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집중인터뷰] 63세 황혼의 가수 李美子의 행복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여인」의 노래 인생 45년

『사람도 실제보다 부풀리면 보기 싫듯이 노래도 꾸미면 싫잖아요. 나이대로 늙어 가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해요』

글 정순태 기자  200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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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고우십니다. 운동 같은 것 좀 하십니까.

『운동 같은 건 모르구요. 정말, 집에 있으면 문밖에도 안 나가요. 어려서부터 공연장에만 왔다갔다 했어요. 집을 나서면 차 타고, 차에서 내려 놓으면 거기서 노래 부르고, 걷는 것 하나 없으니까 운동 부족이었죠. (누가) 좋다고 해서 이제 좀 걸으려고 해요』

李美子씨를 만나니까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란 詩句(시구)가 생각난다. 그냥 헤아리는 나이로 64세(만 63세). 목소리는 아직도 현악기의 울림 같다. 한창 때보다 눈가에 주름살이 새겨진 지금 그녀의 모습이 오히려 좋다. 평상복 차림의 「엘레지(悲歌)의 여왕」을 지난 2월26일 오후 2시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있는 그녀의 자택에서 만났다.

―날씬하신데요.

『제가 살찌는 체질이 아니에요. 먹는 거 가리지는 않지만, 과하게 먹는 편이 아니고 肉食보다는 菜食을 좋아해요』

―여자 체중을 물으면 실례라던데….

『저요, 괜찮아요. 49(kg), 50 그래요. 많이 나가면 51인데, 평생 52도 안 넘어가요』

도대체 어찌된 영문일까? 李美子씨와 인터뷰를 하기 전에 무엇을 물어야 할지 고민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열이면 열 모두가 「빠뜨리지 말아야 할 질문」 하나를 가르쳐 주었다. 「이미자…」 하면 아직도 世人들의 입초시에 가장 먼저 오르는 좀 황당한 얘기이긴 하지만….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두뇌는 그의 死後에 과학적 검토의 대상이 되었습니다(이 대목에서 벌써 李美子씨는 「킥」 하고 웃었다. 「네가 제법 뜸을 들이고 있지만, 다음 말이 어떻게 이어질지, 내 이미 알고 있노라」는 반응 아닌 것인가). 李美子씨의 성대도 역시 死後에 과학적 검토의 대상이라는데…, 혹시 이런 소문 들으신 적 있으십니까.

『많이 들었죠. 정말, 그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 많아요. 李美子의 성대를 일본에서 미리 돈 주고 사 놓았다더라, 미국의 생체연구기관에서 해부를 한다더라는 낭설이죠』

―그런 카더라 낭설을 들으면 기분이 어떠세요.

『글쎄요. 「死後」라는 말을 넣어야 하기 때문에 모두들 내게 물을 때 좀 거북한 모양이던데, 그건 뭐, 제 목소리가 좋다고 인정해서 하는 말이니까 괜찮아요』

―高名하신 李선생을 만난 김에 좀 엉뚱하지만, 저의 평소 의문사항 하나를 해결하려 합니다. 제가 합창반원이던 어린 시절의 경험입니다만, 연습 때문에 목이 쉬면 아이들은 달걀 하나씩을 탁 깨 먹는다든지 참기름을 꿀떡 삼킨 다음 발표회에 나갔습니다. 이거 효험이 있는 겁니까.

『저는 날달걀 같은 거 비위가 상해 먹지 못해요. 목이 쉬든지 할 때는 푹 쉬는 것밖에 없어요. 요즘은 나이가 들어 감기 기운이 있을 때도 있어요. 그러면 비타민 C가 많은 과일을 찾아서 즙을 내 먹기는 하죠. 특별히 편도선이 붓는다든가 하면 이비인후과에 가서 치료를 하지, 달걀이나 참기름을 먹진 않아요』

―한창 때는 하루에 50∼60곡 이상 부르셨다면서요.

『그렇죠.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 날이 있어요. 한번 콘서트를 하면 2시간 동안 20여 곡 부르는데, 그걸 하루 2회씩 하니까 50곡은 되는 거죠』


4월이 오면 「노래인생 45주년」 기념무대

―4월이 오면 데뷔 45주년을 맞아 기념공연을 하신다면서요.

『오는 4월7일부터 9일까지 사흘간(매일 오후 7시30분) 세종문화회관에서 저의 노래인생 45년을 결산하는 거예요. 朝鮮日報社 주최로요』

李美子씨는 서울 문성여고 3학년이던 1958년 HLKZ(KBS의 前身)가 주최한 가요경연 프로그램 「예능로터리」에서 나애심의 「언제까지나」를 불러 1등을 하고, 그 이듬해인 1959년 「열아홉 순정」을 부르며 가요계에 데뷔했다. 그로부터 그녀가 발표한 신곡은 무려 2100곡에 달한다. 이건 한국 최다기록으로서 「한국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데, 과문이지만 세계에서도 이런 유례는 없을 것 같다.

―1999년에 노래인생 40주년 기념공연을 세종문화회관에서 하셨는데…, 세월 참 빠르죠.

『5년 전 4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이렇게 큰 무대는 마지막일 것」이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때는 앞으로 더 할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래서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하면서 저를 도와주시는 분들에게 「여건만 되면 이번 기회에 전국을 한번 돌고 싶은데 되겠느냐」고 물으니 「되겠다」고 해요. 저는 반주음악 틀어 놓고 노래 부르진 않고 라이브만 하잖아요. 그래서 경비가 좀 드는 편인데, 이익은 생각지 않고 손해만 보지 않는다는 방향에서 전국순회공연을 했던 거예요. 악단의 규모만 조금 줄여 경상도 남해와 전라도 해남, 이런 데까지 다 돌다 보니 2년이 그냥 지나가 버려요. 그래도 이번 45주년 무대는 언감생심이었는데, 아직도 요청하는 곳이 있더라구요. 또 주윗사람들에게 「되겠느냐」고 물으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격려해 주어서 45년 무대를 준비하고 있는 거예요』

―전국 순회공연, 그거 강행군 아닙니까.

『이틀 공연하고 하루 쉬고, 이러면 너무 힘들어요』

―그럴 땐 팔 다리 어깨 허리, 안 아파요.

『왜 안 아파요, 쑤시죠』

―그래도 굉장한 체력 아닙니까.

『저 자신 어떨 땐 이렇게 생각해요. 노래하는 것, 하늘이 제게 주신 복이라구요. 더욱이 관객들을 생각하면 조금도 방심할 수 없어요. 제가 어딜 가든지 연세 높으신 분들이 많이 오셔요. 자제분들이 연로하신 부모님들을 모시고 오기도 하고…. 송구스럽고 감사해서 소홀히 모셔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 굳건히 해서 무대에서 혼신의 힘을 다합니다』


韓日 국민가수의 대결이 不發로 끝난 사연

―음대 작곡과 교수가 「가수 李美子를 생각한다」는 논문을 발표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골자가 무엇입니까.

『꼭 10년 전에 효성가톨릭대학 박종문 교수님이 발표한 논문인데, 「李美子가 부르는 뽕짝, 즉 트로트 가요는 그냥 유행가로 들어 넘길 수 없다」고 했어요. 「목소리가 애잔하면서도 뭔가를 전달해 주는 결코 수월하지 않는 단단함을 갖고 있다」… 뭐, 이런 내용입니다』

―대단한 찬사를 받으셨군요.

『예, 너무 과분한 칭찬만 해주셔서…』

박종문 교수는 李美子의 목소리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우선 가늘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 가늘음은 날카로움이나 폭 좁음으로 연결되는 가늘음이 아니라 부드러움과 끈끈함과 윤기 있는 폭 넓음으로 이어지는 가늘음이다>

―10여 년 전, 일본의 「국민가수」 미조라 히바리가 별세했을 때 일본의 신문들은 그 부음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문뿐이 아니었죠. NHK는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특집방송을 했고, 지방마다 분향소가 따로 설치되었으니 國葬이다시피 했어요. 일개 가수인 저로선 부러운 마음 그지없었죠』

―생전의 미조라 히바리와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아뇨. 그래도 그분은 새 음반을 내면 사인을 해서 제게 부쳐 주면서 「언젠가 共演(공연)을 한번 하자」는 뜻을 전하기도 했어요』

―韓日 양국의 「엘레지의 여왕」이 한 무대에 섰다면 대단했을 터인데요.

『제가 부른 노래 「동백아가씨」(1964년 발표)가 이듬해 「금지곡」이 된 이유가 「倭色調(왜색조)」라는 것 아니었어요. 共演하고 싶어도 불가능한 시절이었어요. 설사 共演을 한다 하더라도 둘을 똑같이 대우해야 하는데, 누가 먼저 (무대에) 나서느냐, 이런 디테일한 것까지 따져야 했거든요. 암튼(아무튼) 그쪽에서는 백보를 양보하여 추진하려 하긴 했어요. 그래도 안 되었던 게 일본에서 共演하더라도 한국에선 미조라 히바리가 (무대에) 설 수 없었어요. 자기 노래를 한국말로 부를 수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안 되었던 거예요』

1964년 봄, 국내에선 韓日회담 반대 데모가 일어나 계엄령이 발동되었고, 그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동백아가씨」는 1965년 放倫의 정치적 고려에 의해 「금지곡」으로 묶였다. 韓日 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1968년에도 「동백아가씨」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가혹해져 「방송금지」뿐만 아니라 「公演 및 앨범제작 금지」로까지 확산되었다.

가슴속의 멍은 恨으로 맺혀졌다. 1967년에 발표한 「섬마을 선생님」은 「일본곡의 표절」이라 해서, 1969년에 발표한 「기러기 아빠」는 「퇴폐저속」이라 해서 각각 금지곡으로 묶여 버렸다. 이 두 곡은 「동백아가씨」와 더불어 「이미자의 3大 히트곡」으로 손꼽히는 것들이다.

「섬마을 선생님」을 일본곡의 표절이라 했지만, 작곡가 박춘석씨는 금지곡에서 풀리던 날(1989년 9월2일)에 『표절했다는 일본의 그 노래보다 먼저 나왔다』고 해명했다. 표절했다면 오히려 미조라 히바리가 부른 그 일본곡이 「섬마을…」을 표절했던 셈이다.

―그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미조라 히바리와의 共演은 어려웠겠네요. 지금 같으면 문제 없을 터인데….

『그분은 제가 제일 존경하는 선배, 나이가 저보다 서너 살 위였어요. 교토(京都)에 가면 「미조라 히바리 기념관」이 있어요. 지금도 일본 전국에서 사람들이 꾸준히 찾아온대요. 해마다 찾는 팬들도 있구요. 저도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보았죠. 무대에서 입던 의상, 분장실을 그대로 옮겨 놓고, 화장대에서 요만한 액세서리까지 다 전시해 두었더군요. 마지막 공연을 도쿄돔에서 했는데, 그때 찍은 필름을 기념관에서 항상 틀어 놓아요』

―미조라 히바리는 50代 중반의 나이에 별세했지요. 더 살아도 좋았을 터인데….

『그분은 마지막 무대 때도 몸이 안 좋았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외로움을 술로 달래고… 자식도 없었고, 사랑하던 어머니가 가셔서 더욱 타격이 컸고, 자세히는 모르지만 동생들 문제로 사회적 물의도 있었대요. 그녀는 노래로 남들의 가슴은 다독거려 주었지만, 정작 자신의 개인생활은 고독했던 것 같아요』


『노래는 순수하게 불러야 잘하는 것, 연습 너무 많이 하면 군더더기가 붙는다』

―작곡가들은 레코드 취입 전 가수에게 수천 번까지 연습을 시킨다고 합디다. 그러나 李美子씨는 신곡을 받으면 피아노 반주로 한두 번 맞춰 보고 바로 취입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연습은 좀 안 하는 편이었습니다. 「동백아가씨」가 나온 후 제가 지구레코드社에 전속되었을 때 우리나라 작곡가들이 대거 지구(레코드社)로 몰렸어요. 지구로 소속을 못 옮기면 제게 곡이라도 두어 개 주었기 때문에 (제가) 무지하게 바빴어요. 텔레비전이 (일반 가정에) 보급되기 전인 1960년대였으니까 쇼무대가 많았죠. 영화도 굉장히 붐을 이뤄 웬만한 영화 주제가를 제가 다 불러야 했으니 혹사 아닌 혹사를 하여 목소리도 거의 쉰소리였지 맑은 소리가 없었을 지경이었습니다.

영화 「흑산도 아가씨」의 주제가를 취입할 때는 이런 일이 있었어요. 지방공연을 마치고 야간열차 침대칸을 타고 아침에 서울역에 내렸는데, 바로 스튜디오로 끌려갔어요. 스튜디오에 가니 (작곡가) 박춘석 선생님과 한형모 (영화)감독님이 「영화는 다 찍었는데, 주제가만 못 들어간 상황」이라고 하시데요. 그래서 두어 번 (피아노로) 맞춰 보고 취입했어요』

―그렇게 빠르게 곡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게라도 되긴 되었으니까요. 오히려, 저는 너무 많이 연습을 하면 노래에 군더더기가 붙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요. 노래란 순수하게 불러야 하는데, 너무 연습을 하면 자신도 모르게 기교를 넣게 되어요. 그러나 꾸미면 듣기 싫찮아요. 사람도 자신의 실제 모습보다 부풀리면 보기 싫어져요』

―李美子씨께선 데뷔 이후 2100여 곡을 부르셨다는데, 그것이 과연 좋은 것입니까.

『(지구레코드社에) 작곡가가 20명은 되었으니까 한 달에 두 곡씩만 받아도 40곡이었어요. 1964년부터 1971년까지의 6~7년 사이에 그 많은 곡들을 거의 다 부른 거예요. 제 노래에 제 노래가 치이고…, 질보다 양만 생각한 거죠. 1970년대 중반을 넘어가니까 「이게 웬일인가? 하라는 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李선생은 자신이 부른 노래들 중 가사를 외우는 곡이 몇 곡쯤 되십니까.

『잘은 모르지만, 제가 부른 가요뿐만 아니라 선배님들이 부른 노래의 가사도 많이 기억하고 있는 편이어요』

―전문가들은 「트로트 가요에 대한 이해 없인 한국음악에 대한 이해도 있을 수 없다」고 합디다. 음계와 선율과 패턴에 있어서 일본 엔카(戀歌)의 한국판인 트로트 가요를 이제 우리가 민족문화의 입장에서 이해·비판·수용해야 한다는 거죠.

『저는 세월이 갈수록 한국의 대중가요를 부르길 잘했다고 생각이 들어요. 그걸 흔히 「뽕짝」이라는 하는데, 그런 卑語(비어)는 싫어요. 「트로트」라는 말 자체도 싫어요. 「한국 전통가요」라고 하면 좋겠어요. 가장 한국적인 목소리로 우리 가요를 부르는 가수가 저라고 생각하는데, 저의 노래가 왜 「왜색가요」입니까. 물론 그것은 他회사의 라이벌 의식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너무 속상하고 억울했어요』

―他회사의 라이벌 의식 때문이라니요.

『「동백아가씨」 이후 제가 독주하다시피하니까 다른 음반회사들이 제 노래를 묶으려고 비방했던 것은 사실이죠』


『전통가요 내 代로 끝날까 봐 불안해요』

광복 이후 한국인들은 학교교육을 통해 미국사람도 잘 모르는 미국민요 「스와니강」, 독일사람도 잘 모르는 독일노래 「로렐라이」를 배워 불렀다. 특히 요즘의 젊은층에서 유통되는 유행가들의 대부분은 洋色이며 뉴욕 뒷골목風의 노래도 적지 않다. 적어도 오늘의 상황에서 倭色은 안 되고 洋色만 된다는 논리는 궁색하다. 박종문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트로트 가요는 음계 체계상의 일본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가창 양식과 가사와 선율과 화성의 여러 면에서 韓國化를 이뤄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대중적 정서에 깊이 뿌리내리는 데 성공했다>

―우리의 대중가요는 시대의 정서와 민족의 恨을 잘 반영해 오지 않았습니까.

『그 멜로디에 붙여진 노랫말이 일제시대 같으면 나라 잃은 설움을 보듬어 주었고, 6·25 전쟁 같은 어려운 시절엔 우리를 잘 위로해 주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노래들을 적절하게 표현하신 분들은 이제 거의 가고 없으세요. 대중가요의 뿌리를 살리고 싶은데, 이게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어요. 요즘은 장르가 달라졌어요. 정말, 요즘 가사가 너무 저속해요. 제가 가장 안타까운 것은 가사는 슬퍼 죽겠는데, 템포는 빨라 가지고 덩실덩실 춤추고 웃는 해괴한 시대가 된 거예요. 가수의 가창력은 떨어지고, 전통가요의 수준은 퇴보하고 있거든요. 요즘 식당에 가면 양식·중식·일식, 기막힌 음식 많잖아요? 그렇지만 우리 한국인은 김치·깍두기·된장찌개를 먹지 않으면 어딘가 허전하고 개운치 않듯이 대중가요도 그런 거예요. 鄭위원님도 거나하게 한잔 하시면 클래식이나 재즈를 부르십니까, 아니죠? 「두만강」 「목포의 눈물」이나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궂은 비는∼」 이렇게 노래하시죠. 이게 우리 정서이고 우리 전통가요예요. 그러나 시대가 너무 달라졌죠? 저 하나만이라도 선배님들이 부르셔서 우리의 심금을 울린 전통가요를 이어 가고 싶어요. 그러나 저의 代가 끝나면 (한국적 가요도) 끝날 것 같아요. 이런 불안감이 있어요』

李美子씨는 자신의 은사로 작곡가 朴椿石(박춘석)·백영호·나화랑씨를 꼽는다. 나화랑씨는 그가 작곡한 「열아홉 순정」으로 이미자씨를 데뷔시켰고, 백영호씨는 당시까지 가요사상 최다 판매를 기록한 「동백아가씨」의 작곡가이며, 박춘석씨는 일생 동안 작곡한 노래들 중 3분의 1인 700곡을 李美子씨가 부르도록 했으니 師弟之間이면서 同志의 관계다.

『나화랑 선생님은 10년 전에, 백영호 선생님은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박춘석 선생님은 5년 전에 혈압으로 쓰러져 투병중이신데, 뵙기를 청해도 숨어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셔요』

―국민가요가 된 「동백아가씨」를 처음 받았을 때 느낌은 어떻든가요.

『느낌,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작곡가)이 주시는 거니까 받았고, 받고는 열심히 부른 거죠. 그 노래, 지금 들어 보면 그렇게 특별히 잘 불렀다고 생각되진 않아요. 멜로디가 그렇게 좋다고도 생각되지 않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空前의 히트를 기록한 걸까요.

『글쎄요』


『꺾고 굴리는 기술은 없어요』

―李선생이 부르신 노래는 「사랑의 기쁨」보다 「이별의 슬픔」입니다. 음조와 가사의 마디마디에 「가슴을 도려내는」 슬픔과 설움으로 가득 차 있어요. 이것이 시대 정서에 잘 맞아 떨어진 것 아닐까요. 1960년대와 70년대의 개발연대는 사회적으로 보면 「무작정 上京시대」였어요. 어디서나 「이별의 슬픔」으로 눈물 폭폭 흘리던 시절 아니었습니까.

『시대의 분위기… 바로 그러했던 것 같아요』

―李선생은 자신의 노래들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러기 아빠」예요. 그 곡, 선율의 흐름이 참 좋고 멜로디도 저에게 맞았던 것 같아요. 그게 쉬운 노랜 아니죠. 어떤 가수는 노래 부르면서 굴리고 꺾지만, 전 정말 굴리고 꺾는 기술이 없어 그냥 불러요. 내가 참 좋아하는 노래예요』

―가장 호흡이 맞는 작곡가는 누구입니까.

『역시 박춘석 선생님이죠』

―맘에 드는 작사가는 누구입니까.

『작사자에 대해선 별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제가 부른 노래의 가사들 가운데 정두수, 한산도, 반야월씨가 지은 것이 많았어요. 박춘석 선생님이 작사까지 하셨던 곡도 적지 않았구요』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어디였습니까.

『역시 데뷔 30주년과 40주년 기념공연이었습니다. (1989년의) 30주년 기념공연은, 우리 대중문화를 푸대접하는 벽을 넘고 넘어서 처음으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게 되었어요. 공연을 앞두고 제가 당시 與野 4당 총재님들을 일일이 黨舍로 찾아가서 다 초대했어요. 총재님들이 「뭘 도와줄까」라고 물으셔서 「따로 도와주실 건 없고, 꼭 참석만 해주십시오」라고 부탁드렸더니 내외분들 모두 오셔서 제 노래를 들어 주셨습니다』

―그때 4당 총재라면 盧泰愚·金泳三·金大中·金鍾泌씨였는데, 장래의 대통령들까지 불러 모은 것 아닙니까.

『민정당 쪽은 총재가 대통령이어서 박준규 대표께서 참석해 주셨어요. 참, 그때 공연을 주최했던 朝鮮日報社와 DJ가 굉장히 사이가 안 좋았을 때였거든요. 그쪽에서 朝鮮日報 불매운동도 벌이고…. 그래서 제가 나름대로는 화해를 시키느라고 「총재님, 조선일보와 불편하시더라도 꼭 와주세요」라고 하니 DJ 총재가 「난 아무 감정 없습니다」라고 하시더군요』

―관객으로서 그분들의 모습은 어떻습디까.

『저 나름대로 느낌이야 있지만, 그걸 어떻게 말해요. 40주년 기념공연 때는 전두환 (前) 대통령이 참석해 주셨어요. 그때 5년 뒤에 45주년 기념공연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이제, 제가 내년을 자신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잖아요? 저로선 이번 45주년 무대가 마지막 대공연이 아닐까요』

―아이쿠, 팬들과 「50주년 금혼식」도 하셔야죠(웃음).

『그거야 되겠어요?』

―참, 베트남 전쟁 때 베트남에 가서 위문공연도 하셨죠.

『그때는 비둘기부대만 먼저 파견되어 있었어요. 「가기만 하면 다 죽는다」는 소문이 나돌던 무렵이었는데, 저희가 갔거든요. 그 늠름하고 씩씩한 모습들이 저를 보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려 노래부르던 데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죠』

李美子씨는 베트남에 파견된 국군장병들에겐 마음의 고향이었다. 다음은 그 당시를 회고하는 本誌 독일 통신원 백선균씨가 「이미자의 45주년 기념공연」 소식을 듣고 月刊朝鮮 홈페이지에 올린 글이다.

<메마른 머슴아들을 연병장에 모은 한 軍宗 신부는 『고국에 계신 부모님께 자주 편지하십시오!』 하더니 느닷없이 「황포돛대」를 선창했다. 따라 부른 곡은 이 밖에도 「섬마을 선생」 등 1960년대 중반에 유행하던 이미자의 노래만 10여 곡. 부르고 나니 가슴이 후련했다… 이미자는 우리 민족의 抒情性(서정성)을 대표한다>

―작년 5월엔 평양 공연도 하셨지요. 그때 북한 관중의 반응은 어떻습디까.

『제 공연만큼은 그나마도 반응이 괜찮았어요』

―레퍼토리 선정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북측에서) 이거 하라 저거 하라 하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그쪽에서 안 좋아하는 노래도 있는데, 그런 것은 굳이 부를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도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 이런 거 다 불렀어요. 그런 과정에서 신경이 쓰였구요. 여기서보다 월등히 잘 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이었습니다』

―북한에서 유행된 노래 「휘파람」 같은 것도 부르셨습니까.

『그거 가벼운 노래 아닙니까. 여기서 무게도 좀 있고 나이도 있다는 사람이 어떻게 「휘파람」 어떻구 하겠어요. 「두만강」은 불렀어요. 우리가 광복 전부터 불렀던 「두만강」 같은 노래를 北에선 「계몽가요」라고 하던데, 평양의 노래방에서도 불린대요. 양념으로 北에서 애창되는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더니∼」(몽금포 타령)를 불렀더니 참 좋아하데요. 마칠 때는 북한 노래 「다시 만납시다」를 저의 스타일로 불러 박수 많이 받았어요』

―이데올로기 과잉의 사회에서 李美子 선생의 애절한 노래를 이해하고 좋아하는 것 같습디까.

『북한의 인민가수·공훈가수들이 (찬조로) 출연하여 합창을 하기도 했는데, 그들의 표정을 보니까 저의 노래를 인정한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공연장 내외에서 일반 관객들도 따로 만나 대화해 보셨습니까.

『못 만났어요. 길거리에 사람도 별로 없더군요. 어디로 가든 치마 저고리를 입은 안내인이 따라다니며 설명을 해주었어요. 서커스를 보러가 VIP(귀빈)석에 앉아 있는데, 무대의 막 뒤에서 여자 사회자가 척 나오더니만 북한식 음조로 「남쪽에서 MBC연예단으로 오신 분들 환영하겠습네다」라고 하데요』

―북한의 고관들은 만나 보셨어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남, (아태평화위원회 위원장) 김용순 같은 높은 사람들은 만났죠』

―김용순은 그 얼마 후 급사했는데, 그때 건강은 어떻게 보입디까.

『혈색이 안 좋고…, 암튼 건강이 나빠 보였어요』

―金正日도 李美子씨의 팬이라던데요….

『그래서 (북한에) 가게 된 거죠. 근데 (金正日의) 「다른 일정 때문에 못 보았다」면서 「공연을 하루 연장해 달라」고 요청했대요. 이쪽 주최 측 스케줄도 있고 해서 들어주지 못했어요. 다음날 오후 4시에 (우리를 싣고 갈) 전세 비행기가 순안비행장에 도착할 예정이었거든요』

―앙코르라고 치고 수락해도 괜찮았을 것 아닙니까.

『비행기 하나를 전세 내어 여기서 회비를 낸 많은 참관인들이 동행했는데, 그분들 모두 개별적인 사정이 있을 터이니까 어려웠던 거죠』

―북한에서 대접은 잘 받으셨겠지요.

『(순안공항에) 도착한 후 다른 분들은 고려호텔이라는 곳으로 가는데, 책임자가 「李美子씨와 바깥분은 초대소로 모시겠다」고 그러데요. 그곳이 특별히 대접하는 영빈관인데, 대동강변 부벽루가 보이는 곳에 위치한 「모란봉초대소」였어요. 「우리 부부만 가면 제가 불편하니까 우리 매니저하고 화장을 해주는 코디도 함께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했더니 그렇게 해주더라구요. MBC 사장님과 비서, 그리고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이종석 차장도 같은 모란봉초대소에서 묵었더군요. 저희 부부에게 벤츠 600, 매니저와 코디에게도 벤츠 600, 이렇게 배정되었는데, 각 차마다 경호원 한 사람씩 배정되어 있었어요. 저희 부부가 탄 차에는 국장급 여성경호원이 앞자리에 탔는데, 「남쪽에서 오신 굉장한 분」이라면서 칙사 대접을 해주더라구요』


『남편 食性에 맞춰 경상도식 김치 담아요』

―李선생은 해외동포를 위한 위문공연도 많이 하셨는데, 30년 전과 지금을 비교하면 어떤 변화가 보입디까.

『30년 전만 해도 한번 떠나면 좀처럼 돌아올 수 없는 조국이었잖아요. 거기선 언어가 잘 통하지 않죠, 친구도 없죠, 생활도 안정되지 않았죠, 이러니 하늘 쳐다보고 조국 생각만 하는 것이었죠. 이러 했을 때 제가 가면 거기도 눈물바다예요. 지금은 오늘 국내에서 방송된 거를 거기서도 바로 다음날, 아니 리얼타임에도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 많이 달라졌죠. 생활도 여유로워졌고, 한인촌 있고, 한국음식 많고, 비행기 타고 고국에 왔다가 며칠만에 놀다 갈 수도 있고, 이러니까 지금은 여기나 거기나 별로 다른 거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 회사 여직원의 질문을 제가 대신 드리는 건데, 여자 나이 64세는 여자의 일생에서 무엇입니까.

『황혼이죠, 뭐』

―살림은 잘하세요.

『그렇게 물어보시면 제가 잘한다고 해야 해요, 못 한다고 해야 해요. 퍼내지 않고 살아야지 낭비하면 가정을 이루기 어렵잖아요』

―요리솜씨는 어떠세요.

『히힛, 그냥 일상 먹는 거 하는 거지, 저는 잘하는 편이 아니에요』

―김치는 손수 담그십니까.

『(다른 사람에게) 시키죠, 뭐. 옆에서 쬐끔 참견은 하고…』

―李선생은 서울 토박이라 김치를 서울식으로 담그겠네요. 새우젓에다 무 듬뿍듬뿍 넣고 담는 서울김치 맛, 시원하잖아요.

『아뇨. 우리 집 양반이 경상도 토박이이기 때문에 저는 젓국 푹 넣는 경상도식 김치 담가요』

―그렇게 입맛을 바꿀 수 있습디까.

『저는 서울 토박이라 (남편과) 처음엔 서로 음식(취향)이 굉장히 달랐어요. 원래 서울사람은 싱겁게 먹고, 비린내 나는 생선 잘 안 먹고, 살기 어려워도 잡곡밥은 싫어하잖아요. 잡곡밥이라 해야 보리쌀 조금 섞는 거구. 그런데 이쪽으로 시집와서 시어머니께 참 많이 배웠거든요. 지금은 짜고 맵지 않으면 음식을 먹은 것 같지 않아요. 제가 하는 건 모두 경상도식이에요. 제가 잘한다고 할 수는 없고, 우리 식구들에 한한 얘기지만 먹을 만큼은 해요. 우리 식구들은 제가 한 것에 대해 불만 없으니까요』

―아이구, 저는 고향 집에서 밥 먹으며 무심결에 『김치가 왜 이렇게 짜냐』고 했다가 어머니에게 혼났는데요.

『호호호∼ 혼이 날 만하네요. 그것은 외국에 얼마간 갔다가 돌아와서 혀가 꼬부라진 말 하는 것하고 마찬가지 아녜요』

―李美子씨의 친정 집안에 노래 잘 부르는 분이 있었습니까.

『아뇨』

―그러면 (李美子씨는) 突然變異네요.

『그런가 봐요』

―가족끼리 노래방 같은 데도 한번씩 가십니까.

『노래방에 한 번도 가본 일이 없습니다』

―자제분들이 초·중·고교에 다닐 때 학부모로서 학교에 가본 일이 있으십니까.

『그럼요. 학교행사에도 적극 참석했어요. 저는 애들 키우면서 철칙 하나를 세웠죠. 아무리 바빠도 아이들 도시락은 내가 싸 주고, 하교할 시간에는 집을 지킨다는 거였어요』

―주부 모범생이시군요.

『그렇게 하려고 노력은 많이 했어요』

李美子씨는 매우 행복하게 보였다. 인터뷰어의 심술은 아니지만, 李美子씨가 싫어할 질문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노라면 가슴 아픈 일도 많게 마련이죠.

『그럼요, 그 아픈 것을 이루 다 뭐라고 표현하겠습니까. 이렇게만 얘기하고 싶습니다. 참기 어려운 아픔이 있었는데, 지금 와서는 제가 「과연 잘 이겨 나갔구나」라는 자부심도 있어요』


「무서리가 저리도 내린」 그녀의 初年

―정재은씨는 요새 노래 안 부릅니까.

『여기선 안 해요. 일본에서…』

―음색이 어머니 李美子씨와 닮았다고 하데요.

『그 얘긴 안 했으면 좋겠는데…』

―한번 만나셨어요?

『글쎄, 그 얘긴 안 했으면 좋겠어요』

답변 거부의 몸짓이 싸늘하고 단호했다.

李美子는 1941년 음력 7월22일 서울 한남동 「빈양모탱이」 마을에서 아버지 李占成씨와 어머니 柳相禮씨의 첫아이로 태어났다. 돌 무렵에 당시 29세이던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수족이 불편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가 어머니와 결혼하면서 중풍으로 쓰러졌다.

집안의 우환이 겹치자 「새댁의 드센 사주 탓」인 것으로 돌려졌다. 어머니는 소박을 맞고 어린 李美子를 업고 친정이 있는 江陵(강릉)으로 쫓겨가다시피 했다. 李美子만 세 살 때 외삼촌의 등에 업혀 한남동 본가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강릉에서 개가를 했다. 李美子는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李美子씨의) 낳은 어머니, 기른 어머니 두 분 다 안녕하십니까.

『낳은 어머니께서는 올해 여든두 살, 기른 어머니께서는 일흔다섯이세요. 두 분 다 건강하셔요』

―낳은 어머니도 李美子씨의 팬이시지요.

『가끔 뵙는데, 별 말씀은 없으시고, 팬은 아닌 것 같아요』

―누굴 더 좋아하십니까.

『두 분 다 좋아해요』

―의붓동생 세 분은 만나 보셨어요.

『그냥 뭐, 우연찮게 한번 볼 기회는 있었어요. 다 지방에 있고 그러니까…』

―6·25 때 고생 많이 하셨다면서요.

『할머니, 아버지, 삼촌, 저 이렇게 넷이 살았는데, 6·25(1950) 발발 직후에는 피란 못 가고 1·4 후퇴(1951) 때는 피란 안 가면 안 되는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 집이 어디였느냐 하면 지금 한남동 「유엔빌리지」가 들어선 「빈양모탱이」에 있었는데, 한강다리가 잘려나가 얼음 언 한강 위로 걸어서 내려갔습니다. 삼촌은 이미 軍에 입대를 하시고, 가족 셋이 피란길에 오른 거예요. 아버지 수족 안 좋으셨죠, 할머니 노년하셨죠, 저는 어렸죠, 여건이 굉장히 안 좋았어요. (경기도)오산의 읍내 중심가를 지날 때는 길 양쪽 상가에서 불이 나 그 중간을 뚫고 지나가는데, 뒤에서는 연방 포탄 터지는 소리가 나더라구요. 걸어서 걸어서 도착한 곳이 충청도 禮山(예산)이었어요』


『처절한 얘기, 이젠 하지 마세요』

―禮山과는 연고가 있으십니까.

『아뇨. 거기서 더 못 내려가겠더라구요. 연고지가 아니었으니까 더 고생했죠. 할머니도 거기서 돌아가셨어요』

―중국집에서 손님이 남긴 자장면을 얻어 먹으셨다면서요.

『아이구, 그 얘기를 또…. 예산에서였죠. 배 고픈데 먹을 것 없으니 그럴 수밖에요. 양조장에서 술 찌꺼기, 그거 얻어 먹고 어린 게 얼굴 벌겋게 취해 가지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밀기울에다 쑥 뜯어다 섞어 개떡을 해 먹고, 그게 얼마나 껄끄러워요. 그런 얘긴 이제 묻지 말아요. 다시는 처참한 얘기, 안 했으면 좋겠어요』

―대구·부산에서도 잠시 피란살이를 하셨다면서요.

『뭘 해야 먹고 살지 않겠어요. 아버지가 부산 국제시장에서 물건 받아 팔고 그러느라고 옮겨 다녔어요. 어버진 일제시대에 (서울) 화원시장에서 식품가게를 하셔서 건강만 하셨다면 우리 집이 살기 괜찮았을 텐데…. 우린 어려서 참 못 살았어요』

李美子는 난리통에 제대로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초등학교와 고등공민학교(중학과정)를 중간중간에 몇 년씩 건너뛴 다음에야 겨우 女高 3년을 마칠 수 있었다.

―李美子씨께서 태어나셨다는 동네 「빈양모탱이」가 무슨 뜻입니까.

『그게 무슨 말인지 나도 모르겠어요. 지금의 한남대교 건너 장충단 쪽으로 가는 길을 가다 왼편으로 꺾으면 지금의 「유엔빌리지」인, 그 동네에서 태어났어요. 당시 이태원 쪽 언덕에는 신도복숭아라고, 왜 껍질이 딱딱하고 벗기면 짝짝 갈라지는 복숭아 있죠. 우리 동네 뒤편은 온통 신도복숭아밭이었요』

「빈양모탱이」란 무슨 뜻일까. 혹시 물가 빈(濱), 볕 양(陽)에다 모퉁이(모탱이)를 더한 合成語가 아닐 것인가. 陽이란 글자는 漢陽·咸陽·洛陽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江 북쪽의 땅」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빈양모탱이」는 「한강 북쪽 물가의 모퉁이에 있는 땅」이라는 의미가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 저는 장충단 가는 길로 참 많이 지나다녔어요. 6·25 때 아버지가 그 길로 지나오면서 목격하셨다는데, 지금의 국립극장 뒷산에서 인민군들이 바윗돌을 굴려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쳐 죽였다고 해요』

―인민군들이 무슨 이유로 바윗돌을 굴려 非전투원인 행인들을 죽였을까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한남동 쪽에서 장충단 쪽으로 가려면 오른쪽으로 꺾어야 하지 않아요. 지금의 타워호텔 앞 큰 도로가 그때는 협곡이었는데 거기에 시체가 이렇게 (그녀는 손을 자신의 눈 부위로 올리면서) 쌓였어요. 그런 무서움을 당했으니 이제(1·4 후퇴)는 안 가면 안 된다 해서 피란을 간 거죠』


『서태지 노래라면 낫 놓고 기역 자 몰라요』

―지금 한국의 음반시장은 「1020」 취향입니다. 젊은 층이 최대 수요층이니까 방송도 그들 위주입니다. 당연한 결과로 중년 이상은 마음 붙일 데가 별로 없어요. 李美子씨의 노래를 테마로 삼아 악극화·연극화한다면 그것을 자양분으로 삼고 험한 세월을 살아온 분들에겐 큰 위안거리가 되고, 짙은 향수도 느낄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동백아가씨」 같은 것이 악극화되기는 했었죠』

―악극으로 만든 「미워도 다시 한번」이 리틀엔젤스 공연장에서 공연되다가 최근 끝났는데, 李선생님도 1960년대에 가요 「미워도 다시 한번」을 부른 적이 있으시죠.

『그때가 LP음반 시절인데, 남진씨가 LP음반 앞쪽에 제가 뒤쪽에 취입했어요. 남진씨가 부른 「미워도 다시 한번」이 더 히트했죠. 「그리운 가슴마다」도 다른 가수하고 그렇게 취입했는데, 제가 부른 게 더 알려지고…. 저로선 악극화하는 것 좋죠, 그러나 그런 것을 제가 앞장설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요』

―중국의 「史書」를 보면 우리 한민족이 歌舞音曲(가무음곡)을 좋아한다고 쓰여 있는데,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튼 우리나라 사람들은 노래 잘 부르는 것 같아요. 이탈리아에 한번 가보니 보통 노인인데, (노래 실력은) 테너가수더라구요. 우리나라나 이탈리아가 모두 반도국이어서 그런지…』

―한반도엔 골짜기가 많은데, 거기서 노래를 부르면 공명작용에 의해 목소리가 근사하게 울리거든요. 그래서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는 풀이도 있습디다.

『지방공연을 다니다 보니 전라도 분들이 공연 관람하는 수준도 높고, 타령·판소리 한 가락씩은 하세요. 그냥 집에 계시는 노인인데, 소리하는 것 들으면 명창이에요. 아무래도 노래는 토양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 가요사에서 큰 획을 그은 가수가 李美子와 서태지라는 평가도 있던데, 서태지의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저의 지식으로는 서태지의 노래를 이해할 수 없어요. IT 시대의 음악, 저는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사람 아닙니까』

―패티金은 어때요.

『저하고 장르는 조금 다르지만, 압도적인 성량으로 분위기 있게 노래하는 훌륭한 가수죠.

이번 KBS 창설 77주년 기념 「빅 쓰리 콘서트」에 패티金·조영남·저, 이렇게 셋이 초대받았어요. 3월3일 밤에 2시간 동안 방영되니 한번 들어보세요』

필자는 인터뷰 엿새 후인 3월3일 밤 10시부터 2시간 동안 텔레비전을 통해 「빅 쓰리」 공연을 시청했다. 李美子씨가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라고 노래할 때 그녀는 역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엘레지의 여왕」이었다. 뜻밖에 그녀는 영화 「와일드 번치」의 주제곡인 멕시코 민요 「제비」도 調(조) 하나를 높여 열창했다. 어떤 장르의 노래도 소화할 수 있다는 은근한 과시가 아니었을까.

패티金은 李美子와는 달리 화려한 제스처로 무대를 휘저으며 무드 있게 노래를 불렀다. 조영남씨를 포함하여 셋이서 한 구절씩 번갈아 부른 「鄕愁(향수)」가 참 좋았다. 그것은 납북시인 鄭芝溶의 詩 「향수」 그대로를 노랫말로 삼은 가곡이다.


『나이대로 늙어 가는 것이 제일 좋아』

―왜 조용필씨는 안 나오는 거죠.

『조용필씨는 여럿이 나오는 共演이나 텔레비전 (출연) 안 하려고 했던가 봐요. 저는 조용필씨도 「국민가수」라고 평하고 싶어요』

―후배 가수들 중 누구를 제일 사랑하십니까.

『성질이 나빠서 그런지, 바깥에 잘 나다니지 않으니 친한 사람 별로 없어요』

―女高시절에 교복 입고 콩쿠르대회에 나가 1등도 하셨으니 성격이 매우 활달하셨다고 해야 하겠는데, 연애 같은 것 해 보신 적 없었습니까.

『헤헤엣, 저 말예요. 여고시절, 굉장히 순박했나 봐요, 전 그걸 몰랐어요. 제 친구들 중엔 남자친구 있는 애들도 있었지만, 전 관심이 없었어요. 뭐, 동갑내기 남학생들은 다 동생같이 보였어요. 호호호∼. 그때 난 가수가 되겠다는 꿈뿐이었죠』

―李선생은 여러 장르의 노래를 다 맛깔스럽게 부르시던데, 여고시절 좋아하던 팝송 가수는 누구였습니까.

『넷킹 콜이 좋더군요』

低音의 흑인 가수 넷킹 콜은 高音의 사우팅도 자유자재로 구사할 만큼 음폭이 넓었다. 그와 반대로 高音의 가수 李美子씨는 「제비」나 「향수」를 부를 때 확인한 바이지만, 低音의 매력이 만만찮았다.

―경쾌한 멜로디의 페티 페이지나 感唱의 가수 안 마거릿은 어떻습디까.

『페티 페이지의 노래는 너무 단조롭고, 안 마거릿의 노래는 너무 움직이는 것이라 저에게는 별로더군요』

―1960년대와 7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는 팝송의 수입국이 아니었습니까.

『그때 우리나라 노래는 소외당했어요. 우리 가요는 천한 노래라는 사회적 인식 때문에 저도 열등의식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뭐, 종로 2가 「쎄시봉」(음악실)에 드나드는 사람은 지식인이고, 「동백아가씨」를 부르면 수준이 낮다고 생각했던 시절 아니었어요? 「동백아가씨」 나올 무렵, 그런 풍조가 가장 심했죠. 사실, 저 자신도 촌닭이긴 했지만…』

―얼굴 같은 데 손 좀 보셨습니까.

『보시면 아시잖아요』

李美子씨의 얼굴에 작은 점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특별한」 성형수술 같은 건 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보톡스 주사 같은 건 맞아 보지 않았습니까.

『보톡스, 전 싫어요. 저는 나이대로 늙어 가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해요. 요즘 텔레비전 보면 얼굴들이 다 이상해요. 표정이 제대로 나오는 사람이 흔치 않아요』

두 손을 모으고 인터뷰에 응하는 李美子씨를 찬찬히 살펴보니 의외로 손톱에 매니큐어도 칠하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물었다.

『매니큐어, 전 싫어요. 전 손톱이 약해서 기를 수도 없어요』

―가톨릭 신자라면서요.

『시가에서 믿으니까 아이들도 다 영세 받았어요. 저는 제대로 된 신자는 아니고 성당에 가서 「나쁜 짓만 안 하겠다」고 약속드리고 있어요』

―미사가 지겹지 않으세요.

『미사 드리는 시간이 겨우 1시간입니다. 집에서도 종일 이러구 있는데, 뭘요』


이미자의 남편 金昌洙씨

李美子씨의 집은 100평형 빌라이다. 3평 남짓한 베란다에 꽃 받침대 같은 것을 설치해 놓았는데, 그 위에 蘭(난) 100여 그루가 화분에 담겨 있다.

―蘭, 참 좋으네요. 구경 한번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집 양반(夫君 金昌洙씨)이 잘 키워 가지고 저도 그냥 구경만 하는 겁니다 (李美子씨는 기자 일행을 베란다 쪽으로 안내했다). 여기서 보셔도 돼요. 이번에는 홍화가 많이 피었어요. 蘭 이름이 다 달라요. 이것은 춘란, 이게 춘하추동 다 있었어요. 한란도 있고, 추란도 있고, 하란도 있고…. 예쁘죠, 꽃들이』

金昌洙씨는 KBS에서 가요 담당 PD 시절에 李美子씨를 처음 만났고, 방송위원시절인 1970년 李美子씨와 결혼했다. 두 사람 모두 재혼이었다.

―향기가 그윽하군요.

『꽃 세 개 핀 것, 이게 일본 춘란인 「여추」라는 건데, 요건 향기가 없어요. 요거 중국 춘란이 향기 짙죠. (남편이) 보살피는 것 보니 아기 키우는 것 저리 가라예요』

―온도계도 달아 놓았군요.

『습도·온도 다 맞춰 줘야 해요. 겨울엔 冬眠(동면)을 시켜 주어야 하구요』

―잠자다니요, 蘭에게 뭘 덮어 줍니까.

『(헤엣) 그건 아니구요. 영상 4∼5도를 유지하면서 습도가 모자라면 저기서(스프링클러에서) 물을 뿜어 주고, 습도가 많으면 환기시켜 주고…』

―여간 정성으론 안 되는 거군요.

『우리 집 양반이 이렇게 蘭을 키우기 때문에 채광이 굉장히 중요해요. 1995년 이 집으로 이사하기로 마음먹기 전에 오전, 낮 12시, 오후, 이렇게 세 번이나 여기 와서 채광 상태를 살폈는데, 괜찮더라구요. 그런데 그 후 우리 집 앞에 빌라가 여기저기 들어서 이젠 낮 12시부터 1시간 정도만 햇볕이 들어와요. 그래도 10년을 살아 익숙해서인지 이 동네, 조용해서 살기 좋아요』

―金선생(김창수씨)의 대학시절 전공이 무엇이었습니까. 혹시 식물학….

『아뇨. 美學이었습니다』

―金선생이 방송국 가요 담당 PD를 하셨죠. 원래 그 방면에 해박하셨습니까.

『그건 잘 모르겠구요, 원래는 문화공보부에 재직하다가 KBS로 발령받으셨대요. 그땐 KBS 직원들도 공무원 신분이었거든요』

―참, 여기 (동행하여 사진취재하는) 李五峰 부장도 경기高 57회, 서울大 61학번 출신인데, 金선생의 고교·대학 6년 후배라고 합디다. 경상도 시골 출신인 金선생이 일찌감치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로 유학하신 거구먼요.

『경북중학교를 졸업하고 올라와 경기高에 들어갔대요』

―金선생은 연세가 높으실 터인데, 여전히 공직에 계십니까.

『1937년생이에요. (KBS에서) 정년퇴임하고 세종문화회관 理事를 하다가 이번 (이명박) 시장님 오신 후 퇴임, 요즘엔 여의도에 사무실 하나 마련해 놓고 다니고 있어요』


『저는 남편에게 생활비 타 쓰는 아내』

―삼성장학재단 이사직을 갖고 계신다던데….

『그건 아직도…』

―金선생과 얘기는 많이 하시는 편입니까.

『워낙 과묵해 가지고 말 잘 안 해요. 저도 애교스러운 점 별로 없고…』

―金선생의 관향은 어딥니까.

『光山 金氏예요』

―좀 따지는 家門 아닙니까. 조선왕조 시절, 大提學(대제학)을 제일 많이 배출한 名門이죠.

『좀 꼬장꼬장한 집안이죠』

―金선생을 한번 뵙고 싶은데요.

『한 번도 기자와 인터뷰한 적 없어요.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어려운 질문은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金선생을 필시 「李美子의 남편」 또는 「돈 잘 버는 아내를 둔 분」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金선생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보고 싶은 겁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분에게 가장 아픈 얘기일 수 있잖아요. 여자의 이름이 더 잘 알려져 「누구의 남편」이라고 불리는 데 어려움이 많았을 거예요. 제가 그분보다 많이 번다는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저는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이제껏 생활비를 타 썼어요. 저의 신념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그렇게 실천하는 거예요. 돈이란 어떻게 벌었느냐보다는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죠. (남편이) 관리를 잘 했기 때문에 남에게 꾸러 가지 않고 이만큼 사는 거예요』

―李美子씨는 오랜 세월에 걸쳐 히트곡 많이 냈으니 돈 많이 버셨죠.

『우리 시대엔 바쁘기만 했지 돈하곤 인연이 별로 없었어요. 그 당시, 제가 한창 인기 있을 때는 신곡 발표해도 인세가 없었어요. 요즘하곤 다르죠』

―公演하면 하루 출연료가 어느 정도입니까. 15년 전에는 1회 공연에 500만원쯤이라고 하셨던데….

『더 받기도 덜 받기도 하고 대중 없어요. 의상비 같은 경비도 들어가고 실속은 별로예요. 또 그런 무대 매월 하는 것도 아니고, 요즘 방송국 뛰는 것도 아니고…』

―참, 장호원 가는 길에 있는 과수원은 잘 됩니까.

『한때는 청과시장에서 「이미자네 사과」 하고 알아줬는데, 이젠 힘들어 그냥 놀리고 있어요』

李五峰 사진부장은 15년 전에 학교선배인 金昌洙씨를 따라 장호원 과수원에 놀러가서 『사과를 실컷 먹고 돌아올 때도 한 보따리 따 왔다』고 기억한다.

―4만 평 과수원 옆으로 큰길이 났다더군요. 그러니 이제 큰 부자가 되신 것 아닙니까.

『그분이 원래 시골 출신이라 땅을 좋아해서 100평, 200평씩 매입하고 주변의 야산도 좀 사들인 거예요. 이런 우리가 큰 부자라고 하면 진짜 부자가 웃겠어요. 그저 남에게 꾸러 가지 않고 써야 할 데가 있으면 아껴 가며 쓰는 정도입니다』

金昌洙씨는 전처 소생의 두 딸과 李美子씨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李美子씨는 1989년 30주년 기념공연 때 『소원이 뭐냐』는 물음에 『(高3) 아들이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바 있다. 지금 방배동 집의 응접실에는 金昌洙씨 부부와 아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아드님, 이젠 결혼했지요.

『그럼요. 딸도 하나 있는 아비인데…』

―원하는 대학엔 갔습니까.

『원하는 데는 떨어졌구요, 1년 후 일본 게이오(慶應)대학에 유학하여 석사까지 했어요』

―전공은 무엇입니까.

『정치학인데, 석사논문은 「일본 천황제 연구」였어요. 지금은 영국에 가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어요. 영국도 입헌군주제 나라 아닙니까, 지도교수님이 그곳 유학을 권했대요』

―몇 년차입니까.

『지금 2년째예요. 앞으로 (박사학위 취득까지) 한 3년 보는데, 모르겠어요. 그게 쉽게 따지는 건 아니잖아요』

―영국에 있는 손녀 보고 싶죠.

『보고 싶어요. 애 돌 지나고, 아! 이제 16개월인가 보다…』

―아들 위로 두 따님도 시집가서 잘 살지요.

『두 딸 모두 1남1녀씩 두었어요』

―아이구, 그럼 벌써 다섯 손자·손녀의 할머니시군요.

『그러믄요』


『노랫말의 정확한 전달은 가수의 기본』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3시간여에 걸친 인터뷰였지만, 조금도 지쳐 보이지 않았다. 당대 최고의 「목소리」와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기자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었던 행복이라고 느꼈다.

기자에게 가장 싫은 작업 중 하나는 인터뷰를 끝낸 뒤 돌아와 녹음 테이프를 돌리며 오고간 말을 문자로 바꾸는 일이다. 그러나 이번만은 예외였다. 本誌 독일 통신원 백선균씨의 글이 다시 생각난다. 제목은 「이미자의 국어사랑」이다.

<나는 李美子씨를 가수 이상으로 귀중하게 여긴다. 그의 노랫말 발음은 무엇보다 얼버무리는 데 없이 깔끔하다. 그의 노래를 들으며 그의 정확한 국어 발음을 배우자! 그는 국어 발음에 있어 여느 사람이 흉내낼 수 없을 정도의 독보적인 존재이다. 나는 감히 이를 애국으로 標識(표지)하고자 한다>

필자의 녹음 테이프에 기록된 인터뷰를 틀어 보니 과연 그러했다. 백선균씨의 지적처럼 李美子씨의 발언 중 자음접변·두음법칙 등 한글발음법칙에 어긋난 곳을 거의 발견하지 못했다. 인터뷰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李美子씨는 『노랫말의 정확한 전달은 가수의 기본』이라고 말했다. 李美子씨는 『신곡을 받으면 노랫말부터 먼저 마음에 새기면서 어디에 포인트를 둘 것인가부터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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