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著者와의 대화 -「近代日本論」의 申東俊 교수

『軍隊가 天皇 직속으로 독립된 것이 근대 일본의 재앙이었다』

글 정순태 기자  2004-05-07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明治(명치·메이지) 시대 이후 태평양전쟁 패전까지의 일본은 신화적·봉건적 요소가 짙고 국가기구가 前근대적 특징을 가진 특이한 국가였습니다. 특히 헌법상의 기관도 아닌 「겐로(元老)」라는 몇몇 사람들이 首相 위에 서서 최고의 실권자로 행세했어요. 이들은 중요 국책의 결정과 수상의 선정권을 장악하고 내각에 압력을 가하면서 국정 전반에 걸쳐 지도적 구실을 하였습니다. 근대일본에 「겐로」라는 屋上屋(옥상옥)의 존재가 생긴 배경은 무엇입니까.

『겐로 집단은 메이지유신의 주체세력이었던 사쓰마(薩摩)·조슈(長州)의 藩閥(번벌) 정치가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은 메이지 헌법 공포 뒤 정당(의회)과 反藩閥세력이 藩閥정부를 타도할 가능성에 대비하여 그들 정부의 유지책을 강구했던 것입니다. 사쓰마·조슈 藩 출신의 메이지 유신 공신들은 표면상 은퇴하더라도 겐로로서 정부의 중추 인맥을 독점했기 때문에 배후에서 정국을 조정할 수 있었죠』

―겐로를 정점으로 한 藩閥관료들의 공통된 정치운용 방침을 超然主義(초연주의)라고 일컫던데, 그 이념적 바탕은 무엇입니까.

『藩閥관료들은 근대화 정책의 추진자라는 강한 자부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天皇大權의 관리자로서 정당 및 의회에 대하여 우월·초연한 입장에서 정치를 운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메이지 헌법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입니까.

『메이지 헌법은 독일제국 통일의 최대 공로자인 비스마르크에 심취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독일의 절대주의 관료제도를 모델로 하고, 일본의 전통적 정치사상을 가미한 君主大權주의에 바탕을 두고 만든 것입니다. 이를 「만고불변의 大典」이니 「일본 정서에 가장 적합한 헌법」이니 「아시아의 모범헌법」이니 했지만, 실질적으론 많은 모순과 결함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메이지 헌법에 따르면 천황의 통치大權은 내각에만 위임되어 있지 않고, 여러 기관에 분할 위임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메이지 헌법의 가장 큰 결함이었어요』

메이지 헌법상의 기관으로는 봉건적 지배체제 유지에 급급했던 貴族院(귀족원), 정치에는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도 내각이나 의회도 제약할 수 있는 천황의 자문기관인 樞密院(추밀원)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헌법상의 기관도 아닌 內大臣이 詔勅(조칙)의 작성 등을 통해 국정 전반에 대해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메이지 헌법 제3조의 규정에 따라 국가의 원수이며 통치권을 총괄하는 천황은 통치에 대한 책임으로부터는 완전히 해방되어 있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국정을 운영하려면 각 기관과 정치세력, 특히 정치와 군사를 통합 조절하여 국책을 일원화하는 통합자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겐로라는 최고 실력자 그룹이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伊藤博文의 浮上

근대일본 정치사에서 겐로라고 하면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에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여기서, 이토가 일본 정계의 중심인물로 떠오르게 되는 과정을 잠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정치는 중앙집권적 太政官(태정관) 제도 아래서 메이지 유신 주역을 맡은 사쓰마·조슈 藩 출신인 이른바 藩閥 정치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산죠 사네토미(三條實美)라는 두 귀족(公卿)과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라는 維新三傑(유신3걸)이 중심 지도자였다.

그러나 이들은 메이지 10년을 전후하여 모두 사망했다. 이후 재야세력이 자유민권운동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정부는 입헌정치를 겨냥하면서 1885년 太政官 제도를 폐지하고 내각제를 수립했다.

이런 과정에서 급진적인 재야세력과 결탁하려던 오쿠마 시게노부(大♥重信) 수상을 정계로부터 추방하고 최대의 실력자로 부상한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는 초대 수상을 역임하고 3년 뒤인 1888년 헌법 초안의 심의기관으로 신설된 추밀원의 의장으로 전출했다. 이런 이토는 추밀원 의장직을 사임하면서 천황의 詔勅에 따라 최초의 겐로가 되었다.

이토에 이어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마스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 등의 수상 역임자도 조칙에 의해 겐로가 되었다. 이 밖에 조슈藩 출신의 이노우에(井上馨), 사쓰마藩 출신의 사이고 쓰구미치(西鄕從道: 西鄕隆盛의 동생),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세 사람도 겐로의 반열에 올랐다.

이처럼 메이지 시대에는 모두 7명의 겐로가 존재했으며, 다이쇼(大正)시대에 이르러 조슈軍閥의 제2인자이며 세 차례에 걸쳐 수상을 지낸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두 번 수상을 지낸 귀족 출신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도 겐로가 되었다. 이로써 근대일본에선 모두 9명의 겐로가 존재했는데, 이 가운데 5명은 군인 출신이었다.

『9명의 겐로 중에서도 이토와 야마가타, 두 사람이 메이지 일본을 움직이는 쌍두마차였습니다. 둘 모두 조슈藩의 하급 무사 출신으로서 막부 말기 많은 志士를 배출한 松下村塾(쇼카손주쿠)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尊王洋夷(존왕양이)운동과 그 연장인 幕府(막부)타도운동에 힘쓰는 등 공통된 경력을 가졌습니다. 둘은 동향 친구인 동시에 평생 라이벌이었습니다』

―이토는 수상을 네 번이나 역임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습니까.

『그는 1871년 이와쿠라 도모미 시찰단의 副使로 외유에 참가한 뒤 당시 실권자인 이와쿠라의 신임을 받게 되었죠. 이때부터 개화파 관료로서 재능을 발휘한 그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제거한 최고 실력자 오쿠보에게 접근하여 참의·工部卿(공부경)을 지냈습니다. 1877년 「유신3걸」의 하나인 동향선배 기도 다카요시가 사망하자 조슈派의 중진으로 성장했고, 1878년 오쿠보가 암살된 뒤 그의 후계자가 되었어요』

메이지 정부는 이토의 주도 아래 宮中제도를 개혁하고 華族(화족)제도를 수립한 뒤 1885년 서구식 내각제도를 만들었는데, 이토가 초대 내각 수상에 올랐다. 자신의 주도 아래 제정된 메이지 헌법이 완성단계에 이르자 그는 헌법 심의기관으로 신설된 추밀원의 의장이 되어 헌법 초안에 수정을 가한 뒤 1889년 2월 이를 공포했다. 그는 여기서 일본 황실의 전통과 독자성을 강조하고 천황의 대권을 헌법에 규제받지 않는 초월적 지위에 두었다.

이토는 1890년 의회 개설에 즈음하여 초대 귀족원 의장도 지냈다. 이처럼 그는 초대 수상, 추밀원 원장, 귀족원 의장을 지냈다. 그 뒤 그는 일본 최대의 정당인 정우회 총재와 초대 조선통감 등 거의 모든 新設 국가기관의 초대 首長으로서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이토를 압도한 山縣有朋

그렇다면 이토의 평생 경쟁자로 등장한 야마가타는 어떤 사람인가. 막부 말기 조슈藩에서 기병대 軍監(군감)으로 군인생활을 시작한 야마가타는 幕府軍(막부군)과의 내전인 戊辰(무진)전쟁에서 官軍 참모로 공을 세웠으며, 이어 해외시찰로 서구의 군사지식을 습득한 뒤 귀국했다. 그는 일본 최대의 정예부대 御親兵(어친병)을 조직하고 그 군사력을 배경으로 廢藩置縣(폐번치현)의 단행, 징병제 실시, 鎭臺(진대: 사단) 설치 등에 의해 메이지 정부의 무력적 기반을 다졌다.

1872년 초대 육군경에 오른 야마가타는 1877년 西南전쟁을 비롯한 10차례의 사무라이 반란과 농민봉기를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오쿠보가 죽은 뒤 천황 직속의 參謀本部(참모본부)를 창설하여 統帥權(통수권) 독립의 기반을 구축했다. 통수권 독립은 뒷날 그가 수상으로 있을 때 제정한 軍部大臣의 武官制와 함께 군부 獨走(독주)의 제도적 장치가 되었다.

―이토와 야마가타, 둘 중 누가 더 셌습니까.

『야마가타는 비록 정치가로서 출발은 늦었지만, 군사력을 장악한 그의 세력은 군사상의 발언권이 없는 이토를 文武, 두 분야에서 모두 능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내각제도 실시 뒤 그는 내무대신, 사법대신, 수상, 추밀원 의장 등을 역임했고, 이토로서는 취임이 불가능한 육군대신, 참모총장, 원수까지 되었어요. 그는 스스로 이토에 비해 자신의 인물이 못하다고 느끼고 각 부처의 관료와 군부에 야마가타派를 심어 놓아 그의 정치적 기반은 매우 강력했습니다』

―둘의 성격은 어떠했습니까.

『이토는 개방적이었던 데 비해 야마가타는 폐쇄적이었지요. 이토는 능변과 자신만만한 성격인 데 비해 야마가타는 비밀주의적·권위주의적이었으며 과묵·치밀하고 신중한 성격이었어요. 특히 야마가타는 권력욕과 인내심이 강했죠. 메이지 천황은 이토에 대해 「자기 능력만 믿고 자기 중심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에는 그만한 인물이 없다. 그래서 이토는 우쭐대서 유럽에서는 비스마르크, 淸나라에서는 李鴻章(이홍장), 그리고 일본에서는 자기밖에 없다고 믿었다」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정당정치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차는 어떠했습니까.

『이토는 정당정치를 지향하는 시대적 조류에 민감하여 淸日전쟁 이후 超然主義(초연주의)를 수정하여 겐로 가운데 가장 먼저 정당(自由黨)과 제휴하려 했어요. 반면 야마가타는 民權사상에 바탕을 둔 정당이나 의회가 국가의 중요 정책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천황제도의 후퇴일 뿐 아니라 나중에는 국가조직까지 파괴하는 것이라 믿으며 정당을 적대시하고 국정 운영에 있어 超然주의로 일관하려 했습니다. 1892년 이토는 정당조직을 시도했으나 야마가타를 선두로 한 겐로들의 일치된 반발로 단념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이토는 自由黨의 후신인 憲政黨(헌정당)에다 일부 관료들까지 흡수하여 1900년 9월 「立憲政友會(입헌정우회)」라는 일본 최대 정당을 조직하고야 맙니다』

―두 사람은 외교정책 등을 놓고 격렬하게 대립했죠.

『淸日전쟁 승리로 군부의 지위가 향상되고 이에 비례하여 군벌 야마가타의 비중이 커지면서 야마가타는 외교문제에 개입했죠. 이토는 한편으로는 겐로의 자격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와 대립하는 政友會의 총재로서 정부에 대해 심하게 간섭을 했어요. 이에 야마가타는 가쓰라 수상과 협의하여 천황에게 주청, 이토가 政友會 총재직을 사임하도록 몰아갔습니다. 특히 러日전쟁 직전에는 러시아에 대한 외교정책을 놓고 둘은 정면으로 대립했어요. 英日동맹의 성립은 이토에 대한 야마가타의 승리이며, 러日전쟁 역시 야마가타와 가쓰라 수상의 英日동맹파가 이토 중심의 러日협상파를 물리치고 단행한 전쟁이었지요. 그러나 러日전쟁 시기엔 두 元老가 잘 타협했어요』


야마가타에 밀려 朝鮮統監이 된 이토

―일본은 淸日전쟁에서 「連戰連勝(연전연승)」을 했지만, 러日전쟁에선 「辛勝(신승)」을 했죠.

『1905년 3월10일 奉天(봉천)대회전에서 일본 육군이 이겼지만, 당시 일본군의 탄약비축량은 2개월치도 되지 않았습니다. 일본 전쟁지도부는 이런 사실을 「러시아가 알면 큰일」이라면서 부랴부랴 美國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거중조정을 의뢰하여 終戰(종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도 국내에 사회주의 혁명의 기운이 높아가 전쟁을 계속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배상금을 받아내지는 못했지만, 한반도에 대한 우월권과 南만주 이권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러日전쟁의 승전 후 日帝는 이토를 대한제국에 파견하여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했습니다. 이로써 日帝는 한국의 외교권은 물론 內政까지 관장하게 되었습니다. 이토는 초대 統監(통감)이 되어 韓日합병의 기초를 마련함으로써 한국인에겐 침략의 원흉으로 지목되었죠.

『야마가타가 가쓰라 수상과 짜고 천황에게 주청하여 이토를 대한제국으로 밀어냈던 것입니다. 천황 메이지는 이토를 불러 「한국에는 똑똑한 사람이 많아 설득하기 어렵다. 卿(경)이 특파대사로 나가 한국인들을 설득하라」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이토는 1909년 통감직에서 사임하고 다시 추밀원 의장이 되었다. 그해 10월 그는 만주 시찰과 러시아와의 협상을 위해 만주 하얼빈역에 도착한 직후 安重根(안중근) 의사의 권총 저격을 받아 사망했다.

―이토의 사망으로 야마가타의 독주를 견제할 사람이 완전히 사라졌군요.

『야마가타는 「겐로 중의 겐로」가 되었으며, 일본 정계는 그의 독무대가 되었죠. 특히 그는 일본 육군의 교황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84세라는 長壽를 누린 그의 60년에 걸친 군인 생활은 일본 군부의 성장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마가타는 어떤 생각을 가진 군인이었습니까.

『야마가타는 정당정치가 天皇制 절대주의와 병립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는 통수권 독립이라는 미명 아래 참모본부를 육군성에서 분리 독립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뒷날 군벌 제2인자가 되는 가쓰라 다로 등 10여 명의 장교를 淸나라에 파견, 그들의 연구결과를 「隣邦兵備略(인방병비략)」으로 집약하여 淸日전쟁에 대비한 軍備(군비) 확장이 급선무임을 메이지 천황에게 상소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와 경제도 군비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그의 군사우선論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후 일본의 군사상 법령 및 의견서가 야마가타의 방침을 통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통수권 독립下에서 지휘계통은 어떠했습니까.

『軍의 지휘·용병 그리고 작전에 관한 사항은 천황의 대권으로서 정부와 의회의 간섭이나 개입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西南전쟁 이듬해인 1878년 일본의 軍制는 軍政기관인 육·해군성과 軍令기관인 참모본부의 이원제가 되었죠. 참모본부장은 천황의 막료장으로서 천황에 직속되어, 군령 대권의 발동을 보좌하며 수상과 병립,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던 겁니다. 즉, 참모본부장의 지위는 천황→수상·참모본부장→陸軍卿과 같이 되어 있어 육군경보다 上位에 있었으며, 군령에 관해서는 천황에 직속되어 천황을 보필하는 책임을 지는 데 반하여 천황에 직속하지 않은 육군경은 천황을 보필하는 권한이 없었어요』


軍部의 기습전 버릇과 정부의 追認

―그처럼 육군성보다 우월한 위치의 참모본부를 야마가타가 만들어 놓고 스스로 그 首長에 취임한 것이군요.

『야마가타의 참모본부장 취임은 그 뒤 조슈 군벌의 세력 배양에 크게 작용했습니다. 참모본부를 軍의 최고 통수기관으로 만들어 정부로부터 독립시켜 놓은 것은 메이지 정부가 군국주의를 최고 국책으로 채택했음을 공식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할 때까지 군부 독주를 제도적으로 보장하여 내각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암적 존재가 된 거군요.

『군부가 전쟁을 결정하고 일선부대가 군사행동을 전개하면 정부나 국민은 속절없이 그것을 따라가도록 제도화한 겁니다. 그래서 淸日전쟁, 러日전쟁, 만주사변, 中日전쟁, 태평양전쟁, 이렇게 모두 선전포고 前의 기습에 따른 개전주의에 바탕을 두어 군부가 먼저 군사행동을 하고, 정부가 이를 追認(추인)하는 꼴이 되고 말았죠』

―해군에 대한 군령권은 누가 장악했습니까.

『처음엔 해군도 참모본부장에 예속되어 있었죠. 그러나 1893년 해군도 그 총수인 야마모토의 건의에 따라 육군참모본부와 병립하는 해군군령부를 설치해 독립함으로써 육·해군 통수는 이원화했고, 그들은 해마다 경쟁적으로 군비를 확장했습니다』

―「♥幄上奏權(유악상주권)」이란 무엇입니까.

『군령기관의 관장자, 즉 육군참모본부장과 해군군령부장이 수상을 경유하지 않고 직접 천황에게 상소할 수 있는 권한을 말하는 거죠. 이것은 통수권 독립의 핵심요소이며 특권이었습니다』

―메이지 연간만 해도 전쟁지도에 대한 민간 정치인의 발언권은 어느 정도 유지되었지요.

『淸日전쟁을 앞둔 1893년, 戰時 대본영 조례를 제정하여 전쟁 지도체제를 강화하였을 때 문관인 이토 수상이 천황의 윤허를 얻어 대본영 막료회의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0년 뒤 러日전쟁 당시에는 군부세력이 더욱 강화되어 문관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통수에 관여하지 못하게 되어 군부의 독재성은 법적으로 확립되었습니다』

―일본 군부는 軍令權을 극도로 악용하여 상식적으로 軍令에 해당되지 않는 軍政 부문까지 간섭, 국정을 어지렵혔죠.

『야마가타는 군부의 특권장치를 마련한 장본인이긴 했지만, 군부를 비교적 잘 통제하여 그의 생전엔 군부의 통수권 남용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망(1922)한 후 쇼와 연간에 이르러 통수권을 최대 무기로 삼은 군부의 독주가 시작됩니다』


軍部의 獨斷專橫

―통수권 독립을 구실로 군부가 독단 전횡하는 대표적 사례로 滿洲事變(만주사변)이 손꼽히고 있습니다.

『만주사변(1931)은 통수권 독립을 빙자하여 독주한 關東軍(관동군) 일부 장교들의 불법 전투로 시작된 것으로 太平洋전쟁의 기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만주사변 뒤 일본 군부는 계속 통수권을 남용하여 만리장성을 넘어 華北(화북)으로 침략범위를 확대함으로써 결국 中日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일본 군부가 首相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 제도상의 근거로 통수권 독립과 함께 군부대신 武官制가 손꼽히고 있죠.

『군부대신이란 내각의 일원이 되는 육군대신과 해군대신을 말하는데, 무관제란 이들의 임용자격을 현역 대장·중장에 국한시키는 제도인 겁니다. 군부대신은 메이지 초기부터 관례로 현역 군인이 그 자리에 임용되어 왔습니다만, 1900년 제2차 야마가타 내각 때 군부대신의 현역 무관제를 칙령으로 제도화했습니다. 이에 따라 군부대신은 군부의 통제 아래로 들어갔음은 물론 어떤 유능한 정치가도 군부의 의향을 무시하고는 현역 대장·중장을 자기 내각의 군부대신으로 맞이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근대 일본정치사에서 수많은 내각을 좌초시킨 최악의 제도로서 일본 군부가 그들의 의향에 맞지 않는 내각을 타도할 때 휘두른 傳家(전가)의 寶刀(보도)였습니다』

―獨斷專橫(독단전횡)의 대표적 존재인 「쇼와軍閥」은 어떻게 형성되었습니까.

『1922년 야마가타가 죽은 뒤 두각을 나타낸 것이 우가키 가즈시게 중심의 陸軍大學派(육군대학파)입니다. 육군대학 출신의 영관급 장교들은 육군성과 참모본부의 막료로서 제1차 세계대전 무렵부터 해외로 유학하여 다가오는 국가총력전에 대응하고자 新지식과 新전술을 습득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새로이 육군성·참모본부·관동군의 참모 등의 요직을 차지하고 상호 연락하여 노후한 軍 수뇌부의 구태의연한 태도에 대한 비판세력으로 등장했습니다』

―일본 육군 창설 이래 최대의 반란이라는 2·26 사건을 빚은 皇道派(황도파)와 統制派(통제파)의 대립은 어떠한 것입니까.

『두 파벌 모두 군부독재 실현이라는 최종 목표는 같았습니다. 다만 황도파는 천황 중심적인 급진 강경파였고, 통제파는 軍 전체의 조직을 동원하여 고도의 국방국가를 건설하려는 상대적 온건파였어요.

1930년대 전반기에 우위를 차지했던 황도파는 수령 아라키 사다오 장군의 몰락으로 통제파에 비해 열세에 처하자 천황 측근의 간신을 제거하고 천황 親政(친정)의 쇼와유신을 단행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1936년 2월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새벽 기습으로 수상관저 등 요소를 점령하고 군부 독주를 견제해 온 수상, 內大臣 등 중신들에게 위해를 가했어요. 이때 이들을 반란군으로 단정하고 재빨리 토벌명령을 내린 사람이 히로히토였습니다』

2·26 사건으로 청년 장교 중심의 황도파는 몰락했으며, 반란 진압 과정에서 새롭게 떠오른 통제파가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막료급 중견장교 중심의 육군이 세운 정책이 그대로 國策이 되어 육군천하가 되었다.


영관급 幕僚의 장군 輕視와 下剋上

―佐官級(좌관급·영관급) 통제파 막료들이 軍 중추의 요직을 차지하고 독주했는데, 왜 將官級 장교들이 견제하지 못했습니까.

『淸日전쟁이나 러日전쟁 등의 武力戰 시대에 활약했던 중장·대장들은 물자·과학·돈·국민의 단결력 등이 총동원되는 總力戰 시대의 전쟁지도에 대해 無知했습니다. 해외유학 등으로 총력전 시대의 군사학을 습득한 막료급 장교들은 시대에 뒤진 장군들을 우습게 알고 하극상을 일삼았던 것입니다』

―1937년 中日전쟁 개전 당시의 首相으로서 태평양전쟁 직전에 실각한 문민정치가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문벌 좋고, 얼굴 잘생기고, 글 잘 쓰기는 했지만, 우유부단하고 의지박약했을 뿐만 아니라 책임감마저 희박했어요. 그런 고노에는 본의 아니게 군부와 한 몸이 되어 戰時체제의 확립, 망국적인 삼국동맹 체결, 프랑스領 인도차이나 진주 등 군부 파시즘의 선봉 노릇을 했습니다. 그가 일본의 국정을 맡은 것은 일본 국민들만의 불행으로만 끝나지 않고 일제의 침략전쟁으로 고통을 받은 아시아 민족들에게도 불행이었습니다』

―고노에를 실각시키고 수상, 육군대신, 참모총장을 겸임하여 태평양전쟁 開戰으로 달려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는 어떤 인물입니까.

『천황에게 절대복종하는 쇼와 군벌의 거두로서 政務와 軍務를 한손에 움켜쥐고 극한적인 군부독재를 휘둘러 군국 일본을 패망에 이르게 했던 인물이죠』

―우리 민족은 35년 동안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를 받았습니다. 특히 우리 민족은 1926년부터 1945년 8·15 광복까지의 20년간 히로히토 천황의 치하에서 모진 인권탄압과 경제수탈을 당했습니다.

『1937년 中日전쟁 확대로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하자 히로히토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도록 우리 민족을 개조하려 했어요. 그들은 皇國臣民(황국신민) 교육을 강화하고, 육군지원병·징용·학도병·징병이란 이름으로 우리의 젊은 청년은 물론 젊은 여성들까지 정신대로 끌어 갔습니다』


히로히토의 전쟁책임

―히로히토는 1989년 1월 88년에 걸친 긴 생애를 마감하였죠. 임종 전 그의 쾌유를 바라던 일본 국민들은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렸지만, 우리 민족과는 대단한 악연을 가진 사람이었죠.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 국민의 생명보다 더 중시한 천황제의 존속과 히로히토 한 사람의 지위를 보장받고자 절망적인 전쟁을 계속하여 항복을 지연한 것이 소련의 참전을 불러 마침내 오늘까지 우리가 겪고 있는 국토분단이란 아픔과 고난을 빚어 낸 것입니다. 이를 생각하면 그만큼 우리 민족에게 비극과 불행을 안겨 준 사람은 일찍이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히로히토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있어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까.

『그의 전쟁책임 여부는 근대 일본의 천황제 및 국가구조의 성격과 결부되는 문제죠. 천황이 보필자의 국책 결정을 무조건 재가하는 입헌군주냐, 아니면 천황의 주체적 판단 아래 통치대권을 행사하는 절대군주냐 하는 데 따라 그 책임의 輕重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일본의 천황제는 영국처럼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는 않는다」는 입헌군주도 아니고, 제1차 세계대전 패배로 물러난 독일의 카이저처럼 철두철미한 절대군주도 아닌 일본 고유의 전통과 성격을 띤 독특한 군주였습니다』

메이지 헌법 아래 이루어진 근대 일본의 국가기구는 人格과 神格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 천황이 그 정점에 위치하고 있다. 히로히토의 통치 아래 군부 파시즘 시대 국가기구는 크게 정부(의회는 시녀화함)·육군·해군의 세 기구가 정립되었으며, 천황의 대권은 통치대권(정치)과 통수대권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히로히토는 천황의 이원적 성격을 교묘하게 조작하여 평시에는 입헌군주의 자세를 취하였고, 군사면 등 중대 국면에선 절대군주의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히로히토가 절대군주로서 주체적으로 대권을 행사한 대표적 사례의 하나가 2·26 군부반란의 진압이었습니다. 더욱이 1941년 7월부터 12월까지 네 차례에 걸친 御前會議(어전회의)를 통해 태평양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는 점에서 히로히토는 전쟁책임을 모면할 수 없습니다. 연합군 내부, 특히 소련·호주·중화민국은 천황제를 폐지하고 전범 히로히토를 처형하라고 요구했는데도 그가 천황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反蘇 거점으로서 천황제 가치를 인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輕武裝 속의 經濟優先 노선을 설정한 吉田茂 수상

―戰後 일본 首相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요시다는 1930년대 이후 反軍的 태도를 견지하고 美英 협조외교를 신념으로 삼았던 만큼 1945년 8·15 패전까지는 포부를 펴보지 못한 불우한 외교관이었어요. 이런 정치적 경력을 지닌 그가 패전국의 지도자로서 비굴함이 없이 美 점령당국, 특히 맥아더 원수를 의연한 자세로 대함으로써 패전으로 위축된 일본 국민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었어요. 그는 원래 국민 위에 군림하는 治者意識(치자의식)·특권의식이 강한 관료정치가였던 만큼 국민적 인기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패전 뒤 춘궁기의 식량 위기, 실업자 문제, 인플레를 극복하고 노동계급의 공세에 편승한 질서 파괴 분자들에 대해서는 불량배라고 몰아붙이는 단호한 태도로 사회질서를 유지하여 오늘날 일본의 풍요로운 사회생활 기반을 구축했습니다』

―요시다는 특히 평화헌법을 바탕으로 미국의 再군비 요청을 거부했죠.

『美日 안보조약으로 공산국가의 위협에서 일본의 안전을 확보했으며, 방위비에 소요될 비용을 경제재건에 투입하는 輕무장 속의 경제우선 노선을 설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 노선을 추진할 후계자들도 양성했어요. 나중에 수상이 되는 이케다, 사토, 다나카, 오히라, 미야자와 등 자민당 本流를 키워 낸 「현대일본의 元老」였습니다. 그는 전후 「强國 일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富國 일본」을 지향했습니다. 1967년 10월 요시다가 89세로 사망하자 일본 정부는 「보수안정 정치의 최대 공로자」를 애도하는 戰後 일본 최초의 國葬(국장)을 베풀었습니다』 ●
Copyright ⓒ 정순태의 역사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