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심층연구] 新羅 花郞道와 日本 武士道

영화「라스트 사무라이」를 보고 花郞道를 생각했다

글 정순태 기자  2004-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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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에서 만든 東洋 歷史 관련 영화는 다시는 안 보기로 작심했던 적이 한두 번 아니었다. 시나리오·무기·의상 등 곳곳에서 엉터리가 많은 데다 서양인의 눈으로 東洋의 역사인물을 제멋대로 재단했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이 「라스트 사무라이」를 함께 보러 가자고 청했을 때 처음엔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행했던 것은 美國 사람은 사무라이를 과연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가 다소간 궁금했기 때문이다.

사무라이라면 1192년부터 1867년까지 장장 675년 동안 日本 사회를 지배했던 武家정권과 戰國시대의 주체세력이다. 사무라이를 알아야 日本이 보인다고 한다. 지금도 일본인들은 「武士道(무사도: 부시도)가 日本精神의 뿌리」라고 말하고 있다.

東京大 교수와 國際聯盟 사무차장을 역임했던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는 1899년 英文으로 쓴 「Bushido, the Soul of Japan」(武士道, 日本 靈魂·1899, 이하 Bushido로 표기)에서 다음과 같이 예언한 바 있다.

『武士道는 하나의 독립된 도덕의 규칙으로 소멸할지도 모르지만, 그 힘은 이 땅(日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는 일본인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서인지 디테일이 매우 강했다. 여기에다 할리우드의 첨단 촬영기법까지 가세되어 영화로서의 완성도도 상당히 높았다.

벚꽃이 눈발처럼 휘날리며 스러져 가는 가운데 죽음을 각오한 사무라이들이 감행하는 최후의 돌격―영화의 라스트 신은 「사무라이式 自己完成」을 이런 모습으로 표현했다. 그것이야말로 『武士道는 日本의 상징인 벚꽃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다』는 「Bushido」의 첫 구절을 활동사진으로 再現한 것이었다.

「라스트 사무라이」는 美國의 개봉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지만, 한국의 극장가에선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의 강세에 밀려서인지 「예상보다는 별로…」의 흥행을 기록한 것 같다. 영화 평론가들의 코멘트도 매우 조심스러웠다.

<서구인들의 눈에 자칫 건전한 군인정신으로 비칠지 모를 武士道는 日本 군국주의의 사상적 뿌리라는 점에서 영화 속에서 계속되는 사무라이 미화 작업은 다소 개운찮은 뒷맛을 남긴다. 새해 초부터 주변국들의 반대에도 꿋꿋하게 神社 참배를 강행한 일본 총리의 모습이 아직 잔상에 남아 있기 때문일까>


「대표적 日本人의 筆頭」 사이고 다카모리

영화에서 「가쓰모토」는 虛構(허구)의 인물이긴 하지만,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연상케 한다. 에드워드 즈익 감독도 『가쓰모토의 실제 모델에 가까운 사이고 다카모리의 일대기 「高貴한 失敗」에서 영감을 얻어 이 영화를 구상했다』고 밝힌 바 있다.

사이고 다카모리(1827~1877)는 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와 더불어 「維新(유신)의 三傑(3걸)」로 불리는 인물이다. 니토베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전형적인 사무라이」라고 평가했다. 1908년에 발간된 우치무라(內村鑑三)의 英文 저작 「Representative Men of Japan(代表的 日本人)」에서도 그 筆頭(필두)의 인물은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사쓰마藩(번)의 하급 사무라이 출신인 사이고는 討幕(토막: 막부 타도)운동의 중심적 지도자가 되어 시대의 흐름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1873년 「征韓論(정한론)」을 주장한 끝에 明治정부에서 밀려나고, 1876년에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전 끝에 자결했다. 이제, 말머리를 다시 「라스트 사무라이」로 돌려야 할 것 같다.

美國 남북전쟁의 영웅 알그렌 대위(톰 크루즈 扮)는 퇴역 후 시골장터에서 라이플(소총) 판매촉진을 위한 「피에로」로 연명하면서 술타령의 세월을 보내다 우연한 기회에 日本 신식군대의 훈련 담당 교관으로 픽업되어 태평양을 건넜다. 알그렌은 가쓰모토(켄 와타나베 扮)의 반란군과 전투 중에 포로가 되었는데, 포로생활 중 가쓰모토에게서 武士로서의 짙은 동류의식을 느끼고 사무라이 수업을 거쳐 가쓰모토의 휘하에서 사무라이 반란군으로 활약하게 된다.

드디어 결전의 시기가 다가왔다. 곡사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정부군에 맞선 최후의 전투에서 가쓰모토는 전사하고, 알그렌은 정부군의 포로가 되었다. 하지만 알그렌은 新정부가 홀시할 수 없었던 미국 사람이어서 그런지(영화에선 그 과정을 생략했지만), 天皇(천황)까지 알현하고 사랑하는 일본여인(가쓰모토의 여동생) 곁으로 돌아간다.

이 영화를 함께 본 친구들 사이에 『助演 가쓰모토와 主演 알그렌 중 누구를 라스트 사무라이로 설정했는지 애매하다』는 가벼운 논란이 있었다. 다음은 한 친구의 견해이다.

『알그렌과 같은 상황에 처한 사무라이라면 셋부쿠(切腹: 자기의 배를 스스로 갈라 죽음)를 해야 하는 것 아냐? 그런 용기를 내지 못했다면 일개 傭兵(용병)일 뿐이지 사무라이로서는 자격미달이다』

니토베도 「Bushido」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武士道에서는 명예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는 죽음을 많은 복잡한 문제 해결의 열쇠로 받아들였다. 큰 뜻을 품은 사무라이는 다다미 위에서 죽는 것은 기개가 없는 죽음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들이 꿈꾸는 죽음이 아니었다>


明治정부 최초의 大將으로 에도幕府를 굴복시켜

「가쓰모토」의 모델이 된 사이고 다카모리는 파란만장한 삶을 기록한 인물이다. 1868년 1월, 사이고는 메이지(明治)정부의 大總督參謀(대총독참모)로서 교토(京都) 외곽 도바(鳥羽)·후시미(伏見) 싸움에서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지휘한 幕府軍(막부군)을 대파했다. 「대총독」이란 명예적 지위는 皇族(황족)의 차지였던 만큼 실질적인 최고사령관은 明治정부 최초의 육군대장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1868년 3월, 사쓰마·조슈(長州)·도사(土佐) 藩兵(번병)으로 구성된 新정부군은 에도(江戶: 지금의 東京)城을 포위했다. 에도城에 대한 총공격이 임박하자 막부 측을 대표한 가쓰 가이슈(勝海舟)는 사이고를 찾아와 「將軍 요시노부의 칩거」를 협상안으로 제시했다.

다음날, 이어 열린 회담에서 사이고는 「막부 측에서 요시노부에 대한 처벌의 경감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휘하 부대에 에도城 공격의 중지명령을 하달했다. 이로써 新정부군은 에도에 無血入城(무혈입성)할 수 있었다(1868년 4월).

이후에도 막부군의 잔당들이 홋카이도의 하코다테 등지로 후퇴하여 최후의 저항을 전개했지만, 모두 각개격파되었다. 이로써 王政復古(왕정복고)의 「大號令(대호령)」 때문에 일어났던 戊辰戰爭(무진전쟁)은 6개월 만에 끝나고 舊막부 세력은 일소되었다.

新정부의 국내 통일에 전공이 높은 사이고가 반역의 길을 걷게 된 까닭은 바로 「征韓論」 때문이었다. 여기서 征韓論을 둘러싼 明治정부 내부의 갈등상황을 잠시 짚어 볼 필요가 있다.


內治派 이와쿠라와의 대립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를 모르고는 明治維新을 논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천황의 侍從(시종) 출신으로 右大臣이 된 이와쿠라는 明治維新期에 朝廷 내부 세력을 이끄는 중심인물로서 아직도 미스터리인 「코메이(光明) 천황 독살 사건」의 주범으로 의심받고 있는 정략가였다. 코메이 천황은 철저한 攘夷論者(양이론자)이면서 幕府와 타협적이었던 만큼 討幕派(토막파)에겐 매우 거북한 존재였다.

코메이 천황이 急死(급사)하자 이와쿠라는 15세의 메이지 天皇을 옹립, 討幕論(토막론)을 전개함으로써 王政復古의 계획·실행자가 되었다. 그는 급진파 公卿(공경)의 세력을 강화하고, 幕府에 도전적인 사쓰마·조슈, 두 藩(번)과의 제휴를 굳게 했다. 국내 통일 후 실권을 장악한 이와쿠라는 富國强兵(부국강병)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富國强兵의 앞길에는 큰 장애물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것은 幕府 말기 西洋 제국의 압력에 굴복해 체결한 불평등조약(安政條約)이었다. 이 불평등조약의 개정이야말로 新정부 최대의 외교과제였다.

드디어 「이와쿠라 遣外使節團(견외사절단)」이 구성되어 첫 방문국인 미국으로 출발했다. 이와쿠라를 전권대사,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副使로 삼은 거국적인 진용이었다. 사절단에는 약 60명의 유학생이 선발되어 동행했는데, 그중엔 5명의 여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조약 개정을 위한 美國과의 예비교섭에서 「준비 부족」 등에 의해 실패했다. 「준비 부족」이라기보다 아직 日本에게는 조약개정을 이끌 만한 국력이 없었다. 그러나 사절단의 순방은 단순한 外遊가 아니었다. 그들은 歐美 선진 12개국의 제도·문물을 열성적으로 배우고 1년10개월 후인 1873년 9월에 귀국했다. 일본근대사에서는 이를 「新국가 건설에 있어 기념비적인 장거」라고 평가하고 있다.

정치 면에서는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로부터 『大國에 항거하여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君主權(군주권)의 강력한 독재체제가 필요하다는 점을 배웠고, 경제 면으로는 철과 석탄을 중심으로 하는 英國의 자본주의적 大공업에서 교훈을 얻었다』는 것 등이었다.

이와쿠라의 해외시찰 기간 중 新정부의 실권은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이타가키(板垣退助), 에토(江藤新平), 고토(後藤象一郞), 소에지마(副島種臣) 등이 장악했다. 이때 사이고는 征韓論을 제창했다. 新정부에 대한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朝鮮 침략으로 돌리려는 속셈이었다. 사이고는 1873년 8월 太政大臣 산조(三條實美)에게 접근하여 자신이 전권대사가 되어 朝鮮에 건너갈 공작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쿠라가 귀국하자 征韓論은 대번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이와쿠라를 비롯한 오쿠보·기도가 征韓論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時機尙早論(시기상조론)」를 내세웠다. 이와쿠라 등을 內治派(내치파)라고 하는데, 그들의 정책은 朝鮮出兵보다 국내문제 해결과 국권신장을 優先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明治정부는 「征韓派」과 「內治派」로 양분되어 날카롭게 대립했다. 10월에 이르러 오쿠보의 막후공작에 의해 천황 메이지가 內治派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에 분개한 사이고는 정부에서 물러났다. 사이고를 지지했던 에토, 이타가키, 고토 등도 모두 퇴진했다. 이후 오쿠보가 코메이 천황의 독살 혐의를 받았던 이와쿠라를 제치고 新정부의 실권을 장악하여 독재체제를 강화했다.


「최후의 사무라이 반란」 西南전쟁

征韓論에서 패배한 사이고는 1873년 10월, 고향인 가고시마(鹿兒島: 舊사쓰마藩)로 돌아왔다. 그를 따르던 사무라이들도 일제히 사직하고 가고시마로 귀향했다. 사이고는 가고시마에 私學校를 설립하고 士族(武士)의 자제들을 가르쳤다.

당시, 사쓰마 사무라이들의 대부분은 征韓論의 패배 이후 反정부로 돌아섰고, 가고시마縣은 이른바 「사이고의 독립왕국」이 되어 地租(지조)개정·徵兵令(징병령) 등 중앙정부의 명령을 무시했다.

때마침 전국 각지에서 士族의 특권 상실에 따른 不平 사무라이가 反정부 반란을 일으켰고, 부담이 늘어난 농민들의 봉기도 잇달아 발생하고 있었다. 1871년, 廢藩治縣(폐번치현)의 단행으로 중앙집권체제의 기초를 확립하고, 斷髮令(단발령)에 의해 사무라이의 촌마게(사무라이의 상투)가 강제로 잘려 나갔다. 『촌마게를 자른 머리를 두들기면 문명개화의 소리가 난다』는 비아냥거림 속에서 사무라이의 위신은 추락되어 갔다.

1876년에는 廢刀令(폐도령), 즉 칼을 차고 다니는 사무라이의 풍습을 폐지하는 법령이 발표되었다. 니토베의 「Bushido」에 따르면 「칼은 사무라이의 영혼」이며 「충성과 명예의 상징」이었다. 사무라이들에 대한 家祿(가록)의 지불도 중단되었다. 폐도령은 사무라이의 특권을 부정한 것으로, 허리가 허전해진 사무라이 중에는 담뱃대를 꽂기도 하고, 대나무칼을 차고 다니는 등 덧없는 저항을 시도하기도 했다.

1870년 이후 士族·농민반란이 아홉 차례에 걸쳐 잇달아 발생했다. 정부는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전형적인 사무라이」 사이고의 동향을 예의 주시했다. 드디어 정부는 반란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가고시마의 화약고에서 무기·탄약을 상선으로 오사카로 이송하려고 했다. 사이고로선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1877년 1월 말, 가고시마 私學校 생도들은 드디어 화약고와 조선소를 습격, 정부의 탄약과 무기를 탈취했다. 사이고는 2월15일 휘하의 군사 1만5000명을 이끌고 上京戰(상경전)에 나섰다. 반군의 병력은 곧 3만 명으로 증강되었다. 반군은 北上하여 규슈 방면 정부군 사령부인 구마모토 鎭臺를 포위했다.

급보를 받은 오쿠보는 구마모토 鎭臺사령관 다니(谷干城)에게 구마모토城의 死守를 명하는 한편 정부군을 투입했다. 사이고의 반군은 장비와 병력수에서 월등했던 정부군을 당할 수 없었다. 근대적 군사훈련을 받은 농민군이 대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하여 사무라이軍을 압도했던 것이다.

사이고의 잔당 600명은 가고시마로 후퇴했다. 9월24일, 정부군의 총공격으로 반란군의 최후 보루였던 시로야마(城山)가 함락되는 가운데 사이고는 자결했다. 이것이 최후의 士族반란으로서 규모도 가장 컸던 「세이난(西南) 전쟁」의 경과이다. 세이난 전쟁의 종결로 7년여 동안 10차례에 걸쳐 발생한 사무라이의 반란 및 농민의 봉기가 모두 진압되어 新정부는 안정을 찾게 되었다.


『가장 발전된 사상을 지닌 日本人의 表皮를 벗기면 사무라이가 보인다』

그렇다면 西南전쟁의 敗將(패장) 사이고 다카모리의 죽음으로 사무라이의 시대는 終止符(종지부)를 찍었던 것일까. 결코 그렇진 않다. 니토베는 「Bushido」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근대일본을 건설한 사람들의 성장의 근원을 찾아보자. 이토 히로부미, 오쿠마 시게노부,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의 회상록은 말할 것도 없고, 사쿠마 조잔(佐久間象山),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토시미치, 키도 다카요시 등의 흔적을 더듬어도 좋다. 그들이 생각하고 쌓아올린 것의 원동력이 武士道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인용문은 반군의 지도자 사이고나 그를 토벌한 오쿠보나 시기상의 先後문제에서만 달랐을 뿐이지 한반도를 먹는다는 원칙에는 다를 바 없었다는 점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그들 모두가 富國强兵의 실행 프로그램만 달랐을 뿐 근대일본을 세운 武士道의 신봉자들이었다는 얘기다.

다시 니토베의 말이다.

<청일전쟁(1894~1895)에서 日本은 무라타(村田) 총과 크루프 총 덕분에 승리를 거두었다고 말한다. 이 승리는 근대적인 학교교육의 성과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진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중략)

압록강에서, 한반도나 만주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우리를 이끌고 우리의 마음에 용기를 북돋워 준 조상들의 영혼이었다. 이들의 영혼, 우리의 용감한 선조는 죽음에 굴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보는 눈을 가지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확실하게 보일 것이다.

가장 발전된 사상을 가진 일본인의 表皮(표피)를 벗겨 보자. 거기서 사람들은 사무라이를 보게 될 것이다>

일본의 對外膨脹史(대외팽창사)는 언제나 한반도를 첫 燔祭物(번제물)로 삼았다. 高麗 중기 이후 倭寇의 침입, 임진왜란, 근대에 들어서는 청일전쟁·러일전쟁이 모두 그러했다. 금년 초에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칼만 차지 않은 사무라이의 차림으로 이세(伊勢)신궁을 참배했다. 日本 국수주의 제1의 성지인 이세신궁은 태평양전쟁 전범들의 위폐가 봉안되어 있는 곳이다.

니토베는 가장 발전된 사상을 가진 일본인의 表皮, 즉 껍데기를 벗기면 사무라이를 보게 된다고 했다. 이것은 사무라이를 모르면 일본인을 알 수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사무라이」라는 말은 어디서 유래된 말인가.

<사무라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에는 武士를 부르는 대표적인 명사가 되어 있다. 그러나 武士에게 이만큼 비참한 宿命을 나타내는 말은 없다. 왜냐하면 이 낱말은 「사부라우」라는 動詞가 名詞化한 것으로서, 主君 곁에서 모시는 從者(종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것도 主君을 지키기 위해 모신다는 의미로서 自力으로 자유의 천지를 활보하는 勇者를 나타내는 말은 아니다. 律令制하에 있어서 무사의 지위는 그러하였지만, 10세기경부터 체제가 이완되기 시작, 드디어 일본 고대국가의 쇠퇴를 초래하게 되어 그로부터 무사가 등장해서 가마쿠라 幕府가 성립했던 것이다>

위의 글은 李鍾學 교수의 저서 「新羅花郞軍事史硏究」(신라화랑군사사연구) 중 「新羅系 渡來人(신라계 도래인)과 日本武士團의 形成」 부분에서 인용한 것이다. 李鍾學 교수는 武士道의 원류를 新羅의 花郞道로 보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이 글의 흐름 상 뒤에서 詳述(상술)할 것이다.


律令政治의 문란과 武士의 등장

이제, 사무라이의 뿌리를 추적할 차례이다.

헤이안(平安) 시대 말기에 律令정치가 문란해진 가운데 후지와라(藤原)氏, 후지와라氏 중에서도 4개의 특정가문 출신이 아니면 중앙관직을 차지하기 어려웠다. 任官을 희망하던 귀족 등은 私財를 바쳐 인사권을 지닌 公卿(공경)들로부터 國司(국사)라는 지방 관직을 얻었다.

지방통제권을 장악한 國司 중에는 세금을 가로채는 등의 부정을 자행, 私腹(사복)을 채우는 자가 많았다. 國司의 벌이가 좋아지자 후지와라 정권은 정원 이상의 國司를 임명하기도 했다.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國司의 불법을 성토하는 호족, 즉 莊管(장관)·郡司(군사)·鄕士(향사) 등의 반란이 잇달아 일어났다. 호족들은 國司의 횡포에 대항하고 도적떼에 대비하기 위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의 私的 소유를 배경으로 무사단을 조직했다.

무사단은 그 首長과 혈연관계가 있는 이에노코(家子), 혈연관계가 없는 家臣인 로우토우(郎黨)와 쇼주우(所從: 하층농민)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무사들은 처음엔 「武者(무샤)」라고 했는데, 「사무라이(侍)」라고 불리게 된 것은 교토(京都)의 고위귀족이 그들을 불러 올려 호위·숙직 등을 시킨 데서 나온 칭호이다.

지방호족들로서는 중앙의 고위귀족에 접근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최선의 방법이었다. 지방에 많은 장원을 소유한 중앙의 귀족들로서도 그것을 수호·관리하기 위해선 지방호족의 武力을 필요로 했다.

강력한 세력을 가진 호족은 國司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호족 가운데 유력자를 追捕使(추포사)나 押領使(압령사)로 임명하여 중앙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호족들을 다스리게 했다.

大무사단은 東北이나 九州 같은 변경에 많았다. 그 대표적 존재가 미나모토(源)氏와 다이라(平)氏였다. 939년 平將門(다이라노 미사카도)의 반란, 941년 세토 內海 일대의 해적 藤原純友(후지와라 스미토모) 반란 등을 진압한 것도 다이라氏와 미나모토氏였다. 특히 미나모토氏는 東國지방(도쿄 근방)에서 지반을 굳혔다.

12세기 중엽 이후 上皇과 天皇 사이에, 후지와라(藤原)氏와 上皇의 近臣 사이에, 그리고 네 가문으로 분열한 후지와라氏 사이에 세력다툼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그때마다 황실이나 유력귀족들은 지방 무사단을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야단이었다.

당시 대표적인 내란이 保元의 亂(1156)과 平治의 亂(1159)이었다. 이때 지방 무사들은 자신들의 실력을 중앙 귀족들에게 한껏 과시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은 차츰 「武士들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여기서 우선, 武士들이 지배했던 시대를 거칠게나마 정리해 놓아야 中世 이후 日本史를 꿰뚫어 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武士로서 맨 처음 정권을 장악한 것은 다이라 기요모리(平淸盛)였다. 기요모리는 平治의 亂 과정에서 경쟁세력인 미나모토(源)氏를 제압한 뒤 불과 8년 만에 조정의 최고위직인 太政大臣에 올랐으며, 자신의 처제와 딸을 황후로 들여보내 외척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다이라(平)氏 일족은 대거 고위직에 오르고 많은 토지를 겸병하여 『다이라氏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는 말이 나돌 만큼 전성시대를 누렸다. 그러나 이 같은 다이라氏의 귀족화는 점차 지방무사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다이라氏의 횡포가, 170년 동안 納妃(납비)를 통해 「攝關政治(섭관정치)」를 해온 후지와라氏의 권력 독점 행태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攝關政治라는 것은 후지와라氏 중 유력자가 자기 딸을 어린 天皇의 妃(비)로 入宮시켜 외척으로서 攝政(섭정)을 맡아 천황을 대리하고, 천황이 成年이 된 후에도 關白(관백)이 되어 국정을 주물렀던 헤이안 시대 말기의 통치방식이었다.


최초의 武士政權 세운 미나모토氏

이러한 때 關東에서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가 다이라氏 타도를 외치고 擧兵(거병)했다. 요리토모는 동생 요시쓰네(義經) 등으로 하여금 京都에 진군하여 다이라氏를 토벌토록 하고 추격전을 벌여 마침내 단노우라(壇♥浦: 지금의 시모노세키)에서 다이라氏의 세력을 전멸시켰다. 이때 다이라氏가 옹립했던 안도쿠(安德) 천황도 바다에 투신, 자살했다. 1183년에서 1185년까지 계속된 두 가문의 패권전을 日本史에서는 「겐페이(源平)의 쟁란」이라고 말한다.

1192년 요리토모가 征夷大將軍(정이대장군)에 올라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되었다. 요리토모는 오우(奧羽: 동북지방)까지 제압하여 幕府정치의 기초를 다졌다. 가마쿠라 막부는 일본 최초의 武士정권이었다.

요리토모의 死後, 후계자인 두 아들의 무능력 때문에 미나모토 집안은 3代 만에 멸망했다. 미나모토氏를 대신하여 가마쿠라 막부의 「執權」으로서 실권을 장악한 것이 호조(北條)氏였다.

호조氏 전성시대의 정치는 후세 武士정권의 모범이 되었다. 특히 제8대 도키무네(北條時宗)의 執權 시기이던 1274년과 1281년, 가마쿠라 막부는 두 차례에 걸쳐 규슈를 침입한 麗蒙(여몽)연합군을 격파, 무사정권의 위신을 높였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는 麗蒙연합군과의 전쟁에 따른 경제파탄 등의 휴유증으로 반세기 만인 1333년에 멸망했다. 가마쿠라 막부 타도에 성공한 고다이고 천황은 「建武의 新政」을 추진했으나 3년도 되지 않아 붕괴하고 말았다. 「建武의 新政」 시기에 주력했던 일 자체가 궁전 造營(조영)과 귀족정치의 부활 등 복고적이었는 데다 論功行賞(논공행상)에서도 호조氏 타도 때 실제로 전공을 세운 무사들보다 천황 주위의 公卿들을 더 우대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형세를 이용해서 武家정권의 재흥을 노린 무사가 아시카가 다케우지(足利尊氏)였다. 1336년 다케우지는 京都를 제압하고 京都의 무로마치(室町)에 막부를 열었다. 무로마치 막부는 守護大名들이 두 패로 나뉘어 쟁투를 벌인 應仁의 亂(1467) 이후 통제력을 잃고 京都는 황폐해졌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100여 년간의 戰國시대로 돌입했다.

戰國시대에 각 지방에 뿌리를 내린 有力 무사들은 「戰國大名」이 되어 서로 패권을 다투었다. 그 가운데 가장 두각을 나타낸 武將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였다.

노부나가는 1560년 오케하자마(桶狹間) 싸움에서 戰國大名인 이마가와(今川)氏를 멸망시킨 이래 약 20년간에 걸쳐서 전국통일을 추진했지만, 1582년 그의 4촌 妻男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반란(本能寺의 變)에 의해 쓰러짐으로써 그의 「天下布武(천하포무)」는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다.


戰國 명문 다케다 가문의 氏祖은 新羅三郞

노부나가가 죽은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되어 日本통일을 달성하게 되지만, 전국시대 100여 년을 통틀어 역사적 의미가 가장 컸던 결전은 노부나가와 다케다 家門 간에 전개된 나가시노(長)의 合戰이었다. 다케다 家門이야말로 日本武士의 源流를 계승한 최고의 명문으로서 그 시조가 新羅系 渡來人(도래인)이라는 사실은 오늘날 일본학계에서도 정설로 인정되고 있는 바다.

다케다 가문의 氏祖는 「신라사부로(新羅三郞)」라는 이름의 무사이다. 다케다 가문의 氏祖가 신라사부로라는 것은 日本 무사의 뿌리가 新羅系임을 말해 주는 유력한 증거의 하나이다. 이와 관련한 사료는 뒤에서 제시될 것이다.

1575년 5월, 미카와(三河)의 나가시노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연합군과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賴)가 이끄는 무적의 騎馬軍團(기마군단)이 日本열도의 覇權(패권)을 건 운명의 결전을 벌였다. 나가시노 合戰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그보다 3년 전에 兩 진영이 격돌했던 미카타가하라(三方ケ原) 합전부터 살펴야 할 것 같다.

미카타가하라의 영웅은 가쓰요리의 아버지이며 戰國武將(전국무장) 가운데 최고의 전략가로 손꼽혔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다. 가이(甲斐: 오늘날의 山梨縣)의 守護大名(수호대명)이었던 신겐은 최강의 騎馬軍團을 이끌고 시나노(信濃) 지방을 병합하고 京都로 진군했다. 당시의 상황은 구로다 아키라(黑田明)가 감독한 영화 「가게무샤(影武士)」를 통해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다.

1572년 10월, 신겐의 騎馬軍團은 노부나가-이에야스의 연합군을 도오미(遠江) 지방의 미카타가하라에서 철저하게 유린했다.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에게 「가이의 호랑이」 신겐은 버거운 상대였다. 더욱이 上京戰을 먼저 감행하는 바람에 四面에 적을 두었던 노부나가로서는 신겐과 전면전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

이 같은 절대불리의 상황에서 노부나가에게 起死回生(기사회생)의 행운이 다가왔다. 신겐이 신병으로 급사했던 것이다. 신겐은 임종 때 가족들과 家臣들에게 자신이 죽더라도 3년간은 비밀에 부치라는 유언을 하고 숨을 거두었다. 이때가 1573년 4월12일, 신겐의 나이 52세였다.

신겐의 죽음으로 다케다 家門의 當主는 아들 가쓰요리로 이어졌다. 가쓰요리는 아버지의 유언을 철저히 지켰다. 신겐과 용모가 비슷한 사내를 구해 신겐인 것처럼 위장·행세케 함으로써 적들의 눈을 속였던 것이다.

그러나 「가짜 신겐」의 정체는 2년 만에 드러나고 만다. 신겐의 侍妾(시첩)이 되어 다케다家에 잠입해 있던 적의 스파이가 雲雨之情(운우지정)을 나누던 중 「가짜 신겐」의 정체를 확인했다고 한다. 신겐은 어깻죽지에 칼자국이 도드라져 있었는데, 「가짜」가 그것까지는 위장하지 못했던 것이다. 신겐의 죽음은 곧 적들에게 새어나갔다.


德川家康을 궁지로 몰았던 다케다의 騎馬軍團

더 이상 아버지의 죽음을 감출 수 없었던 가쓰요리는 다케다 가문의 願刹(원찰)인 惠林寺(혜림사)에서 2년 만에 신겐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다. 惠林寺에는 다케다 가문의 시조인 신라사부로(新羅三郞)의 神像(신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가쓰요리는 新羅사부로의 신상 앞에 엎드려 武運長久(무운장구)를 기원했다.

新羅사부로의 원래 이름이 미나모토 요시미쓰(源義光)라는 것은 이미 일본의 역사가들도 인정하는 史實이다. 다케다 신켄보다 약 500년 전에 태어난 미나모토 요시미쓰가 왜 자신의 성씨를 「新羅」로 바꾸었는지에 관해서는 뒤에서 상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1573년 7월20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스스로 대병을 이끌고 본거지인 하마마쓰(♥兵松)를 출발하여 나가시노城을 공격했다. 도쿠가와로서는 자신의 領地(영지)를 깊숙이 파고들어 다케다軍의 공격기지가 된 나가시노城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야스의 나가시노城 탈환작전은 이렇다 할 접전도 없이 성공했다. 이에야스와 사전에 내통한 가쓰요리 진영의 배반자에 의해 나가시노城은 쉽게 함락되었던 것이다.

이에 가쓰요리로서는 이에야스에 보복하지 않으면 戰國大名으로서 면목이 서지 않았다. 그해 11월, 가쓰요리는 스스로 1만5000兵을 이끌고 이에야스의 본거지 하마마쓰城의 턱밑까지 유린한 다음에 일단 가이로 돌아갔다. 이어 1574년 2월, 3만의 대군을 이끌고 미노(美濃)에 침입, 이에야스의 동맹자인 노부나가의 屬城(속성)인 아케치(明智)城을 함락시키고 4월에는 아스케(足助)城을 공략했다.

이에야스도 필사의 방어전을 전개했지만, 다케다 기마군단의 진격은 무시무시하여 다카텐신(高天神)城을 함락시켰다. 도오미(遠江) 지역 최대의 요새인 다카텐신성의 함락은 이에야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에야스로서는 나가시노城 점령이라고 하는 打點을 먼저 올렸지만, 곧 그에 비해 2배 이상 되는 강렬한 카운터 펀치를 얻어맞은 셈이었다. 이에야스는 동맹자인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急使(급사)를 날렸다.

1575년 5월13일, 노부나가는 스스로 3만 대군을 이끌고 본거지 기후(岐阜)를 출발했다. 이때의 출진은 노부나가로서도 중대한 결단이었다. 수도권(畿內)에서 反노부나가 세력과의 투쟁이 예측불허의 상황이었지만, 불가피한 응전이었다. 이에야스를 돕지 않으면 이에야스가 항복 또는 패전하여 노부나가 진영의 「동쪽 방파제」가 붕괴될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다.


新전술- 鐵砲隊의 연속사격





노부나가는 구원군을 편성하면서 鐵砲(철포: 鳥銃) 3000정으로 무장한 부대도 동원했다. 철포부대의 實戰 투입은 당시로선 혁신적인 일이었다. 철포부대는 직경 10cm 정도의 통나무를 휴대했다. 노부나가의 전술은 나가시노城 서쪽 10리 지점의 設樂原에 통나무로 馬防柵(마방책)을 설치한 다음에 다케다의 기병대를 이곳으로 유인하여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5월21일, 設樂原의 아침은 밝아 왔다. 노부나가-이에야스 연합군은 連子川을 앞에 두고 50m 정도의 거리마다 50m 길이의 木柵(목책)을 3단계로 설치했다. 그 제1단계의 목책 후방에 3000명의 소총수를 3열로 나누어 대기시키고 나머지 3만여 병력은 철포대의 후방에 배치, 다케다軍의 공격에 대비했다.

오전 6시, 設樂原에 도착한 다케다의 기마대는 좌·우·중軍의 세 부대로 나눠 鶴翼陣(학익진)을 치고 최우익 부대로부터 돌격을 개시했다. 노부나가-이에야스 연합군의 誘引 부대는 적의 기마대가 접근해 오자 작전대로 곧장 목책 안으로 도주했다.

다케다의 기마대가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제1열의 총대는 일제사격을 하고 뒤로 물러났다. 이어 제2열이 앞으로 나와 사격하고 뒤로 빠지면 이번에는 제3열이 바로 射線(사선)으로 나섰다. 그 사이에 제1열은 탄환 장전을 끝마치고 있었다.

이 같은 노부나가軍의 연속사격 전술은 당초의 기대 이상이었다. 용맹으로 이름 높은 다케다 가문의 기마대가 크게 당한 것은 연속사격뿐만 아니었다. 목책 뒤에서 槍兵(창병)들이 찌르는 10척짜리 長槍도 위력적이었다. 목책 앞에는 장창에 찔린 戰馬들이 잇달아 쓰러졌다. 다케다의 기마대 일부는 2단계 목책까지는 돌파했지만, 3단계 목책 앞에서 전멸했다.

그때까지 철포를 「나르는 장난감」 정도로 얕잡아보던 다케다軍은 무모한 돌격을 되풀이했다. 사실, 철포는 火繩(화승)의 불로 화약을 폭발시켜 탄환을 날리는 조총이었던 만큼 발사과정이 몹시 번거로웠다. 비라도 내려 철포가 젖기만 하면 성능이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약점도 지니고 있었다.

전투는 4시간 동안 전개되었다. 가쓰요리는 重臣들을 비롯한 용사들이 잇달아 전사하자 격분했던 나머지 몸소 돌격대의 선봉에 서려고 했다. 近臣들이 말고삐를 잡고 후퇴를 간언했다. 결국 그는 말머리를 돌려 패주했다. 이 일전에서 다케다軍은 1만 명 이상의 사상자 및 도망자를 내고 3000명만 본거지로 돌아갈 수 있었다.

日本땅에 철포가 전래된 것은 1553년이었다. 明나라의 닝포(寧波)로 향하던 포르투갈 선박이 난파하여 규슈 남쪽의 타네가시마(種子島)에 표착했다. 그때 타네가시마 島主는 포르투갈 사람들로부터 처음으로 철포를 입수하여 家臣들에게 사용법과 제작법을 배우게 했는데, 그 노하우가 차츰 일본 전국에 확산되었다.

철포의 위력을 예감하고 그 전술적 운영에 가장 먼저 주목했던 인물이 노부나가였으며, 그 위력을 결정적으로 발휘한 최초의 전투가 나가시노 合戰이었다. 노부나가는 수도권, 특히 무역항인 오사카의 장악에 따른 우월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병기의 양산체체에 들어가 있었다.

철포, 즉 조총은 壬辰倭亂 때도 위력을 발휘했다. 그때 조선군 최고의 맹장 申砬(신립)이 1592년 忠州의 탄금대에서 기마전을 벌이려고 했다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 대패했던 것이나, 1593년 明의 원군 총사령관 李如松(이여송)의 기마부대가 碧蹄館(벽제관: 경기도 高陽市 恩平面)에서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에게 당했던 것도 실은 조총의 연속사격 때문이었다.

나가시노 合戰에서 패전 도주한 가쓰요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는 문제를 놓고 노부나가와 이에야스는 생각이 달랐다. 노부나가는 가쓰요리를 추격 섬멸하려 했지만, 이에야스는 다음과 같이 만류했다.

『가쓰요리는 이제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닙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반드시 자멸해버릴 것입니다』

다케다의 영토는 일본 최고봉인 후지산(富士山) 일대. 산간내륙 지방인 만큼 追討戰(추토전)을 벌이는 것은 아직도 패권의 향방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노부나가에겐 득책일 수 없었다.

한편 구사일생으로 본거지 고후(甲府)로 돌아온 가쓰요리는 절치부심, 재기의 그날을 노렸다. 그러나 家臣들이 잇달아 가쓰요리를 배반했다. 이미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主君에 대한 배신은 戰國무사의 생존방식이었던 것이다.

1582년, 노부나가-이에야스 연합군은 이미 약점이 드러난 가쓰요리의 숨통을 끊기 위해 그의 본거지 고후城을 포위했다. 이때도 가신들이 배반, 노부나가-이에야쓰 연합군에게 협력하는 바람에 가쓰요리는 덴모쿠(天目)산으로 도망쳤다.

저항이 불가능해진 최후의 순간, 가쓰요리와 그의 어린 아들은 셋부쿠(切腹)로 삶을 마감했다. 이로써 가마쿠라(鎌倉) 막부 시대 이래의 名門武家 가이의 다케다(武田) 가문은 族滅(족멸)되고 말았다.


日本 국보 新羅善神堂

다케다 가문의 선조는 미나모토(源)氏임을 앞에서 이미 지적했다. 일본의 사학자 다케우치(竹內理三)氏가 쓴 「日本의 歷史」(中央公論社, 1973)에서는 다케다 家門의 선조인 「源氏系圖」를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580쪽 도표 참조).

이에 따르면 다케다 가문의 선조인 미나모토 요시미쓰(源義光: 신라사부로)는 요리요시(賴義)의 3男으로 되어 있다. 「일본무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나모토 요리요시(988~1075)는 1051년부터 1062년까지 東北지방에서 발생한 아베(安倍)의 반란, 즉 「前9년 전쟁」을 평정한 영웅이다.

그 후 1083년부터 1087년까지 동북지방에서 기요하라(淸原)의 반란에 의한 「後3년의 전쟁」이 일어났다. 이 「後3년의 전쟁」에서는 요리요시의 장남 요시이에(義家), 차남 요시쓰나(義綱), 3남 요시미쓰(義光)가 힘을 합쳐 기요하라를 토벌했다. 이로부터 미나모토(源)氏는 關東무사단의 영도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요시미쓰(1045~1127)는 왜 자신의 성을 「미나모토(源)」에서 「新羅」로 바꾼 것일까. 원로 사학자 金文經 교수와 작가 崔仁浩씨는 일본 오미(近江)지방의 비와(琵琶) 호수변 도시 오쓰(大津)의 고찰 미이테라(三井寺)에서 그 단서를 발견한 바 있다.

<신라사부로의 아버지 요리요시는 1051년 「前9년의 전쟁」에 출진하기에 앞서 미이테라의 「新羅善神堂(신라선신당)」에 와서 新羅明神(신라명신)에게 전승을 기원하고 승리를 거두면 자신의 아들 하나를 神에게 바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원한 대로 승리를 거둔 후 자신의 셋째 아들 요시미쓰를 데리고 이곳에 와서 성인식을 올린 후 아들의 이름을 신라사부로로 개명했던 것입니다> (최인호의 장편 「海神」에서)

무사의 一族을 강하게 결속시키는 정신적 바탕이 되는 것은 氏神(씨신: 우지가미)이었다. 일족이 무슨 서약을 할 때는 반드시 氏神 앞에서 모여서 행하였다. 따라서 一族의 長인 摠領(총령)이 일족의 氏神을 제사하는 권리를 가짐으로써 일족의 단결을 공고히 했다.

金文經 교수에 따르면 미이테라 경내엔 일본 국보로 지정된 新羅善神堂이 보존되어 있다. 그 입구의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쓰여 있다는 것이다.

<미나모토 요리요시(賴義)의 아들 요시미쓰(義光)는 여기서 冠禮(관례)를 올렸으며, 이때 이름을 신라사부로로 바꾼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 신라사부로는 어떤 행로를 걸었던 것일까. 다음은 崔仁浩씨의 설명이다.

『1083년 기요하라의 반란(後3년의 전쟁)이 일어나자 요리요시의 장남 요시이에가 동북지방으로 출진했으나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신라사부로는 형을 돕기 위해 즉시 중앙관직을 버리고 동북지방인 오우(奧羽)로 출전하여 그곳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죠. 신라사부로의 형 요시이에(義家)가 「하치만타로(八幡太郞)」란 武名으로 용맹을 떨쳤다면 신라사부로는 붉은 갑옷을 입고 「風林火山(풍림화산)」의 깃발을 날리며 이름을 떨쳤어요. 반란 평정 후 신라사부로는 중앙으로 복귀하지 않고 히다치(常陸)에 남아서 독자적인 지방세력을 형성했습니다』

風林火山이란 「신속함은 바람과 같이 하고(疾如風), 더딤은 숲과 같이 하며(徐如林), 침노와 약탈은 불과 같이 하고(侵掠如火), 움직이지 않을 때는 산과 같이 하라(不動如山)」는 의미이다. 이것은 「孫子兵法」 爭篇(쟁편)의 유명한 구절 14자를 4字로 축약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성씨가 또다시 다케다로 바뀐 까닭은 무엇인가.

1127년 신라사부로가 병사하자 그의 아들 요시키요(義淸)는 본거지를 고마군(巨摩郡) 다케다쿄(武田鄕)로 옮겼는데, 요시키요의 아들, 즉 신라사부로의 손자대에 이르러서 가문의 성씨를 「新羅」에서 자신들이 새로 이주한 「다케다쿄」의 地名을 따라 고쳤다. 한국이나 중국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이런 방식의 改姓이 매우 흔한 일이다.

재일동포 사학자 金達壽씨도 그의 저서 「日本 속에서의 朝鮮문화」(講談社, 1989)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續日本記에 의하면 元正천황 靈龜2년(716) …武藏國에 高麗郡이 설치되었고, 다시 新羅郡을 두었다. 甲斐에 巨摩郡이 있고, 攝津에 百濟郡이 있다. 新羅郡은 현재 東京都 練馬區의 일부, 北多摩郡 保谷町, 埼玉縣 大和, 志木, 朝霞, 片山 일대이다. 甲斐源氏인 武田信玄의 선조는 新羅三郞義光으로서, 스스로 新羅의 후예임을 칭하고, 또 高麗郡·新羅郡의 古代 韓國 망명 귀화인의 후예들은 源氏를 중심으로 關東무사로서 日本역사에 화려한 활약을 보이고 있다>

위의 인용문은 사무라이의 뿌리가 한반도에서 건너온 「渡來人」의 후예임을 밝혀주는 사례들이다. 즉, 전국시대의 명장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 新羅사부로의 자손이었던 것이다.

新羅사부로의 史蹟은 일본 東北지방에도 남아 있다. 月刊朝鮮 趙甲濟 편집장은 지난 2월 아오모리縣 하치노헤(八戶)市에서 新羅사부로를 主神으로 모시는 「長者山新羅神社」를 확인했다(박스기사 참조).


사무라이와 八幡神의 특별한 관계

일본 최초의 武士정권인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1198)되던 시기에 日本天台宗의 座主(좌주)였던 慈圓은 그의 저서 「愚管抄(우관초)」에서 武士를 일본어 발음인 「무샤」가 아니라 한국어의 발음 그대로인 「ムサ(무사)」라고 표기했다(安田元久 著 「武士世界의 序幕」에서).

지금도 일본 神社에 모셔진 최고의 武神은 미나모토(源)氏의 氏神인 하치만(八幡)이다. 그렇다면 「하치만」이란 이름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신라사부로(新羅三郞)의 맏형 미나모토 요시이에(源義家)가 스스로를 「하치만타로(八幡太郞)」라고 칭했다. 인명사전에서 源義家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038∼1108. 헤이난 시대 말엽의 무장. 요리요시(賴義)의 장남. 號는 하치만타로(八幡太郞). 무용에 뛰어나고 와카(和歌)에 능했다. 前9년의 전쟁에서 安部貞任을 쳐서 陸奧守 겸 鎭守府 장군이 되었고, 後3년의 전쟁에선 淸原家衡·武衡을 쳐서 오우(奧羽)지방을 평정하여 源氏의 세력을 關東까지 넓혔다>

八幡太郞이란 이름을 풀이하면 「八幡을 氏神으로 삼는 가문의 장남」이라는 뜻이다. 서라벌군사연구소의 李鍾學 교수는 『이것은 律令體制(율령체제)의 고대국가로부터 무사계급의 봉건국가로 이행시킨 주체세력이 渡來人의 자손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또 다른 의문 하나가 제기된다. 일본의 武神이라면 八幡神만 있는 것이 아닌데, 가마쿠라 시대 이후에도 왜 무사들은 八幡神을 특별히 존숭했을까 하는 문제이다. 이와 관련, 竹內理三씨는 「일본의 역사」(中央公論社, 1973)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源賴信(968∼1048)은 만년에 河內守가 되었을 때 石淸水八幡宮에 한 통의 願文을 바쳤다. 이 願文에서 주목되어야 할 점은 源씨가 八幡神을 氏神으로 삼는 起源을 확실히 했다는 점인데, 氏神으로서 이를 신앙했던 것은 賴信이 최초이다. 그 이유는 이 願文에도 명시된 것처럼 祭神이 源씨의 祖先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과 武神이었다는 것, 두 가지이다. 武士와 八幡神의 특별한 관계는 이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源賴信은 「八幡太郞(하치만타로)」로 불린 요시이에(義家)와 「新羅三郞(신라사부로)」라 불린 요시미쓰(義光)의 祖父이다. 李鍾學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가마쿠라 幕府가 源賴朝에 의해 설립되었다는 것, 八幡神이 源씨의 氏神이었다는 것은 八幡神도 신라로부터 渡來해 왔고, 또 源賴信의 祖先도 新羅로부터의 渡來人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源賴信의 손자 源義光이 스스로 新羅三郞이라며 新羅人의 후예임을 밝힌 것이다』


關東무사단의 중심은 新羅系 渡來人

미나모토氏의 氏神인 八幡神은 가마쿠라 막부시대 이후 무로마치(室町) 막부 시대와 도쿠가와(德川) 막부 시대에서도 무사들로부터 가장 존숭을 받았던 武神이었다. 무로마치 幕府를 세웠던 아시카가(足利)氏나 戰國시대의 名門 다케다(武田)氏는 원래 미나모토(源)氏에서 파생된 가문인 만큼 八幡神을 존숭했던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260년간 武家정권을 이끌었던 도쿠가와(德川)氏까지 八幡神을 武神으로 받든 까닭은 무엇일까. 李鍾學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본의 향토지인 「山梨縣의 歷史散步」에는 菅田天神社에 대해 「다케다(武田)氏인 新羅三郞義光이 甲斐守(갑비수: 가이 지방의 태수)로 입국한 이래 武田家 대대로 守護神으로서 깊게 崇敬되었다. 德川家康도 이 神社를 永久祈願所(영구기원소)로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는 武田家의 수호신을 모신 神社를 왜 德川家康이 영구기원소로 삼았는지 의문을 갖고 있었는데, 일본 사학자 中村孝也씨의 논문 「將軍家康」(軍事史學 제12호, 甲陽書房, 1968)을 보고 의문이 풀렸다』

「將軍家康」에는 다음과 같은 「尾張志」의 기록이 인용되어 있다.

<意足居士는 播州 肉栗郡 船越山中 사람인데, 尾州 葉栗郡 光名寺의 住僧이었다. 軍學을 좋아해 兵書를 암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오케하자마 合戰 후, 이에야스가 노부나가와 연맹하여 淸須에서 대면했을 때의 일이다.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에게 意足을 소개하면서 『이 승려는 兵學에 통달, 八幡太郞義家(하치만타로 요시이에)의 家傳을 습득하고 있어, 이것을 배우려고 생각했지만 拙者(노부나가 自身을 말함)가 平씨라고 해서 전해 주지 않는데, 귀하는 源씨의 후예인 만큼 전수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겠느냐』고 자꾸 권장했다. 이에야스는 기뻐하며 (意足을) 綱崎로 데려가 하나하나 家傳을 받고, 義家의 「家」를 취해서 諱(휘)를 家康으로 고쳤다>

위의 「尾張志」의 기록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源씨의 후예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新羅系 渡來人의 자손을 중심으로 했던 關東武士는 일본무사단의 형성과 그 중추세력으로서의 전통을 계속해 왔다.

일본 3대 神社의 하나인 宇佐八幡宮의 祭神은 比賣神(비매신)과 八幡神, 그리고 후대에 추가된 應神천황이다. 그렇다면 比賣神은 누구일까.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金達壽씨 등이 공동 집필한 「朝鮮과 古代日本文化」에서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比賣神: 신라의 왕자라 전승되고 있는 天日槍(천일창)이라고 하는 것은 劍(검) 과 鏡(경: 거울) 등을 제사하는 新羅系 도래집단일 것이다. 그럴 경우 劍 및 鏡을 제사하는 샤먼도 따라갔다고 생각한다. 이 샤먼이야말로 天日槍의 嫡妻라고 하는 比賣神이 아닌가(金達壽). 宇佐의 중심이 되는 神을 地名도 아무것과도 관련없이 돌연 比賣神이라고 칭한다. 宇佐神宮의 社殿이 朱色으로 壯麗한데, 이같은 아름다운 宮을 만든 것도 女神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제사를 올리던 巫女(무녀)가 제사를 받는 女神으로 되어간 것이지만, 源流를 추적하면 朝鮮의 샤먼이 정착해서 宇佐의 比賣神으로까지 승화되었던 것이라고 생각되어진다(田村圓澄)>

天日槍과 比賣神이 三國遺事에 기록된 延烏郞(연오랑)과 細烏女(세오녀)라는 것은 많은 연구자들이 이미 동의하고 있는 바다. 이 설화의 줄거리는 신라 아달라왕 때 연오랑이 바위를 타고 일본에 가서 왕이 되었는데, 남편을 기다리던 세오녀도 남편의 신발이 놓여 있는 바위를 타고 일본에 가서 貴妃(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李鍾學 교수는 「新羅花郞軍事史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悠遠(유원)한 시대로부터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구석기시대·繩文(조오몽)시대·彌生(야요이)시대를 거쳐 古墳시대·飛鳥(아스카)·奈良(나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문화는 韓半島 문화에 영향받은 바가 현저하다. 바꿔 말하면 이들 시대의 일본문화로부터 한국문화의 흔적을 제외하면 공허해진다. 古代人은 농업에 적합한 토지·기후, 그리고 교통의 편리성에 의해 자유롭게 이동했던 것이다. 宇佐八幡宮이 소재하는 豊國은 해상교통상 難波(나니와: 지금의 오사카)보다 釜山 쪽이 절반의 거리에 위치, 특히 新羅의 문물·문화가 이식되었던 지역이다>


花郞道의 기본원리를 뒤따른 武士道

이제는 武士道의 기본원리를 검토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니토베는 「Bushido」에서 武士道의 연원은 불교·神道·孔子의 교훈이라고 말하고 있다.

<불교는 운명에 대한 안락한 신뢰의 감각, 불가피한 것에 대한 조용한 복종, 위험과 재난을 눈앞에 두었을 때의 금욕적인 평정함, 삶에 대한 모멸, 죽음에 관한 친근감을 武士道에게 주었다>

<불교가 무사도에게 주지 못한 것은 神道가 충분히 제공했다. 그 어떤 신조에 의해서도 가르침을 줄 수 없었던 主君에 대한 충성, 조상에 숭배와 존경·효심 등이 神道에 대한 가르침에 의해 전해진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도덕적인 敎義에 관해서는 孔子의 가르침이 武士道의 풍요로운 원천이었다. …냉정함과 온화함을 바탕으로 한 孔子의 정치도덕의 많은 부분은 지배계급이었던 무사에게 특히 어울리는 것이었다>

니토베가 거론한 武士道의 기본 골격은 신라 花郞道의 그것을 뒤따른 듯한 느낌을 준다(물론 세부적인 내용에선 서로 다른 점이 많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신라 말의 대학자 崔致遠(최치원)은 니토베보다 1000여 년 전에 이미 「鸞郞碑(난랑비)」의 序文에서 이렇게 썼다.

<나라에 玄妙(현묘)한 道가 있으니 이것을 風月道(풍월도)라 한다. 그 가르침의 기본은 「仙史」에 상세하게 쓰여 있다. 그 내용은 儒·佛·仙의 3敎를 포함하고 있다>

신라의 風流道(풍류도)라는 것은 孝悌忠信(효제충신)의 사상이며, 그것의 종교적 연원은 샤머니즘에 바탕을 둔 天神·祖神·地神·雜神 등이며, 그것을 漢譯을 해서 「仙敎」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신라의 仙敎는 중국의 道敎와는 체계가 전혀 다르다.

필사본 「花郞世紀(화랑세기)」에는 화랑도의 기원이 더욱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화랑은 仙徒(선도: 仙道를 배우는 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神宮을 모시고 큰 제사를 하늘에 지냈다. …여자로써 源花(원화)를 삼았는데, 只召太后(지소태후: 진흥왕의 어머니)가 이를 폐지하고 화랑을 두어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받들게 했다>

화랑은 신라 고유의 祭天儀式(제천의식)을 지내는 여사제, 즉 源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花郞世紀 서문의 기록이다.

<옛날에 仙徒들은 다만 신을 받드는 일을 主務로 삼았는데, 國公이 참가한 후에는 道義로써 서로 勉勵(면려)케 되었다>

니토베의 「Bushido」에서도 일본의 신토(神道)가 신라의 仙道와 마찬가지로 샤머니즘에 바탕한 것으로 쓰여 있다.

<신토의 자연숭배는 국토라는 것을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소중한 것으로 만들었다. 또한 신토의 조상숭배는 다음에서 다음으로 계보를 더듬어 가다가 결국 天皇의 家系를 민족 전체의 원천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사실, 武士道는 그 道德律 또는 정신이 무엇인지, 니토베의 「Bushido」 이전에는 불명확했다. 물론 가마쿠라 막부 때 사무라이의 道理를 규정한 貞永式目(정영식목: 조에이시키모쿠)이란 武家法이 있기는 했다. 51개조로 구성된 貞永式目은 이후 武家法의 기준이 되었지만, 그 내용은 토지의 분쟁·상속·양도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고 그밖에 범죄에 대한 형벌, 守護(지방장관)·地頭(고을원 정도의 벼슬)의 직무범위에 관한 규정일 뿐이었다.

도쿠가와 막부 때인 1615년에 제정된 武家諸法度(부케쇼핫토)도 大名(다이묘)의 행동과 관련한 규율로서 위반자에 대해서는 領地(영지)의 몰수·삭감·轉封에 처한다는 내용 등의 규정이 대부분이었다.


花郞道의 정신을 집약한 世俗五戒

花郞道의 정신적·윤리적 지향점은 명확하다. 「三國史記」 열전에는 圓光法師(원광법사)가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貴山과 추항, 두 청년에게 내린 世俗五戒(세속오계)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첫째 임금을 섬김에 충으로써 하고(事君以忠), 둘째 어버이를 섬김에 효로써 하고(事親以孝), 셋째 친구를 사귐에 믿음으로써 하고(交友以信), 넷째 전쟁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고(臨戰無退), 다섯째 생명을 죽임에는 가려서 해야 한다(殺生有擇)>

여기서 원광법사의 世俗五戒가 표명된 서기 600년 전후의 시대적 배경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신라는 법흥왕과 진흥왕 때 국력이 크게 신장되어 남쪽으로 낙동강 以西 지역, 북쪽으로는 함흥평야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특히 진흥왕 14년(553)에는 한반도의 전략적·경제적 요충지인 한강 유역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대륙과 연결되는 黨項城(당항성: 경기도 南陽)을 획득했다.

이런 신라를 고구려·백제가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이후 신라는 100여 년간 고구려·백제의 협공에 의해 국가 존망의 위기에 몰렸다. 이런 미증유의 國難期(국난기)에 당면하여 화랑에게 정신적·윤리적 기반을 마련해 준 것이 世俗五戒였다.

臨戰無退(임전무퇴)와 殺生有擇(살생유택)은 호국불교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왜냐하면 가려서 죽이더라도 殺生은 殺生이니까 佛家(불가)에서는 금기사항이다. 또 臨戰無退를 실현하려면 적을 죽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世俗五戒는 실제상황에서 어떻게 작동했을까. 진평왕 24년(602), 阿莫城(아막성: 전북 남원시 운봉읍) 전투에 나선 귀산과 추항은 신라군이 백제군의 복병에 걸려 패퇴한 가운데서도 끝까지 臨戰無退를 실현, 전세를 뒤집어 놓고 전사했다.

화랑도의 사상적 배경으로서 불교의 영향력을 간과할 수 없다. 진흥왕 때 불교가 융성해진 것과 때를 같이하여 화랑도가 국가적 차원에서 제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花郞道에 미친 불교의 영향

신라사회에서 불교와 화랑도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는 당시의 최고 지식층이었던 승려에게 화랑과 낭도가 학문을 배웠다는 사실에서 나타나 있다. 진평왕 때 神僧으로 알려진 惠宿(혜숙), 태종무열왕 때 화랑 金欽運(김흠운)의 문하에 있었던 승려 轉密(전밀), 경덕왕 때 「도솔가」·「안민가」를 지었던 月明師, 憲安王(헌안왕) 때 국선 金膺廉(김응렴: 뒷날의 景文王)에게 조언을 했던 範敎師(범교사) 등이 모두 花郞徒를 지도한 승려들이었다.

그런 만큼 화랑들의 일화 중에서 불교와의 관련성을 찾아볼 수 있는 사례가 많다. 화랑 斯多含(사다함)은 그 이름부터가 불교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의 용기, 겸양, 노비해방, 신의를 위한 생사의 초월 등은 불교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화랑도의 대표적 인물인 金庾信(김유신)의 무리를 당시 사람들이 「龍華香徒(용화향도)」라고 불렀다는 것은 화랑도와 미륵신앙의 밀접한 관계를 말해 준다. 龍華는 「불교의 메시아」 미륵을 가리키는 것이고, 香徒는 예불단체를 일컫는 말이다.

金庾信의 副將으로서 삼국통일에 전공을 세우고 진덕여왕·태종무열왕·문무왕·신무왕의 4대에 걸쳐 名臣으로 활약한 竹旨郞(죽지랑)의 탄생설화에 미륵이 등장하고 있다든지, 진지왕 때 興輪寺(흥륜사)의 스님 眞慈(진자)가 항상 彌勒像(미륵상) 앞에 나아가 大聖이 화랑으로 化身하여 이 세상에 나타나기를 발원했다든지 하는 것들은 화랑도가 지상에 이상향을 건설하려는 新羅佛國土(신라불국토) 사상과 직결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화랑도가 미륵사상을 통해 신라불국토를 건설하려고 했다면 武士道는 禪(선)을 통해 자기완성을 이룩하려고 했다. 니토베는 武士道와 禪의 관계를 이렇게 썼다.

<어떤 일류 검술의 스승(柳生宗矩)은 한 제자에게 자기 기예의 극치를 다 가르쳐 준 다음 『나의 지도는 여기까지다. 나머지는 禪의 가르침에 맡길 수밖에』 라고 말했다. …禪은 『沈默思考(침묵사고)를 통해 언어의 표현을 넘는 사고의 영역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탐구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묵상이며, 내가 이해하고 있는 범위 내에서 볼 때 그 목표점은 삼라만상의 배후를 가로지르고 있는 원리로, 이를 얻으면 「절대」 그 자체를 깨닫게 되고 이 「절대」와 자기를 조화시킬 수 있다>

화랑도 제도의 특징은 文武의 균형적 배합에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武官 양성제도가 아니라 국가와 시대가 요구하는 文武兼全(문무겸전)의 엘리트를 양성하는 全人敎育(전인교육) 기관이었다. 「三國史記」에는 「花郞世紀」를 인용, 『여기서(花郞徒)에서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선발되었고, 뛰어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三國史記」 진흥왕 37년(576)조의 기사를 보면 신라가 어떤 방식으로 인재를 뽑았는지에 대한 해답이 나온다.

<진흥왕 초기에 임금과 신하들이 人材를 알아볼 수 없는 것을 문제로 여겼다. 이에 여럿이 모여 서로 어울리도록 하고, 그들의 행동거지를 살펴본 후에 적절한 자를 천거하여 임용했다>

여러 청년들을 모아 놓고 단체로 수련생활을 하게 하면 각자의 능력과 개성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러면 花郞徒는 어떻게 수련했던 것일까. 다시 「三國史記」의 기록이다.

<그들은 더러는 도의로써 서로 연마하고(相磨以道義), 더러는 노래와 춤으로 서로 즐기면서(相悅以歌樂), 산수를 찾아 노닐어(遊娛山水), 먼 곳이라도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無遠不至)>

국립 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壬申誓記石(임신서기석) 앞에 서기만 하면 「道義로써 서로 연마했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번에 와 닿는다. 화랑의 맹세를 새긴 壬申誓記石은 높이 34cm 의 냇돌에다 화랑 둘이서 하늘에 굳게 맹세하는 글을 새겨넣은 것이다. 제작연도는 화랑도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던 시기의 임신년인 진흥왕 13년(552)이나 진평왕 34년(612)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쓰인 74자의 吏讀(이두)문자를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부터 3년 뒤에는 忠道를 굳게 지녀 허물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서약에 어긋남이 있으면 하늘로부터 큰 죄를 받을 것을 다짐한다. 만약에 나라가 편안하지 못하고 크게 어지러워지면 나라를 위해 충성할 것을 맹세한다>


忠과 孝의 同時 실천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신라 화랑의 이상과 염원과 포부는 忠 사상의 실현이었다. 圓光법사가 說한 世俗五戒의 제1항도 忠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화랑도는 유교가 추구하는 가치체계와 다르다.

유교에서는 孝가 근본가치이며, 군신 간에는 義理가 소멸되면 벼슬을 버리고 물러가더라도 하등 부끄러울 바가 없다. 반면 화랑도는 忠을 실현해야 孝도 동시에 이룰 수 있다는 사상체계이다. 「三國史記」 열전은 바로 忠 優先 사상으로 단련된 화랑 출신 전사들의 희생정신과 용맹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三國史記」 열전에 기록된 金欽純(김흠순: 김유신의 동생)과 아들 盤屈(반굴)의 언행은 신라화랑의 가치체계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황산벌 전투의 초전에서 신라군이 네 번 패하자 우익장군 欽純은 아들 盤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이 제일이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가 제일이다. 위태로움에 당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은 忠과 孝를 兩全함이다>

반굴은 즉각 匹馬單騎(필마단기)로 적진 깊숙이 돌격하여 분전하다가 전사했다. 곧 이어 좌익장군 品日의 아들 官昌도 반굴처럼 싸우다 전사했다.

花郞道에 관한 한 일본인 학자들의 평가가 대체로 높았다. 어쩌면 일본의 史書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무사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했던 때문인지 모른다. 다음은 이케우치(池內宏)의 「鮮滿史연구」(吉川弘文館, 1960)에서 인용한 것이다.

<자기 아들의 죽음을 보는 것은 자기가 죽는 것보다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人之常情이다. 欽春(흠춘: 欽純과 동일인물)과 品日이 그 고통스러움을 참았다는 것은 우리나라 熊谷直實이 전장에서 끊임없이 자식 直家를 비호한 것과 정반대인데, 源爲朝가 말한 바 「板東武者의 관습은 대장의 앞에서는 아버지나 자식이 죽더라도 돌아보지 않았고…>

그러나 구마가야(熊谷直實)는 자신의 아들뿐만 아니라 남의 자식의 목숨도 귀하게 생각한 장수였다. 일본의 戰史에서 決戰의 하나로 손꼽히는 스마(須磨)전투(1184)에서 구마가야는 적 하나를 포획, 투구를 벗겨 보니 아직 소년이어서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소년무사는 구마가야에게 두 사람의 명예를 위해 한사코 자신의 목을 베어 달라고 간청했다.

때마침 아군들이 대거 몰려오자 구마가야는 『이름 없는 사람의 손에 죽는 것보다 내가 손대는 것이 너의 효도가 될지 모른다』며 소년무사의 목을 쳤다. 전투가 끝나자 그는 빛나는 무훈을 지닌 무사의 경력을 버리고 승려가 되어 여생을 염불 행각으로 바쳤다. 니토베는 이런 구마가야의 언행을 이케우치와는 달리 무사의 덕목인 「他者에 대한 연민」이라고 보았다.


新羅 花郞의 맹세

삼국통일 시기의 신라화랑이 가장 중시했던 것은 외적을 제압할 수 있는 무술의 수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 화랑의 수련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어지는 임신서기석의 銘文(명문)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앞서 辛未年 7월22일에 크게 다짐한 바 있는 詩(詩經)·尙書·禮(禮記)·傳(春秋左氏傳)을 3년 동안에 모두 익힐 것을 맹세한다>

이것은 두 청년이 壬申年의 한 해 전에 학문을 익힐 것도 서약한 것이다. 이렇게 신라 화랑은 시대적 요구가 무엇인지를 꿰뚫고 있었다. 당시 신라사회는 화랑에게 臨戰無退의 용사뿐만 아니라 위기의 시대를 짊어지고 나갈 장수와 경륜가로 성장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歌樂으로 서로 즐겼다」는 대목도 신라 화랑을 이해하는 데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이 대목과 화랑집회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일본인 학자 미시나 히데아키(三品彰英)가 그의 명저 「신라화랑의 연구」에서 문화인류학적으로 설파한 바 있지만, 원래 가무를 통한 놀이는 개인과 단체를 결속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무를 통한 수련방식은 물론 신라 화랑도에만 시행된 것이 아니다. 예컨대 일본에서 가장 엄격한 사무라이 수업이 시행되었던 사쓰마(薩摩)藩에서도 청년들이 음악을 취미로 삼았다고 한다.

「산수를 유람하여 먼 곳이라도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는 대목도 신라화랑도의 강점을 나타내고 있다. 그 목적은 전장순례, 지리습득, 국토사랑, 체력단련이었다. 이런 수련으로 신라 화랑은 야전에서의 생존능력과 협동정신을 몸에 배게 했고 국토사랑을 통한 애국심을 자연스럽게 체득했던 것이다.

화랑조직의 탁월성은 귀족과 평민의 자제를 한 울타리 안에 포용했던 점이었다. 이로써 골품제 사회에서 발생하게 마련인 계층 간의 긴장과 갈등을 조절·완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것이 삼국의 상쟁기간 중 신라의 동원체제가 가장 원활했던 까닭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화랑과 낭도 간의 깊은 유대관계가 잘 나타나 있는 것이 「三國遺事」에 수록된 향가 「慕竹旨郎歌(모죽지랑가)」이다.

국가보위전쟁 및 삼국통일전쟁 시기에 있어 화랑도의 공헌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삼국통일 이후 신라 화랑도의 군사적 기능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는 장기간의 평화를 구가하게 되었는데, 이같은 시대 분위기가 화랑도의 尙武정신을 좀먹어 갔던 것이다.

이와 관련, 文化史家 호이징하의 「놀이문화」 이론을 끌어들여 화랑도의 成功과 變質을 설명한 동국大 李基東 교수의 견해가 주목된다. 李교수는 그의 「신라사회사연구」에서 6·7세기에 걸쳐 화랑도가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까닭에 대해 다음과 풀이했다.

<화랑도의 수련법으로서의 이른바 風流(풍류)라는 것은 현대의 文化史家 호이징하 혹은 문명비판가 까이요와 등이 말하는 놀이(遊戱)라는 개념을 갖고 이해할 때 잘 해명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한다. 호이징하는 놀이를 문화의 근원이라고까지 보는 입장인데, 그에 의하면 놀이는 본디 진지함과 양립되는 것으로서, 이 양자는 각기 허구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대표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양자가 일정한 거리를 둔 긴장관계에서만 참된 문화가 유지될 수 있다고 하는데, 필자는 전성기(6·7세기)의 화랑도―나아가 그 수련상의 특징으로서의 풍류가―바로 그러한 것이었다고 보고 싶다. 즉, 이 시기의 화랑의 놀이的 성격은 국가보위, 나아가 삼국통일이라는 현실의 목표, 곧 군사적 과업에 의해서 어느 정도 억제되었다고 생각된다>


新羅花郞의 쇠퇴와 변질

다음은 삼국통일 후 신라 화랑도가 쇠퇴·변질되어 가는 까닭에 대한 李基東 교수의 견해이다.

<中古시대 신라 최대의 과업이었던 국가보위전쟁은 삼국통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화랑도는 이에 큰 기여를 하였지만, 일단 통일기로 접어들자 화랑도의 군사적 성격 내지 기능은 시들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 이 같은 안일한 시대적 분위기가 군사적 기능을 상실한 화랑도의 놀이적 기능을 한층 조장했을 것은 확실하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호이징하는 현실과 허구가 일정의 거리를 둘 때에만 참된 문화가 유지될 수 있다고 하였으며, 만약 이 거리가 소멸되면 긴장관계가 깨져서 문화의 생명을 잃게 되고, 熱狂(열광)이라고 하는 일종의 극한적인 정신상태를 초래한다고 하는데, 통일기에 들어와 현실의 군사적 기능이 약화됨으로 해서 놀이와 군사 양자의 균형이랄까 긴장관계가 파괴되고 말아, 결국 놀이를 위한 놀이라는 놀이 일변도의 熱狂에 빠져 들어갔다고 생각된다. 요컨대 화랑도의 歌舞組合的(가무조합적)인 기능만이 남게 되어,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화랑의 본령이 마치 巫夫(무부) 혹은 倡優·遊女·舞童 따위로 오해하게 만든 素因이 양성된 것이다>

신라 멸망 후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화랑의 遺風(유풍)은 잔존하여 華風(화풍: 中國風)에 대한 國風으로 명맥을 유지하기는 했다. 고려왕조의 지배층은 自己正體性(자기정체성) 추구를 위한 본질적 대상으로서 화랑도의 遺制에 주목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왕실 최대의 불교제전이었던 八關會에서 화랑을 등장시켜 歌樂을 연주하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교화의 先導者(선도자)로서 국민 상하 간에 理想세계 건설의 주체, 佛國土를 지키는 메시아로까지 기대를 모았던 화랑의 본래 모습과는 동떨어진 축제의 장식물에 불과한 존재였다.


가마쿠라 武士의 發興

화랑도의 무사적 기능이 소멸된 후 무사도를 발흥시킨 것이 가마쿠라 막부 시절의 사무라이들이었다. 가마쿠라의 무사들은 단결을 제일의 강령으로 삼았다. 유사시엔 일족이 모두 한데 뭉쳐 싸웠다. 일족이란 원래 혈연관계의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이때 이르러서는 혈연관계가 없더라도 일상생활을 함께 하는 관계로 맺어진 집단으로 확대되었다.

이 일족의 지도자를 摠領(총령)이라고 불렀다. 일족의 단결을 위해 총령의 명령에 복종하고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이 사무라이의 덕목으로 인정되었다. 사무라이로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자신의 영지를 지키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무사들은 항상 무예를 닦고 언제든 적과 싸울 준비를 해야 했다.

가마쿠라의 무사들은 무예 제일주의였다. 무예가 약하면 짓밟히는 세상이었다. 사무라이의 아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칼 휘두르는 것을 배웠다. 다음은 니토베의 「Bushido」에 기록된 사무라이 수업의 모습이다.

<그들이 다섯 살이 되면 사무라이의 정장을 입히고 바둑판에 위에 앉힌다. 그리고 그때까지 가지고 놀던 장난감 단도 대신에 진짜 칼을 허리에 차는 것으로 무사의 동료로 받아들여진다. …이 「무사 입문」의 첫 번째 의식이 행해지면 이 신분의 상징을 몸에 지니지 않으면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그러나 보통은 은으로 칠한 나무칼을 代用으로 지니고 다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이는 둔한 칼이긴 하지만 진짜 칼을 차게 된다. …15세에 冠禮를 치르고 독자적인 행동을 할 수 있게 되면 항시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예리한 무기를 소지한 것에 자긍심을 느낀다>

武士道에서는 칼을 사무라이의 힘과 무용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사무라이가 지닌 두 개의 칼은 각각 大刀와 小刀로 불리며 어떤 때라도 풀어 놓아서는 안 되었다. 밤에만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다 두었다.

가마쿠라 시대에 처음 시작한 騎射훈련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즉, 말을 타고 달리며 표적으로 걸어 둔 삿갓을 화살로 맞히는 笠懸(카사가게)와 鳴鏑(명적: 우는 화살)을 날리는 流鏑馬(야부사메), 말을 탄 사무라이가 세 패로 나뉘어 150마리의 개를 쫓으며 활을 쏘는 犬追物(견추물: 이누오우모노) 등이었다.

농촌의 영지야말로 사무라이들의 유일한 생활터전이었다. 지방의 사무라이들은 화려부박한 도시문화로부터 격리되어 농촌에 뿌리를 내리고 검소질박한 생활을 했다. 이것이 오로지 무예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까닭이었다. 사무라이들은 영지의 지명을 자신의 성씨로 삼고, 영지를 목숨 걸고 지켰다.

무예를 중시했던 사무라이들은 대개 학문을 멀리하여 漢字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생활이 차츰 안정되면서 독서와 학문에 눈을 돌리는 사무라이도 늘어났다.

일본의 역사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사무라이는 가마쿠라 무사들이다. 가마쿠라 무사들은 미증유의 국란인 麗蒙연합군의 침략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두 차례(1274년과 1281년)의 전쟁에서 가마쿠라 막부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연합군 함대를 궤멸시킨 태풍에 힘입은 바가 컸지만, 목숨을 걸고 분전했던 가마쿠라 무사들의 영향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高麗의 군사문화가 취약했던 배경

가메야마(龜山) 上皇은 이세(伊勢)신궁에 나가 『내 목숨을 국란과 바꾸고 싶다』고 빌었고, 執權 호조 도키무네(北條時宗)도 혈서로 불경을 베껴 국란 극복을 기원했다. 두 번이나 때맞춰 불어 준 태풍으로 위기를 모면한 일본의 조정과 막부는 승리의 소식이 전해지자 태풍을 「神風」이 일어난 것이라 하여 「일본은 神國」이라는 사상을 굳혀 가게 된다.

어떻든 일본의 가마쿠라 무사정권은 국란 극복에 성공한 반면 가마쿠라 막부와 비슷한 시기에 성립된 高麗의 武人정권은 국란 극복에 실패했다. 가마쿠라 막부는 擧國一致(거국일치)의 방어전을 전개한 반면 고려의 崔氏 무인정권은 국론통일에 실패했다.

몽골제국은 高麗 국왕과 武人정권을 갈라 놓는 이간책을 구사했다. 外勢에 굴복하더라도 국왕은 국왕으로 살아남을 수 있지만, 武人정권의 담당자는 제거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무인정권은 국왕과 문신들의 협상 또는 타협노선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崔씨 정권 스스로도 몽골군과의 싸움에는 처음부터 자신감이 없었다. 高麗의 武人정권 담당자들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어진 野戰軍 출신이 아니라 대개 국왕 경호부대에서 하극상에 의해 벼락출세한 정치군인들이었다. 그들에겐 대부대를 지휘할 능력이 없었다.

중기 이후의 高麗에선 文官 우위 정책에 따라 武官을 천시했다. 유사시엔 文臣이 三軍의 장수가 되어 휘하의 武將들을 지휘했다. 예컨대 거란의 침략을 막은 姜邯贊(강감찬), 여진을 정벌한 尹瓘(윤관) 등은 모두 文官이었다. 그때의 武臣이라면 완력은 있었겠지만, 대개 무식하여 三軍을 지휘할 전략적 두뇌가 부족했다. 이렇게 군사문화가 열등한 나라는 당연한 일이지만 국위를 떨칠 수 없는 것이다.

외적과 싸워 이길 수 없었던 崔씨 정권으로서는 무인정권으로서의 위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국왕 또는 다른 무인에 의해 정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崔忠獻(최충헌)이 완력 있는 장정들을 자기의 私兵으로 끌어들이고 對몽골군 방어전에 투입되는 정부군을 노약자로 충원했던 까닭은 그만큼 그의 정권이 불안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崔忠獻을 승계한 아들 崔瑀(최우)는 바다에 어두운 몽골군의 약점을 찔러 강화도 천도를 감행했다. 그러나 고려의 무인정권이 섬에 들어가 40년간 항쟁했다고 해서 별로 자랑스러울 것은 없다. 육지의 백성들을 침략군의 말발굽 아래 내팽개쳐 魚肉(어육)으로 만들었고, 국토는 초토화되었기 때문이다. 몽골군은 당시 문명세계의 60%를 정복한 사상 최강의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런 정황에서 보면 바다를 사이에 두고 대륙과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일본의 무사정권은 지리적 조건에서 결정적인 혜택을 받았다.

어떻든 미증유의 국란 「몽골襲來(습래)」를 막아낸 가마쿠라 막부는 일본사회에 무사정권에 대한 신뢰를 크게 높였다. 이것이 이후 일본사회의 모습을 결정짓는 데 엄청난 영향을 행사했다. 계속 가마쿠라 막부의 무사정권이 들어설 수 있었던 것도 일본인들의 무사에 대한 신뢰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7세기에 定立된 武士道

李鍾學 교수는 『일본 무사단의 중추가 미나모토(源)氏이고, 그들이 신라계 渡來人이었으며, 八幡神이 氏祖와 武神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武士道의 원류를 추적하면 신라의 花郞道에 닿는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한다.

日本 武士道에서 강조되는 덕목은 義·勇·仁·禮·誠·명예 등이다. 그러나 그런 덕목은 日本 武士道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신라 화랑의 활약을 기록한 「三國史記」 열전을 보면 그 구체적인 실천사례가 가득하게 전개되고 있다.

사실, 武士道라고 불리는 일본 무사의 도덕률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에도(江戶)시대 초기(17세기) 무렵이었다. 그것은 무사들에 대한 규율 없이는 사무라이들의 생활이나 활동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에도시대는 戰國시대와는 달리 태평의 시대였다. 결국 무사의 「職場」이어야 할 合戰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武士道에는 신라 화랑도와 같은 장쾌한 스케일의 실천사례가 없다.

니토베의 「Bushido」에서는 「추신쿠라(忠臣藏)의 47 義士」를 다음과 같이 상찬했다.

<47인의 충신(主君의 원수를 갚은 家臣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본에서 매우 유명한 일화이다)은 우리가 배운 대중교육에서 47인의 義士라고 나와 있다. 사악한 음모가 군사적 책략으로, 새빨간 거짓말이 책략으로 통하던 시대에 이처럼 솔직하고 정직하며 남자다운 덕행은 최고의 광휘를 발하는 보석이었다. 그것은 최고의 칭송을 받았다. 義는 또 하나 勇이라는 덕행과 나란히 武士道의 쌍둥이였다>

이 같은 니토베의 찬양과는 달리 「지금 니토베의 武士道를 읽는다」(三笠書房, 2003)의 저자는 시무라 후미오(志村史夫)씨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내가 이 「忠臣藏」을 싫어하는 이유는 처음부터 끝까지의 드라마 중에 「知性」과 「교양」이라는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또 충신이 主君의 원수를 친다고 하는 행위 자체는 美談일지도 모르지만, 大石內藏助(1659∼1703) 등 47인의 실제 행동이 극히 비겁하게 생각된다. …47인의 浪士가 노인 하나의 목을 베기 위해 행했던 기습은 「비열한 행동」이 아닌가. …따라서 나는 그들을 의사로 부를 기분이 결코 없다. 吉良上野介(47인 낭사에게 복수를 당한 인물)를 가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性理學 유일주의에 물젖어 공리공론을 일삼았던 조선왕조의 지배 엘리트와는 달리 에도시대의 무사들이 實質을 숭상하여 260년에 걸쳐 평화시대를 이룩한 사실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武士道에 이런 임팩트를 가한 것은 에도시대 중기에 도입된 王陽明(1472∼1528)의 사상(陽明學)이었다.

王陽明의 「知行合一說」은, 「知」는 「行」의 바탕이고, 「行」은 「知」의 발현이라는 실천의 철학이다. 武士道는 이 「知行合一」을 중시하여 지식을 위한 지식을 경시했다. 지식은 본래의 목적이 아니라 지혜를 얻는 수단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니토베는 『일본에 있어 끊임없는 추진력의 바탕은 바로 武士道이며, 그것은 명예와 용기, 그리고 武德의 유산이기에 일본인이라면 불멸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21세기형 花郞道 정립 필요한 韓國사회의 위기

21세기에 이른 오늘에도 武士道는 일본 지식인들의 話頭(화두)가 되고 있다.

『武士道가 지금은 완전히 한물 갔다지만, 그러나 높은 신분에, 걸맞은 의무·공덕으로 봉사한다는 의미에서 윤리감을 뜻하니 마땅히 복권시켜야 한다』느니 『신앙심이 부족한 일본인은 뭔가 살아 있는 규범을 되찾지 않으면 표류할 위험성이 있으니 武士道는 꼭 풀어야 할 과제』라느니 하는 주장 등이 간간이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본은 패전의 잿더미 위에서 재기하여 오늘날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을 건설했다. 니토베는 『불사조는 자기를 태운 재 속에서 되살아난다』면서 『武士道는 독립된 도덕의 규칙으로 소멸될지 모르지만 그 힘은 이 땅(일본)에서 사라지지 않는다』고 강조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오늘의 한국사회의 이념과 윤리는 무엇인가. 강도 용의자가 얼굴만 예쁘다고 「강짱」으로 환호되고, 敵前後退(적전후퇴)일 수밖에 없는 遷都(천도)가 「지배세력의 교체」로 호도되는 가운데 우리 사회의 건강성 회복은 어떻게 가능한가. 일찍이 민족의 전성기를 창출했던 花郞道는 지금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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