 丹齋의 역사 인식까지 無오류의 聖域으로 받들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필자가 오랜 방황을 거친 끝에 「우리 민족을 만든 金庾信」(까치글방, 2000년 발행)이라는 拙著를 집필했던 까닭이었다.


바탕에 민족적 劣等感이 깔린 영화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丹齋의 인식은 국권상실기에 外勢 배격의 차원에서 위력한 논리가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오늘의 한국인이 수용하기에는 너무 자기부정적이다. 그런 丹齋의 논법에 따른다면 「팍스 아메리카나」의 국제질서 속에서 미국의 외교노선에 추종하는 英國이나 日本 같은 나라들은 전부 미국의 식민지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도 오늘의 대한민국에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폄하하는 것이 마치 지성인의 자세인 것처럼 誤導되고 있다. 따라서 丹齋의 사관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우리의 正體性은 확보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 국민들이 과거 역사에 대해 열등의식을 가질 필요는 눈꼽만큼도 없다. 오늘의 한국은 19세기의 제국주의 시대 같으면 이미 식민지를 가져도 여러 개 가져야 했을 만한 무역大國이다. 영국의 신문들은 한국의 영화·드라마·대중가요 등이 東아시아권을 넘어 중앙아시아의 이슬람圈 국가들에까지 파고드는 현상에 대해 「한국의 문화 제국주의」라고 평가한 바 있다. 세계의 첨단기업들은 한국시장에 첨단제품에 대한 향후의 成敗를 가늠하기 위해 다투어 試驗出市(시험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만큼 우리가 세계 제1류의 정보·통신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 정보산업의 强國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한국인은 韓國史에 대한 짙은 열등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아! 고구려, 고구려가 만약 삼국통일을 이룩했다면 민족의 판도는 넓어졌을 터인데…』, 『檀君 왕검은 중국의 堯(요)임금보다 먼저 나라를 세웠는데…』 따위의 呪術(주술)이 우리 사회에서 幽靈(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이제, 국민들이 누리는 삶의 질은 영토의 크기나 인구수에 비례하지 않는 것 아닌가.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에 비해 인구가 29배, 영토가 100배에 달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중국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거나 부러워할 일은 실제 별로 없다.

민족의 역사가 오래되었다거나 민족의 판도가 넓었다는 것이 오늘 인간에게 무슨 훈장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청동기·철기 문명시기, 세계에서 가장 앞섰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나라, 이라크가 오늘날 건국한 지 230년에 불과한 미국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있지 않은가. 중국의 黃河 문명을 일으킨 漢民族은 10세기 이후 민족국가보다 異民族의 지배下에 처했던 기간이 오히려 더 길었다.


민족사에 대한 省察 부족

민족의 흥망성쇠는 돌고 돈다. 세계사에 冠絶(관절)했던 로마제국이 망한 서기 475년 이후 1400년 동안 이탈리아人들은 한 번도 민족의 再통일은 이룩하지 못하고 유럽 열강들에 의해 이탈리아 반도의 운명이 左之右之되었다. 1860년 피에몽트 왕국의 주도로 이탈리아의 재통일(리소르지멘토=再生)을 이룩하면서 首相 카부르는 프랑스에 사보아와 니스 지방을 할양했다. 그런 카부르는 오늘의 이탈리아史에서 「리소르지멘토의 3傑」 중에서도 첫째 인물로 꼽히고 있다.

신라의 재상 金春秋가 우리 민족의 재통일이 아닌 첫 번째 통일을 하기 위해 대동강 이남의 땅만 확보하기로 唐 太宗(태종)과 밀약한 것이 무슨 大罪가 되는 것인가. 신라가 唐과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려면 당연히 唐에 代價를 지불해야 했던 것이다. 국제관계엔 공짜가 없다. 영화 「황산벌」은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이 부족했다.

영화는 고구려의 연개소문, 백제의 의자왕, 신라의 金春秋, 唐 高宗(고종·李治)의 4者회담 장면으로 시작된다. 영화에서 唐 고종은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은 天子가 주재하는 사대질서를 강조하면서 고구려와 백제가 이에 순응하지 않고 있음을 꾸짖는다. 金春秋는 唐 고종 옆에 붙어서며 『고구려와 백제는 「惡의 軸」보다 더한 惡의 덩어리』라고 거든다. 말끝마다 「정통성」을 강조하는 唐 고종을 향해 연개소문이 『여기 정통성 제대로 가진 놈 어디 있냐』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4者회담이 결렬된다. 물론 史實에 부합되지는 않지만, 당시 東아시아 4國관계를 굳이 寓話化(우화화)하면 대개 그런 흐름이었다.

다만, 당시의 4國 관계는 韓民族 대 漢民族 관계가 아니라 4國 모두 자국의 국가이익을 겨냥하는 국제관계였다. 이것을 블록化하면 대체로 고구려-백제-倭國의 南北동맹 對 신라-唐의 東西동맹의 대결이었다. 동맹의 모양새를 전략적 차원에서 보면 遠交近攻(원교근공)의 법칙이 병법서의 가르침 그대로 구사되고 있다.

영화 「황산벌」에선 태종 무열왕(金春秋)의 장남 金法敏과 차남 金仁問을 아버지 또는 唐 황제의 위세에 기대어 거들먹거리는 철부지 또는 사대주의자로 묘사했다. 이것은 三國史記에 기록된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나 김인문傳을 음미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淺薄(천박)한 史觀에 물들어 新羅의 삼국통일에 대해 원초적으로 반감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쪽이든 제작자, 시나리오 작가, 감독은 그들이 범한 함량미달의 역사해석에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영화 「황산벌」은 OX문제나 4지선다형 문제에만 익숙, 민족사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신세대를 오도하기에 적합한 코미디이기 때문이다.


亂世를 治世로 바꾼 역사도약

우리 민족에 있어 삼국통일은 사회발전을 이룩하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었다. 전쟁에 투입되었던 많은 인력은 농업 개발, 문화사업으로 돌려 國富를 증진시키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밑천이 되었다. 통일신라기의 유물이 後代의 것보다 오히려 수준 높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통일신라가 당시 세계 최선진 東아시아 문화권의 핵심 멤버로 참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죽은 자의 해골이 산하를 뒤덮었던 300년 亂世에 終止符(종지부)를 찍고 그 후 200년간에 걸친 평화시대를 창출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삼국통일은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빛나는 역사발전이었다.

蛇足(사족)을 하나 붙여야겠다. 영화 「황산벌」에는 중국 무협영화 흉내를 너무 냈다. 예컨대 화살이 폭우처럼 쏟아지는 전투 장면은 張藝謀(장예모·장이모) 감독의 중국영화 「英雄」에서 본뜬 듯하고, 金庾信과 階伯이 장기를 두는 장면에서 인간群像(군상)을 器物로 사용한 것은 얼마 전 조훈현 9단과 창하오 9단의 바둑시합에서 實演(실연)된 중국 주최 측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베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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