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긴급특집] 4.15 총선 이후의 세상
한국 보수층의 洛東江 방어작전

「개헌저지선 훨씬 밑」까지 밀렸다가 朴風과 老風을 타고 北進, 추풍령에서 돈좌되다

글 정순태 기자  2004-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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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代 총선 결과는 열린당의 院內과반수 획득, 한나라당의 改憲저지선 확보, 민주노동당의 화려한 院內 진입, 민주당과 자민련의 몰락으로 나타났다. 이로써 한국 의회는 좌파 强勢, 우파 弱勢의 모습으로 급변했다. 드디어 한국의 좌파는 행정부와 입법부를 모두 장악하는 권력의 일원화에 성공했다.

이번 총선은 처음부터 열린당이 크게 이기는 구도로 짜여졌다. 탄핵반대 집회에 의한 전국 도심의 장악, 反한나라당 감정을 이용한 湖南 맹주의 交代, 遷都(천도)공약에 의한 忠淸圈 민심 확보는 열린당의 不敗必勝을 예고하고 있었다.

崔秉烈 대표체제였던 작년 말, 한나라당은 충청권의 표를 얻기 위해 기존의 黨論을 버리고 수도 이전에 찬성했던 전략적 실패를 범했었다. 만약 민족사적 정통성의 상징인 수도 서울을, 체제 수호의 차원에서 死守한다는 자세를 견지했다면 이번 총선에서는 「수도권을 배신한 열린당에 대한 심판」이 되었을 것이다. 한나라당의 기회주의적 자세는 小貪大失(소탐대실)의 결과로 나타났다. 충청표는 열린당에게 빼앗기고, 수도권에선 苦戰하고 말았다. 남북대치 상황에서 수도 이전은 국민의 사기와 체제의 이념을 훼손하는 문제이다.

이번 총선의 출발점에서 한나라당은 의석 40석 차지도 어렵다고 예상될 만큼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런 점에서 한나라당의 改憲저지선을 견인한 朴槿惠 대표의 역할은 인상적이었다.


탄핵반대 집회의 都心 장악

2004년 3월12일 이후 보름 남짓 「탄핵반대 촛불시위」가 전국 주요 도시의 코아(중심부)를 장악했다. 盧武鉉 대통령 탄핵 「반대」가 「찬성」을 7대 3의 비율로 압도하고 있었다. 「해방정국」 이래 좌파의 최고 전성기였다.

이런 시류를 타고 열린당에 대한 여론조사의 지지율(46.8%)도 한나라당(15.8%)의 3배에 이르렀다. 열린당과 지지기반이 비슷했던 민주당의 지지율은 6.8%로 곤두박질쳤다. 4·15 총선은 刻一刻(각일각)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열린당은 4·19 직후의 민주당처럼 국회의석의 90% 이상을 휩쓸 판세였다.

3월20일 토요일, 서울 광화문·부산·광주·대구·대전·춘천 등지에서 「탄핵무효」 촛불시위 인파가 도심의 차도를 점거했다. 800여 단체의 연합체라는 「탄핵무효 부패청산을 위한 범국민행동」은 『100만 인파가 운집했다』며 기세를 올렸다. 「100만」이란 숫자야 號曰(호왈)이었지만, 어떻든 그 동원력과 흡인력은 대단했다.

한나라당으로서는 전략 不在의 崔秉烈 대표체제를 부인하고 새로운 지도체제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당대회라는 이벤트는 좌파의 탄핵반대 드라이브에 막혀 국민들의 눈길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다. 처음엔 TV방송이 경선후보 간에 벌이는 정책토론의 중계방송 요청조차 거부했다. 그만큼 원내 제1당의 위신은 추락해 있었다. 李相得 사무총장이 지상파 3社를 찾아가 굴욕적으로 머리를 숙였다. 그제서야 방송3社는 못 이기는 체하며 한나라당의 간청을 수락했다.

대표시절의 崔秉烈씨는 「TV시청료 분리징수」라는 무기를 들고 「편파방송」 근절을 요구하러 KBS를 찾아갔다가 정연주 사장에게 「폭탄주」를 얻어 마시고 타협하고 말았다. 왜, 그때 공영방송의 편파성을 야무지게 추궁하지 못했던 것일까. 한나라당은 탄핵정국 내내 공영방송의 십자포화를 맞고 붕괴의 위기로까지 몰리고 말았다. 그때의 폭탄주가 바로 毒酒(독주)였다.

3·23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朴槿惠씨가 대표로 선출되었다. 2차 투표까지 갈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朴후보는 1차 투표에서 과반수 표를 얻었다. 존망의 기로에 선 한나라당으로선 어쩔 수 없었던 선택으로 보였다.

朴대표는 여의도 黨舍를 외면하고 천막당사로 입주했다. 「차떼기 정당」의 이미지를 씻기 위해서는 불가피했을 것이다. 「黨의 얼굴」로서 그의 첫 지방 방문지는 光州 망월동 묘역이었다. 물론 「한나라당의 불모지」 湖南에서 득표의 효과를 기대한 걸음은 아니었을 터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점에서 朴槿惠 스타일의 布石이 만만치 않다는 느낌을 주었다.


『왜 시도 때도 없이 설치느냐』

3월27일 토요일, 우파의 탄핵지지 집회는 光化門 동화면세점 앞 광장, 좌파의 탄핵반대 집회는 길 건너편 교보문고 앞길에서 열렸다. 탄핵반대 집회는 규모나 이벤트의 짜임새에서 탄핵지지 집회를 압도했다.

그리나 우파 집회에 참가한 개개인의 표정은 더욱 비장했다. 모금함이 시위군중 속으로 돌아가자 1만원, 3만원을 헌금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차림새로 보아서는 용돈에 쪼들릴 것 같은 老年들이 그 앞을 그냥 지나친 모금함을 되돌려서 「기어이」 성금을 집어넣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렇다면 왜 老年들이 탄핵지지 집회의 主力으로 나섰을까. 그들은 대한민국의 正體性을 끊임없이 훼손해 온 세력들이 득세하는 현상에 분노하고 있었다. 『우리가 어떻게 만들고 지켜온 나라인데, 선동정치에 넘어간 너희들이 시도 때도 모르고 설치느냐』는 짙은 반감을 공유한 것이었다.

우파는 대한민국이 위험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前 통일원 장관 許文道씨는 이렇게 분석했다.

<盧武鉉 대통령 집권 이후 두드러진 현상은 親北적·親共적·빨치산적 배경의 인사들이 정부나 그 외곽의 여기저기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DJ 정권 때만 해도 숨어서 한 일이지 공공연하지는 못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에서 보면 盧정권의 등장이 가져온 혁명적인 변화라 할 수 있다. 그 변화의 정도는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이 황제 차르를 쫓아내고 부르주아들이 집권한 「2월혁명」에 비유할 만하다.

그러나 부르주아의 정치기반은 의회를 중심으로 한 허약한 임시정부였고, 권력의 절반은 노동자와 병사들의 대표기구인 소비에트의 차지였다. 이른바 이중권력의 현상이다.

盧武鉉의 집권이라 해도 야당인 보수 한나라당이 과반수로 국회를 장악하고 있었으니 한국에도 일종의 2중권력 현상이 있었다. 러시아의 경우 볼셰비키의 지도자 레닌은 『모든 권력을 볼셰비키!』라는 슬로건으로 부르주아를 타도하여 2중권력 현상을 타개하고 소비에트에 권력을 집중시켰다. 이것이 인류사에 재앙을 가져온 러시아의 「10월혁명」이었다.

탄핵소추를 받은 盧武鉉 대통령을 지지하는 열린당이 총선에서 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하면 한국에서도 2중권력 현상이 없어지고, 盧대통령이 선동해 온 노사모 혁명은 着地하게 될 것이다>

한나라당은 한강변 싸움에서 열린당에게 밀려 버렸다. 「차떼기 정당」으로선 작전상 후퇴가 불가피했다. 수도권에선 촛불집회의 주제곡이 되어 버린 노래 「너흰 아니야」의 소리가 너무 높았다. 금강 계선에서 大勢를 反轉시킬 가능성도 없었다. 이미, 충청지역은 『열린당이 이겨야 遷都의 꿈도 이루어진다』는 믿음으로 굳어져 있었다.

朴槿惠 대표는 낙동강 계선까지 후퇴하여 최후저지선을 쳤다. 巨與 견제론은 朴대표의 정치적 홈그라운드에서부터 먹혀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朴風이 北上하기엔 아직도 動力이 부족했다. 열린당이 대구·경북을 제외한 전국을 석권하고 있었다. 선거운동에 들어간 4월2일만 해도 한나라당은 국회의석 40석을 자신하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기독교의 대표기관인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4월3일 집회는 의미 있는 행사였다. 토요일인 이날 오후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서 「대한민국을 위한 국민화합기도회」는 태극기와 십자가, 애국가와 찬송가의 만남이었다. 길이 약 1km의 대학로를 메운 약 10만 명의 기독교인들은 화해, 용서, 회개, 준법을 부르짖었다. 야간 촛불시위에서 등장하는 증오의 함성은 들리지 않았다.

反共기독교의 대학로 집회에는 태극기를 손에 든 아줌마, 새댁, 어머니, 처녀 등 여성 신도들이 특히 많았다. 자녀를 데리고 나온 부모들도 적지 않았다. 그것은 憂國과 애국, 사랑과 화해의 정신으로 뭉친 모임이었다. 이날 기도회가 채택한 호소문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우리 대한민국은 지금 국론분열로 국민이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세대 간의 반목이 더 깊어져 사회구성원의 기반이 되는 가족공동체마저 갈등을 겪는 상황입니다』

한나라당은 부산·경남에서 死活을 걸었다. 영남지역은 대구·경북 27석, 부산·울산·경남 41석으로 모두 68석. 여기서 60석 정도를 차지하지 못하면 한나라당으로선 도저히 개헌저지선(100석)에 다가설 수 없었다.

탄핵 5일 후인 3월17일 한국갤럽의 조사에서 부산·울산·경남의 정당지지율은 열린당 39.6%, 한나라당 21%였다. 3월27일 朝鮮日報와 한국갤럽이 부산·울산·경남의 41개 선거구 중에서 접전예상 지역 19곳을 선정해 전화조사를 한 결과, 오차 범위를 벗어난 선두는 열린당 8곳, 민노당 2곳, 한나라당 1곳 등이었으며, 나머지 8곳은 오차범위內 접전이었다. 朴槿惠 대표 선출 이후 한나라당 지지율 상승과 열린당 지지율 하락을 합한 이 지역 「朴槿惠 효과」는 약 5.1%포인트로 대구·경북의 10.5%보다 작았다. 4월1일부터 朴槿惠 대표의 부산·울산·경남을 향한 발걸음이 잦아졌다.


세계의 進運과는 정반대 방향

총선일을 열흘쯤 앞둔 무렵, 총선 판도에 미묘한 변화가 나타났다. 대구·경북에 이어 부산·경남에서도 한나라당의 상승세가 뚜렷해졌던 것이다. 한나라당이 영남 지방을 석권한 기세로 수도권에 상륙, 개헌저지선을 확보할지도 몰라―이런 예측이 나돌기 시작했다. 4월8일, 그 변화의 현장 부산지역을 답사해 보기로 했다.

먼저, 부산대학교 사회학과 金成國 교수에게 전화를 넣어 인터뷰를 요청했다. 한국사회학회 회장인 金교수는 이날 오후 수도이전 관련 세미나에 참석하러 上京했다가 저녁에 바로 下釜할 예정이라면서 김포공항에서 만나자고 했다. 오후 6시, 金교수와 기자는 김포공항 로비에서 만나 6시30분發 여객기에 타고 함께 김해공항으로 내려왔다.

―한국 사회에서 포퓰리즘이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盧武鉉 정권은 강남 사람, SKY(서울大·고려大·연세大) 출신, 조중동(조선·중앙·동아일보)을 포위 공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강남의 타워팰리스, 서울대학교, 朝鮮日報가 공격목표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복수심으로 가득 찬 좌우 세력의 대결장 같은 양상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화합의 리더십이 필요한 시기지요』

―서울대학교라면 세계에서 400위, 기준에 따라서는 800위 정도 되는 대학인데, 이것을 굳이 끌어내리겠다는 대통령 직속 교육혁신위원회의 발상법은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세계의 進運과는 정반대 방향이에요. 교육의 평준화와 보편화를 중시하는 발상은 시대착오적입니다. 앞서가는 사람을 끌어내려 중간에 맞추는 것으로는 미래 지식사회를 이끌 人材를 키울 수 없습니다. 대학 간에 경쟁을 붙여 超일류대학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타워팰리스 앞에 시민단체가 몰려가서 시위를 벌이는 행동이 법치국가에서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같은 형제간이면서도 강남에 사느냐, 강북에 사느냐에 따라 속마음이나 입장이 다른 것 같습디다. 서울 강남의 아파트 값이 불과 몇 년 사이에 몇 배나 오르지 않았습니까. 국민의 다수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만한 소지는 있어요. 그렇다고 다중의 勢를 몰아 강남 주민을 무차별 왕따하는 것은 포퓰리즘 정치에선 不敗의 전술인지 모르겠습니만, 시장경제 체제에 치명타를 가하는 위험한 행동입니다.

글로벌 기준에서 타워팰리스가 뭐 그리 호화판 주거입니까. 필리핀 같은 가난한 나라에 가도 사설 경호원들이 총을 들고 삼엄하게 경비하는 부자村이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다만, 고통받는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정책과 합리적인 租稅정책으로 소리나지 않게 문제를 해결해 가야 할 것입니다』


집권자 비판은 언론의 義務

―盧武鉉 대통령은 朝鮮日報에 매우 적대적입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盧武鉉 정부를 너무 몰아붙인 데 대한 반작용 아닙니까』

―집권자를 비판하는 것이 언론의 본분입니다. 정부를 옹호하는 기관은 국정홍보처 하나로 충분합니다. 조선왕조 시대에도 3司(홍문관·사헌부·사간원)는 임금을 엄격하게 비판했습니다. 山林(산림: 在野) 학자 南冥 曺植은 明宗에게 「先王의 어린 孤子」,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왕후에 대해선 「한낱 과부」라 지칭하며 失政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렸지만,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지금, TV방송들은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정권을 보위하고, 적지않은 어용 신문들도 盧武鉉 정권에 대해 우호적입니다. 이런 상황下에서 비판적인 신문 두서너 개가 있다고 발끈하는 것은 협량이 아니라 언론의 본질에 대한 이해부족 아닙니까.

『서로를 인정해 주는 관용의 정신이 필요한 시절입니다. 관용은 민주사회의 필요조건입니다. 관용이 없으면 1936년 스페인 내전과 같은 사태를 부르게 됩니다』

스페인 내전은 1939년 프랑코 장군에 의해 마드리드가 함락됨으로써 종결되었다. 내전 중에 전쟁행위로 죽은 사람이 13만5000명, 살육·처형된 사람은 좌파 공화국 쪽이 7만4000명, 우파 국민전선 쪽이 3만9000명이었다. 내전 후의 스페인 국내에서 탄압을 받고 사망한 사람도 1만5000명에 이른다. 내전에 의한 전체 사망자가26만3000명으로 추산된다.

일본 上智대학에서 스페인 현대정치사를 강의했던 J. 스페냐 교수는 그의 저서 「스페인-프랑코 40년」의 서두에 다음과 같이 썼다.

<스페인의 역사는 둘로 갈라선 국민의 역사다. 양쪽은 서로 논란을 거듭하면서 때로는 고함을 지르며 상대를 욕했고, 때로는 상대를 말살하려 하기도 했다. 또 스페인의 역사는 전쟁과 휴전의 되풀이에 관한 역사이기도 하다. 전쟁은 국민의 피폐와 적대자의 쇠약을 가져왔고, 그 결과 패한 쪽의 침묵을 통해 휴전이 찾아왔다. 그러나 전쟁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된다. 이것이 「우리나라 스페인」이다>

―스페냐 교수는 스페인 사람의 기질 자체가 자유주의적인 공존에 적합하지 않아 대화만 하면 다투고, 다투면 싸우고, 싸우면 내전이 된다고 한탄했는데, 그런 기질은 우리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당시 스페인에는 「배부른 스페인 사람」과 「배고픈 스페인 사람」이 있었고, 이데올로기로 나뉜 「두 개의 스페인」이 있었는데, 결국 타협을 뜻하는 자유주의적 공존에 실패하여 끔찍한 내전을 치른 것입니다』


한국 좌파는 주사파와 단절해야

―1789년 프랑스혁명 이래 200년간 좌·우파는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아 무수한 피를 흘렸습니다. 그런 유혈사태를 겪으며 인류가 체득한 지혜가 관용의 정신이었지요. 나는 비록 사회주의 국가가 70년간의 실험 끝에 그 자체의 모순으로 멸망하고 말았지만,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건전화에 일정부분 기여했다고 인정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번 총선을 통해 좌파가 의회에 진입하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문제는 시대착오적인 金日成·金正日 주의입니다. 이제, 한국 좌파도 허위의 탈을 쓴 주사파와 단절해야 할 것 아닙니까. 대한민국을 「분열정권」으로 보는 열린당의 이념을 어떻게 판단하십니까.

『노사모를 주도한 문성근·명계남씨 등이 현재의 열린당을 「잡탕」이라고 규정하면서 17代 總選 후에 「分黨」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념 정당을 지향하겠다는 선언으로 보였습니다. 17代 總選을 통해 민노당도 원내정당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좌파는 선택의 갈림길에 설 것입니다. 과거엔 한국 좌파가 소수파였기 때문에 주사파와의 연대에 대해서도 우리가 관대했던 것입니다』

―盧대통령의 「오른팔」과 「왼팔」이라는 사람들이 학창시절에 주사파 아니었습니까. 盧武鉉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親北좌파입니다.

『학창시절의 이데올로기는 나이가 들면 변하게 마련입니다. 운동권적 사고방식으론 사회에 적응하기 어려우니까요』

―너무 낙관적인 전망 아닙니까. 일찍이 주사파임을 자처한 사람이 대한민국의 정부나 의회에 참여하려면 당연히 전향선언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이번 總選에 출마한 386세대 또는 486세대 후보들 중엔 무슨무슨 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낸 金日成주의 추종자가 적지 않습니다. 일반 유권자들이 그들의 정체를 어떻게 압니까.

『나도 그런 후보자들의 일부가 의회에 진입하면 어떤 스탠스를 취할지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 학계에서 좌편향의 교수가 학생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는 학자들의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예컨대 金교수께서 서울大 문리대에 다닐 때 은사였던 고영복 교수는 북한에서 공작금을 받은 거물간첩으로 밝혀졌고, 당시 철학과 학생이었던 宋斗律은 북한의 정치국원인 사실이 드러나 1심 재판에서 7년형을 선고받지 않습니까.

『나는 100년 전의 낡은 좌파이론으로 학생들을 오도하거나 金日成 주의에 물든 일부 교수들의 언행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PK와 TK 엮은 朴槿惠의 카리스마

金교수와 동래 명륜동 전철역 앞에서 헤어졌다. 여기서 전철을 타고 서면에 있는 롯데호텔 커피숍으로 직행했다. 밤 9시 한나라당 부산시지부 사무처장 윤태경씨와 만났다.

―부산에서 한나라당이 상승세를 타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산의 18개 선거구 가운데 한나라당 후보가 시종 이기고 있었던 곳은 정의화 후보의 중·동구뿐이었습니다. 4월1일 朴槿惠 대표가 부산에 와서 재래시장부터 돌았습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어요. 특히 시장 아주머니들이 열광했어요. 시장 안쪽 점포를 지키던 아주머니들도 모두 朴대표를 보려고 우르르 시장통으로 달려나오더군요. 朴대표와 악수를 한 50代 아주머니는 「내 이 손 안 씻을 거야」라며 몹시 즐거워합디다』

―젊은층에서도 「朴槿惠가 편안하게 보인다」는 말이 나돕디다.

『흔히 정치인이 악수를 청해도 사람들은 쭈볏쭈볏하는데, 朴대표에겐 쉽게 다가가더군요. 그런 민심을 보고 우리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朴대표는 TK(대구·경북) 아닙니까. 원래 PK(부산·경남)와 TK 사이엔 묘한 감정의 골이 있어요. 朴正熙 대통령 집권 말기 PK는 「우리 영샘이」에서 代案을 찾으려 했고, 金泳三 대통령 시절에는 TK 사이에 反YS 감정이 팽배하면서 PK와 대립했습니다. 그런데 朴대표는 한순간에 PK·TK 사이의 감정을 녹여 버렸습니다. 朴대표의 카리스마에 놀랐습니다』

―왜 「朴槿惠 바람」이 불었을까요.

『朴槿惠 대표의 얼굴에서 朴正熙 대통령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살기가 어렵다 보니 朴正熙가 생각난 거지요. 여러 대통령을 겪어 보았지만 생존의 문제를 해결해 준 집권자는 그이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열린당 鄭東泳 의장의 失言도 朴風을 거들어 준 셈이죠.

『공교롭게도 朴대표가 부산에 왔던 4월1일에 鄭東泳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이 언론에 처음 보도되었습니다. 朴風과 老風이 겹쳐 한나라당에 시너지 효과를 안겨 준 것입니다. 열린당은 피니시 블로(결정타)를 먹은 겁니다』


朴風에 날개 달아 준 老風

―왜 피니시 블로라고 생각하십니까.

『부모세대는 대개 20~30代의 자식들에게 논리적으로 달리게 마련입니다. 부모가 설득하려면 자식은 「아버지, 그게 아니고요…」라며 오히려 설득하려 했거든요. 鄭東泳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은 여러 가정에서 부모 세대의 입장을 강화시킨 결과를 낳았습니다. 부모들은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어요. 「뭐라꼬 우리더러 투표도 하지 말고 집에서 쉬라꼬, 그 ××, 인간이 덜 됐어」. 이번에는 자식들이 할 말이 없어진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식들도 자기들 부모를 욕한 사람에게 맞장구를 쳐 줄 수 없잖아요. 「차떼기」로 궁지에 몰린 한나라당에게 반격의 빌미를 스스로 갖다 바친 셈입니다』

―부산에서 한나라당 후보들이 대세를 반전시켰습니다만, 아직도 苦戰 중인 선거구가 몇 개 정도입니까.

『부산의 18개 선거구 가운데 西부산 낙동강 벨트 지역 2∼3개 선거구가 아직도 고전 중입니다』

―강 건너가 바로 盧대통령의 고향인 김해여서 그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까.

『부산 사람들은 「盧대통령이 부산을 위해 해준 게 뭐 있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중인 선거구들은 대체로 후보들의 스킨십이 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산 사람들에게 「盧武鉉 정권=우리 정권」이란 의식은 없습니까.

『盧武鉉 대통령은 「영남의 아들인 나를 왜 안 밀어 주노」라고 하겠지만, 부산 사람들은 대체로 「盧통은 몸만 이쪽이고, 머리는 저쪽이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PK에서 YS의 영향력은 이제 사라진 것입니까.

『YS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박종웅 의원이 YS의 지원을 기대하며 무소속연대를 결성하려고 시도하다가 포기했습니다. 무소속으로 사하乙구에 출마한 박종웅 의원은 지금 3등에 머물고 있습니다. YS의 차남 김현철씨가 고향 거제에서 출마했다가 지지율이 한자릿수에 머무는 상황에서 후보를 사퇴하지 않았습니까. DJ는 침묵하고, JP는 텃밭을 빼앗겼습니다. 한국 정치사에서 3金시대의 종말은 이번 선거를 통해 이뤄지고 있습니다』


公安검사와 「돌아온 사형수」의 맞대결

4월9일 아침 동래구 명륜동 숙소 앞에서 택시를 타고 만덕고개를 넘어 북구 덕천동 로터리 부근에 있는 한나라당 鄭亨根 후보 선거사무소로 향했다. 북구는 부산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열린당 후보에게 가장 苦戰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또한 公安검사 출신(鄭亨根)과 公安사건 사형수출신(李哲)의 맞대결이라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8시30분, 대방상가에 자리 잡은 鄭亨根 후보 사무소로 들어갔다. 낡고 좁은 사무실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다들 밖으로 나갔다고 했다. 혼자 사무실을 지키던 20代 여성 자원봉사자가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대접했다. 『이것, 선거법 위반이 아니오』라 물었더니 『이건 괜찮아요』라고 답했다. 그러고는 『컵라면과 김밥은 茶菓(다과)로 분류되어 괜찮고, 끓여 주는 라면은 식사제공으로 분류되어 안 되는데요』라는 해설까지 해주었다. 그녀는 『요즘, 우린 김밥과 컵라면으로 하루 세 끼를 때워요』라며 웃었다.

오전 9시, 鄭亨根 후보가 사무소에 나타났다. 새벽부터 선거구를 돌다가 참모들과 협의할 일이 있어 사무소에 들렀다고 한다. 그는 하늘색 점퍼, 골덴바지, 캐주얼 구두 차림이었는데, 매우 허름한 모습이었다. 특히 엷은 하늘색 점퍼의 소매 부분에는 때가 잔뜩 묻어 있었다.

―건강, 어떻습니까.

『괜찮아요』

―4월1일 여론조사를 보니 열린당 李哲 후보에게 더블 스코어로 지고 있던데, 지금은 어때요.

『朴槿惠 대표가 부산에 다녀간 후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율이 하루가 다르게 뛰고 있어요. 이제는 해볼 만합니다』

(이튿날인 4월10일자 동아일보의 지지도 조사에 의하면 李哲 42.5%, 鄭亨根 32.5%로 나타났다. 무응답자는 19.9%였다. 10%포인트 차이라면 아직은 모른다)

―오늘 오전에 鄭의원을 좀 따라가면 어떨까요. 선거운동을 어떻게 하는지, 좀 보고 싶습니다.

『따라오겠다는데, 누가 막겠소』

이런 토막 대화를 잠시 나누던 중 그의 방으로 참모 둘이 들어오자 그는 『좀 나가 있어라』라고 했다. 자원봉사자 사무실에서 鄭亨根 후보의 부인을 만났다.

―힘드시지요.

『이번에 선거다운 선거 치르네요』


票 있는 곳이라면…

10시15분, 鄭亨根 후보는 선거사무소를 나섰다. 그는 새마을금고, 구멍가게, 편의점, 미화원의 가건물, 행상, 디자인학원, 미용실, 은행지점, 치과·내과 의원, 기성복 판매점, 덕천고용안정센터 등 선거구민들이 있는 곳이라면 빠짐없이 들러 일일이 악수하고 고개를 숙였다. 덕천고용안정센터의 직원들은 때마침 「단결 투쟁」이라고 쓰인 붉은 재킷을 입고 춘투를 벌이고 있었다. 젊은 노조원이 鄭亨根 후보의 뒤통수에 대고 『유권자도 없는데 멀라꼬 오노』라면서 빈정거리기도 했다.

기성복 매장에서 그는 잠시 러시아人 종업원과 영어로 얘기했다. 그녀는 한국인과 결혼했다고 말했다. 매장에서 밖으로 나오는 그에게 『아까 그 러시아人 종업원, 한국 남자와 결혼했다면 선거권 있을 것 아니오. 왜 그 여자에게만 명함을 주지 않았어요』라고 물어보았다. 그는 『아 참, 그렇지!』 하더니만 대번에 되돌아가 러시아人 종업원에게 명함을 건네고 나왔다. 한 표가 그렇게 아쉽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는 행인들로 붐비는 덕천 지하철 역 앞에 근 한 시간 동안 서 있으면서 오가는 행인들에게 허리까지 꺾으며 명함을 쥐어주었다. 20·30代 중에는 간혹 그가 내민 명함을 뿌리치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를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모욕적 몸짓이 분명했지만, 그는 연방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문득, 국회의원 후보를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서고등학교 학부모들이 학교 후문 음식점에 모여 있다는 연락을 받은 그가 승용차 편으로 이동하는데, 기자도 편승했다. 음식점에는 학생들의 어머니들이 모여 鄭후보에게 우수교사 배치와 학교 앞 주차장 신설을 건의했다. 서민들의 주거지역인 북구 소재 강서고등학교를 명문교로 육성해야 북구 지역 중학교 졸업생이 「부산의 8학군」인 인근 동래구로 주소지를 변경하여 진학하는 폐단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즉석에서 강서고등학교의 육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공약했다.

鄭후보는 구포축산물시장을 한 바퀴 돌며 상인들을 만났다. 상인들은 『어떻게든 장사만 잘 되도록 해주이소』라고 말했다. 기온이 높아진 탓인지 고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떤 점포 입구에는 아직 피도 마르지 않은 소머리·돼지머리가 횡대로 놓여 있었고, 점포 바닥도 온통 핏물로 흥건했다.

핏물을 밟고 고기 냄새에 푹 절은 뒤 그는 축산물시장 앞 도로변에 설치한 연단에 올라가 유세를 했다. 대충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연설이었다.

『總選이 끝나면 열린당에서는 권력투쟁이 벌어질 것입니다. 노사모를 이끄는 文모가 벌써부터 열린당을 「잡탕」이라며 「分黨」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열린당에게 다수당을 주면 자기들끼리 싸운다고 나라 살림 거덜냅니다. 이제는 경제입니다. 열린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면 국가보안법은 폐지될 것이고, 주한미군도 떠나고, 외국 기업도 물러날 것이고, 주식도 폭락합니다. 대한민국을 親北좌익으로 가도록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열린당의 鄭東泳·金槿泰·明桂南이가 이 鄭亨根이를 떨어뜨려고 이곳을 다녀가지 않았습니까. 열린당 지도부가 누구입니까. 金槿泰의 형 셋은 越北했습니다. 鄭亨根이는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겠습니다. 유권자 여러분께서 鄭亨根이를 지켜주리라 믿습니다』

鄭亨根 후보의 연설 도중 시장아줌마들 몇몇이 기자를 한나라당원으로 오해했는지 접근해서 『朴槿惠는 여기 안 옵니꺼. 꼭 한번 봤으면 좋겠어예』라고 말했다. 『朴槿惠가 대통령 되면 즈그 아부지처럼 잘 할끼다』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그녀들과 어울려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다가 鄭亨根 후보를 놓쳐 버렸다. 그 새 그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어딘가로 이동해 버렸다. 아뿔싸! 그의 승용차 트렁크에 여행가방을 넣어 두지 않았는가.

휴대전화로 그를 불렀더니 『축산물시장 안에 있는 돼지국밥집에 점심을 시켜 놓았으니 함께 점심을 먹자』고 했다. 『후보에게 점심을 얻어 먹으면 50배의 벌금을 물어야 하니 내가 사겠다』고 받았더니 『選管委에 신고하지 않고 후보에게 음식물을 사 주어도 불법적인 기부행위』라고 되받았다.

하릴없이 축산물시장 주위를 맴돌았다. 그는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야 돼지국밥집 앞으로 나타났다. 솔직한 말이지, 고기냄새에 질려 돼지국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얼른 여행가방을 챙긴 뒤 그와 헤어졌다.


민노당 당직자의 자신감, 『10석은 얻는다』

오후 2시 구포 낙동강 강둑 앞에서 부산에 사는 막내동생과 만났다. 늦은 점심을 먹은 뒤 동생이 모는 승용차를 타고 창원시로 달렸다. 창원시 중앙동 96번지 파라다이스 빌딩 704호실. 여기에 민주노동당 창원乙구 權永吉 후보의 선거사무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노동자 정당」의 선거사무소로는 너무 호화롭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 무렵, 權永吉 후보는 한나라당의 李柱榮 후보를 지지율에서 15%포인트쯤 앞서 있었다. 선거사무소의 분위기에서 활기를 느낄 수 있었다. 벽면에는 「감동의 정치」, 「행복한 정치, 창원에서 시작합니다」, 「창원의 자랑」 등의 선전구호가 나붙어 있었다. 민노당 중앙당 홍보국 차장 김기주씨가 자원봉사단실에서 기자를 상대했다. 30代 중반의 단정한 얼굴이었다.

―月刊朝鮮 기자입니다. 權永吉 후보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밖에서 이동하며 유세 중이라… 연락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방문한 선거사무소들 중에서 제일 근사합니다. 빌딩 이름도 「파라다이스」이고….

『TV방송에서 중계방송을 위해 시설물을 설치한다고 해서 좀 넓은 사무실을 마련한 것입니다』

―朝鮮日報의 3월27일자 지지도 조사에 의하면 權후보는 지지율 47%로 안정권에 들었더군요.

『이젠, 「정당투표」를 위해 12번을 열심히 홍보하고 있습니다』

―權후보의 부인이 재벌가의 따님이라고 하던데…. 어떤 분입니까.

『옛 동방생명 오너의 따님이에요. 오래전에 동방생명은 삼성그룹에 넘어가 이젠 삼성생명이 되었지요. 부인은 창원 파티마병원에 간병인으로 봉사하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민노당은 노동자 정당이 아닙니까.

『대중정당입니다. 중소기업 사장이 「민노당에 가입할 수 있느냐」고 문의하기도 했습니다. 민노당의 정강정책에 동의하면 물론 가입할 수 있습니다』

―창원乙구의 유권자 중 노동자의 비율은 어느 정도입니까.

『화이트칼라(사무직 노동자)와 블루칼라(육체 노동자)를 합쳐 40%쯤 됩니다』

―權永吉 후보의 포스터에 그려져 있는 장미꽃 한 송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계 진보정당의 심벌 마크입니다』

―이번 總選에서 몇 석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하십니까.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는 의석(20석)이면 좋겠습니다만…, 10석은 가능하리라 봅니다』


말 안 되는 말이 통하는 사회

북한의 對南공작기관은 2003년 11월 「2004년 總選지침」을 통해 민노당에 대한 지지를 노골화한 바 있다.

<이번 총선을 통해 각계 진보적 대중단체들은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굳게 단결하여 진보역량을 대중 속에 더욱 깊게 뿌리내리고, 자신의 정치력을 확대 강화함으로써 민주노동당을 반드시 국회에 진출시켜 대중적 진보운동을 새로운 반석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민노당의 정강정책과 행태를 보면 민노당은 결코 진보정당일 수 없으며 親北사회주의 정당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높다. 민노당은 북송된 공산 빨치산 출신들을 「애국자」라고 칭송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노선이 「진보」임을 자칭한다. 도대체, 세계사에서 이미 수구·퇴보 세력임이 입증된 사회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정당이 어떻게 「진보」라는 용어로 미화될 수 있는 것인가. 더욱이 대한민국 헌법의 준수가 강제되어 있는 정당이 북한의 지령을 받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 제기가 강하다.

權永吉 후보 사무실을 나와 선진국의 전원도시처럼 아름다운 창원시가를 걸으면서 심한 모순을 느꼈다. 창원이라면 朴正熙가 집권했던 1970년대에 한국의 기계공업을 육성하고 自主국방의 悲願을 이룩하기 위해 건설한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도시다. 이제 이곳 노동자의 상당수는 자가용 승용차를 타고 출퇴근할 만큼 여유를 누리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朴正熙는 自己成就(자기성취)의 희생자, 북한 金日成-金正日은 未畢的 故意(미필적 고의)에 의해 300만 명의 인민을 굶겨 죽이면서도 독재왕국을 代물림한 자기성취의 향유자이다. 창원의 2개 선거구에서 한나라당의 두 후보는 「진보」라는 간판을 건 민노당·열린당의 후보에게 밀리고 있었다.

『비 오는 달밤에 단둘이 홀로 앉아 미래의 옛 추억을 생각한다』

문득, 이런 우스개가 머리에 떠올라 쓴웃음을 지었다. 낱말 하나하나는 근사하지만, 모순덩어리가 아닌가.

우리 사회에선 언제부터인가 「말이 안 되는 말」을 해도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막말을 마구 내뱉게 되었다. 국회가 盧武鉉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통과시키자 열린당 鄭東泳 의장은 이를 「의회 쿠데타」로 주장했다. TV방송은 「의회 쿠데타」를 캠페인 기사의 도구로 사용했다. 어용신문들도 이를 그대로 받아 썼다. 국회가 무슨 武力이 있다고 쿠데타가 가능한 것인가.


『아무리 화장 고쳐도…』

4월10일 오전 9시, 부산 북구 덕천동 롯데빌딩 4층에 자리잡은 열린당 李哲 후보 선거사무소에 도착했다. 일단의 젊은이들이 사무실 하나를 차지하고 운동가를 소리높여 부르고 있었다. 『사무실에는 표가 없습니다』라는 표어가 나붙어 있었지만, 사무소는 선거운동원들과 내방객들로 붐볐다. 「지역본부 선거위원회 부본부장」 최학경씨와 만났다.

―저 방에서 노래 부르는 청년들은 누구입니까.

『서울에서 지원하러 내려온 노사모입니다』

―李哲 후보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선거구를 돌고 계실 겁니다』

―李哲 후보가 어제 기자회견을 했던데요. 왜 기자회견을 했습니까.

『鄭亨根 후보의 흑색선전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최학경씨는 李哲 후보의 기자회견문을 내놓았다.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鄭亨根 후보는 지난 4월6일 KBS TV 방송연설과 4월7일 MBC TV 방송연설에서 본인을 겨냥하여 『10개월 옥살이를 한 가짜 사형수』라고 하는 등 공개적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비방하는 행태를 보였다>

―회견문을 보니 「가짜 사형수」 이외의 다른 흑색선전에 대한 구체적 내용이 적시되어 있지 않더군요. 李哲 후보의 홍보물에는 「사생활을 허위, 과장, 왜곡하여 흑색선전을 퍼뜨리는 데 혈안…」이란 구절이 있습디다. 혹시 「李哲 후보가 조강지처를 버리고 400억 재산의 과부와 재혼했다더라」라는 소문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李哲 후보가) 사업을 하는 부인과 재혼한 것을 놓고 그런 악성루머를 유포하고 있습니다. 부인은 벤처기업의 최고경영자이며 대주주이지만 그런 부자는 아닙니다. 공안전문가는 아무리 화장을 고쳐도 본색을 숨길 수 없는 것 같습니다』

李哲 후보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유인태·김병곤·김지하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鄭亨根 후보는 서울지법·고법 검사와 안기부 제1차장을 역임했다. 두 후보는 날카롭게 맞서고 있었다. 李哲 후보의 홍보물에 적시된 반격도 각을 세우고 있었다.

<鄭亨根 후보는 한나라당 내부에서조차 공천 부적격자로 거론된 인물입니다. 더구나 총선시민연대가 16代 총선에 이어 이번 선거에서도 낙선 대상자로 지목한 바 있어, 3관왕의 불명예를 한 몸에 받고 있는 후보입니다>


『무슨 일 있으면 月刊朝鮮에 총을 들고…』

李哲 후보 사무실을 나서 국제신문 논설위원 배병주씨를 西面 롯데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그와 함께 부산진甲구의 한나라당·열린당 후보 사무소를 둘러보았다.

부산진甲의 지지도 추이는 大역전 드라마였다. KBS의 3월23일 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 金秉浩 후보의 지지율(17.3%)은 열린당 조영동 후보(34.7%)의 절반 수준이었다. 두 후보 간의 격차는 갈수록 좁혀졌다. MBC의 3월28일 조사에서 金秉浩 후보 23.1%, 조영동 후보 33.2%였다. 아직 조영동 후보가 10.1% 포인트를 앞서는 상황이었다.

朴槿惠 바람과 鄭東泳의 노인 폄하 발언파문이 반영된 4월10일 동아일보의 지지도 조사 결과는 반전이었다. 金秉浩 후보 33.4%, 조영동 후보 28.4%, 민노당 이성우 후보의 지지도 8.6%. 그러나 지지하는 후보가 없다는 등의 무응답자의 비율이 28.0%에 달했다. 연령별 지지율을 보면 젊은 계층에선 조영동 후보가 조금 앞섰고, 중년 이상에선 金秉浩 후보가 크게 앞섰다. 특히 50代 이상은 金秉浩(47.6%)가 조영동(19.1%)을 압도했다.

직업별로는 화이트칼라, 블루칼라, 자영업, 주부, 무직 등에서 金秉浩 후보가 모두 이겼다. 다만 「학생」은 조영동 후보가 金秉浩 후보를 36.9% 대 18.3%로 더블스코어로 앞섰다.

부산의 중심지 西面의 전철역 앞에 자리 잡은 조영동 후보 사무실 분위기는 붐비기는 했지만 결코 밝지 않았다. 상대를 더블 스코어로 누르다가 역전당해 버린 때문인 것으로 느껴졌다.

물론 조영동 후보는 사무실에 없었다. 선거사무소장을 찾았지만, 바쁜 듯했다. 사무소장 대신에 40代 남자가 기자의 질문을 받겠다고 했다. 명함을 건넸지만, 그는 명함이 없다고 했다. 이름을 물으니까 「자원봉사자」라고만 밝혔다.

그는 거칠었다. 『朝鮮日報와 月刊朝鮮이 우리 당을 모략 중상하고 있다』면서 『나라를 위해 글을 쓰라』고 했다. 기자가 『月刊朝鮮은 나라를 위해 글을 쓴다』고 하자 그는 『무슨 일이 있으면 총을 들고 月刊朝鮮으로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이미 취재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어 부산진구청 건너편에 자리 잡은 金秉浩 후보의 선거사무소에 들렀다. 金후보는 그 시간 선거구를 돌고 있어 만날 수 없었다. 상승세를 타는 캠프여서인지 분위기가 밝았다. 金秉浩 후보 사무소에서 나와 부산역에서 오후 8시發 고속철 편으로 上京했다.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린 사회

日本 공산당의 고참당원으로서 그 기관지 「아카하다(赤旗)」의 평양특파원을 지낸 實錄작가 하기와라 료(萩原遼)씨는 『한국의 親北反美 세력을 「極右 파쇼 守舊 세력」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강조했다. 한국 사회의 격동을 취재하기 위해 서울에 온 그와 4월11일 점심을 함께 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親北세력은 金正日을 추종하니까 「極右 파쇼 守舊 세력입니다. 金正日은 폭력적으로 인권을 탄압하고, 군국주의적 「先軍정책」을 추구하며, 계급적 적대세력에게 대해선 인종말살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히틀러와 같은 전형적인 파쇼입니다. 히틀러는 그래도 독일의 과학기술을 활용하여 國富·國力을 쌓은 사람이라 守舊라고 규정하기엔 다소 문제가 있지만, 金正日은 개혁·개방을 거부함으로써 북한 주민의 생활수준을 朝鮮朝 철종·고종 시절 수준으로 되돌려 놓은 守舊의 표본입니다. 그런데도 親北세력은 그 본질이 「진보 민주」인 한국의 정통 주류세력을 「守舊 꼴통」이라고 비난합니다. 전형적인 공산당式의 선동술이에요』

―한국 사회 좌파의 현재 위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고양기에 들어가 있습니다. 좌파가 의회까지 지배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盧武鉉 대통령이 시민혁명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한국 사회에 계급혁명적 상황이 도래할 가능성이 없지 않아요. 한국의 좌파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나름의 자신감을 가진 것 같습니다』

―한국의 좌파 중에 金日成·金正日 주의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러시아혁명 당시, 볼셰비키는 소수파였습니다. 그런데도 투쟁력이 강인한 볼셰비키가 다수파인 멘셰비키를 제압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한국 사회는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려 있는 것 같습니다. 金正日은 남한에 대해 핵 공갈을 치고 있는데, 남한에선 金正日을 멋있다고 칭찬하는 사람들이 횡행하니까요 』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면 강도가 은행에 침입하여 직원과 고객을 인질로 삼아 농성을 했는데, 인질들 중 한 여성이 악질적인 강도와 감정적으로 통하여 연애관계가 되고 사건해결 후 결혼까지 하는 기묘한 병리현상을 말한다.


『한국 親北左派는 金正日을 위한 기쁨조』

―핵무기를 쥔 金正日이가 남한 사람을 인질로 삼아 대한민국과 국제사회를 협박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남한의 총선에서 이슈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의 좌파는 金正日과의 연애관계를 끊고 북한 동포를 사랑해야 합니다. 북한에선 300만 명이 굶어 죽었는데, 그동안 한국 좌파정부는 무엇을 했습니까. 지금, 필요한 것은 金正日에게 비자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북한 사람을 구출하는 것입니다. 선거에 올인하는 것보다 비참한 처지의 북한 동포들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동포애만 있다면 구출할 수 있는 방법과 지혜는 생깁니다. 한 움큼의 쌀과 간단한 약품을 넣은 풍선을 북녘에 날려서라도 북한동포를 살려야 합니다.

탈북자가 중국에 있는 한국 공관의 문을 두들겨도 문을 닫아걸지 않았습니까? 나는 한국 좌파정부에 실망했습니다. 아직도 만주 연변 지대에는 10여만 명의 탈북자가 헤매고 있습니다. 왜 구출하지 않습니까? 金正日의 눈치를 살피는 것입니까? 그러면 한국의 좌파는 金正日의 기쁨조입니다』

―선생께서 체험한 북한은 어떤 나라였습니까.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도 가치 없는 나라입니다. 가짜 사회주의 공산주의 국가이니까요. 金正日 정권은 본질적으로 파쇼독재정권입니다. 黨의 독재를 훨씬 넘은 개인독재입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민주주의와 공화국을 사칭하는 집단입니다』

―일본 좌파의 북한에 대한 시각은 어떻습니까.

『親北좌파와 反北좌파로 나눠져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이 일본인 납치 사실을 인정한 이후 일본 여론은 분노하고 있습니다. 국가조직을 동원하여 감행한 외국인 납치―설마 설마 했는데, 金正日이가 고이즈미에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일본의 사회당과 공산당이 북한을 지지한다는 말을 꺼내지도 못할 상황입니다. 그동안의 親北노선 때문에 사회당과 공산당에 대한 지지도 크게 떨어졌습니다. 좌파 정당들 내부에도 이제는 反北노선이 힘을 얻고 있어요. 저는 金正日의 악마성에 대해 폭로해 왔던 사람입니다. 그런 저를 모략·중상했던 일본의 親北좌파와 조총련 계열에서도 가만히 저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金正日이가 일본인들을 납치하여 한국 사회를 파괴하는 공작에 악용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한국인들은 그것에 대해 위기감도 느끼지 않고 무덤덤하더군요』

―한국말은 어디서 배웠습니까.

『말은 우호의 도구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사죄하고 친선교류를 이룩하는 데 기여하려면 말부터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1963년 국립 오사카대학 조선어학과 1기생으로 입학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공산당에는 언제 입당하셨습니까.

『내 나이 18세 때이니 1955년이었습니다. 지금도 당비를 꼬박꼬박 내는 당원입니다. 현재 당력 49년, 내년이면 50년 묵은 고참당원이 되는 거지요』

그는 1972년 5월부터 1973년 4월까지 11개월간 일본공산당 기관지 「아카하다」의 평양특파원을 역임했다.

『이 나라는 공산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니고, 인민의 나라도 아니었습니다. 아주 무서운 나라라고 느꼈습니다. 金正日은 양심적인 공산주의자에게도 敵입니다』

―왜요.

『웃음이 없는 나라였습니다. 거리에서는 큰소리 하나 들리지 않습니다. 공포의 왕조였습니다. 제가 사진기를 메고 길을 걸으니까 아이들 몇몇이 호기심을 갖고 졸졸 따라다녀 「얘들아, 사진 찍어 줄 테니 동무들 불러 오라」고 했더니 금방 애들이 모여들었어요. 이제 막 사진을 찍으려는데, 갑자기 한 아주머니가 달려와 「가라, 가!」라고 고함 치며 애들을 흩어 버렸어요. 北에서는 「조선말 배워 입국한 사람은 간첩이며 공화국의 흠을 찾아내 까발리는 악질」이라고 가르칩니다. 허가 없이 외국인을 만나면 그 자체가 반역행위이며 외국인과 식사만 해도 간첩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니 북조선 사람들은 외국인을 보면 후환이 두려워 도망치는 것입니다』


왜 젊은이가 분노하는가

20·30代는 유권자의 절반에 육박한다. 이들에게 한나라당은 코드가 맞지 않는 「꼰대들의 黨」이다. 대학가에서 한나라당은 「딴나라당」이라고 불린다. 대학가에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개」를 「노란색 점퍼를 입은 젊은이」가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포스터도 나붙어 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왜 이렇게 거칠어진 것일까. K의대 J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대학을 나와도 열에 일곱은 갈 곳이 없습니다. 경제성장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이룬 뒤 자만하여 너무 놀았습니다. 삼성 같은 데는 그런대로 굴러가지만 대부분의 대기업들이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소비심리는 커졌습니다. 카드를 마구 긁었습니다.

젊은 신용불량자 중에는 아버지의 사업 또는 학자금 마련을 위한 경우도 없지 않지만 낭비, 특히 名品 중독에 걸린 사람도 많습니다. 60만원짜리 휴대폰을 사고 70만원짜리 유명 브랜드 구두도 삽니다. 비디오 시대여서 몸짱·얼짱이 최고의 가치로 되었습니다. TV에 나오는 남녀들은 멋집니다. 모두들 선망합니다. 어느덧 우리 사회는 껍데기만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입학을 앞둔 딸은 부모에게 성형수술을 시켜 달라고 조릅니다. 돈 없는 가정의 딸들은 더욱 속상합니다. 이제는 계층 이동, 즉 경제적 지위의 상승은 어려워졌습니다. 가난한 젊은이들은 절망하고 있습니다. 기대심리는 커졌지만 자신은 할 수 없으니까 가진 자들이 더욱 미워집니다. 內面보다 껍데기를 중시해 온 우리 사회의 업보입니다』

불만에 찬 젊은이라면 선동에 잘 넘어가게 마련이다. 선동가들은 젊은이들에게 기득권층을 타도하라고 외친다. 사회정의 실현과 「유토피아」 건설의 방해꾼은 한나라당으로 지목된다.

『우리는 無敵의 투표부대이다. 총선일에 놀러가는 것은 우리에게 사치일 뿐이다』

4월12일, 열린당의 鄭東泳 의장이 선거대책위원장직과 비례대표 후보직을 사퇴했다. 갈수록 거세진 老風과 「朴風」에 사실상 떠밀려 갔다. 한길리서치의 국민여론조사에 의하면 그는 수직낙하했다.

3월31일 조사에서 『지지하는 정당에 관계없이 朴槿惠 한나라당 대표와 鄭東泳 열린당 의장 가운데 누가 선거 캠페인을 잘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설문에 鄭의장(47.2%)은 朴대표(30.9%)를 압도했다.

그러나 4월9일 조사에서 鄭의장 28.6%, 朴대표 49.5%로 역전되었다. 모든 연령층에서 朴대표가 우세하다는 답변이 나왔다는 것이다.

鄭의장은 「노란 점퍼 입기」 등 이미지 정치의 감각은 뛰어난 바 있었으나 노인 폄하 발언이 불거지자 페이스를 잃고 허둥대고 말았다. 소설가 李文烈씨는 그를 「경칩 전에 튀어나온 개구리」에 비유한 바도 있다.

반면 朴槿惠 대표의 총선 지휘는 전략적이었다. 朴대표는 巨與견제론으로 50%까지 치솟은 열린당의 상승세를 꺾었고, 국정심판론으로 盧武鉉 정권의 무능과 失政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영남發 동남풍은 추풍령에서 風速이 현저하게 약화된 채로 충청권을 건너뛰어 수도권으로 北上할 수밖에 없었다. 충청권의 票心은 「열린당이 이겨야 遷都가 이뤄진다」로 굳어 있었다. 투표 전날, 국정원에서 예측한 총선 결과는 열린당 140±5석, 한나라당 125±5석인 것으로 전해졌다. 개헌저지선 확보만으로도 국민에게 감사해야 할 한나라당이었다. 朴槿惠 대표 以前의 한나라당은 한국의 국가이익도 우파도 대변하지 못한 기회주의적 보수정당의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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