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국보기행 (3)

글 정순태 기자  200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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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호) 金山寺 彌勒殿


불교적 메시아를 기다리는 中心金堂

전라북도 金堤市(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母岳山(모악산)에 위치한 金山寺(금산사)는 우리나라 미륵신앙의 메카다. 석가모니가 오늘날 중생을 濟度하는 부처님이라면 彌勒(미륵)은 먼 훗날 중생을 구제하는 메시아的 未來佛(미래불)이다.

金山寺 寺蹟(사적)에 따르면 金山寺는 백제 29대 法王(법왕)이 왕위에 오른 서기 599년 殺生(살생)을 금하는 칙령과 함께 國泰民安(국태민안)을 기원하려고 창건했다. 창건 당시는 절의 규모가 작았고, 창건주인 法王도 바로 그 이듬해에 별세했다.

金山寺는 통일신라 景德王(경덕왕:742~764)의 후원을 받은 백제 유민 출신인 眞表律師(진표율사)에 의해 惠恭王 2년(766)에 크게 重創(중창)되었다. 眞表율사는 金山寺에 머물며 미륵신앙을 전파하여 金山寺를 대가람으로 펼쳐 놓았다.

그 뒤 후백제의 甄萱王(견훤왕)도 金山寺의 彌勒佛을 崇奉(숭봉)하여 금산사의 「一新重創」(일신중창)에 진력했다. 그러나 그는 왕자들의 반란에 의해 金山寺의 한 법당에 유폐되어 있던 중 탈출하여 고려 태조 王建(왕건)에게 歸附(귀부)했다. 이로써 「후백제의 꿈」도 사라졌다.

金山寺는 丁酉再亂(정유재란·159) 때 깡그리 불타는 참화를 입었다. 임진왜란 당시 起義(기의)한 處英(처영) 휘하 1000여 승병들의 훈련장이었던 金山寺에 대한 왜군의 보복적 放火(방화) 때문이었다. 선조 31년(1601) 守文 大師(대사)가 복원불사를 일으켜 仁祖 13년(1635)에 彌勒殿(미륵전), 大寂光殿(대적광전) 등이 낙성되었다.

국보 제62호 彌勒殿은 금산사의 中心金堂이다. 화려한 다포식 목조 건물인 미륵전의 겉모양은 3층이지만, 내부는 높이 12m의 미륵삼존불을 모시는 데 알맞게 통층이다. 基壇 양쪽은 돌층계로 된 石造로, 큼직한 화강석으로 초석을 삼았다. 1층과 2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고,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여덟 팔(八) 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체감 비율이 커서 안정감을 주면서도 훤칠하다.


(제11호) 彌勒寺址 石塔


섹스 루머로 엮인 창건설화-우리 石塔의 始源

흔히 韓國을 「石塔의 나라」라고 한다. 中國에는 벽돌로 쌓아올린 塼塔(전탑)이 주류를 이루고, 일본에는 木塔(목탑) 일색이다.

전북 익산시 금마면 가양리 彌勒寺址 석탑은 紀年法的(기년법적) 의미를 지닌 우리나라 最古 最大의 石塔이다. 石塔 양식의 始源(시원)으로 보는 이유는 탑의 형식이 이전에 성행했던 木塔의 각 부 양식을 나무 대신 돌로 충실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높이는 14.2m. 거의 전면이 붕괴되어 동·북면의 6층까지만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본래는 平面方形塔(평면방형탑)으로 9층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9층 塔身(탑신) 위에는 상당수의 장식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쪽 면의 붕괴가 가장 심했다. 1914년 일본인들이 파괴한 부분에 시멘트를 발라 보수했는데, 國寶의 위신과 보존이라는 차원에서 부끄러운 일이었다. 문화재 당국은 최근 石塔 전체를 보존 건물로 뒤집어 씌웠다. 현재 복원을 위한 기초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다른 석탑 1층 塔身의 4면에 문이 하나씩 나 있어 사람의 출입이 기능하다. 탑 속 1층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다. 탑 안 중심에는 거대한 方形擦柱(방형찰주)가 세워져 있다.

1975∼76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미륵사지에 대한 遺構(유구)조사를 했다. 이 조사에 의해 이 석탑의 동쪽에 같은 규모의 석탑이 하나 더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써 미륵사 창건 당시의 가람구조가 이른바 동·서 雙塔(쌍탑) 배치였음을 알게 되었다.

東塔은 그 후 발굴조사에 의해 각 층 部材의 출토로 9층으로 확인되어 1993년에 9층(높이 27.8m)으로 복원되었다.

三國遺事(삼국유사)에 따르면 彌勒寺는 백제 29대 武王(무왕) 때 창건되었다. 武王이 왕비와 함께 龍華山 獅子寺로 가다 연못가에 출현한 彌勒三尊(미륵삼존)을 친견하고, 왕비의 發願(발원)에 의해 연못을 메우고 그 자리에 미륵사를 지었다고 한다.

武王은 삼국시대 최대 섹스 루머인 薯童謠(서동요)를 퍼뜨려 신라 眞平王(진평왕)의 셋째 딸이며 천하절색인 善花(선화)공주를 품에 안은 薯童이다. 미륵사의 창건을 발원한 武王의 왕비가 바로 善花공주이다. 武王의 장인인 眞平王은 신라의 石工들을 보내 미륵사 창건을 도운 것으로 三國遺事에 기록되어 있다.


(제289호) 王宮里 5층석탑


王宮坪城 건설은 백제 武王의 승부수

王宮塔은 백제양식 모방한 고려 초기 石塔

武王의 백제 중흥의 의지가 배어 있는 王宮坪城(왕궁평성)의 중앙 대지 위에는 국보 제289호 王宮里 5층석탑이 서 있다. 그냥 「王宮塔」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이것은 백제 때 건조된 탑이 아니다. 백제계통의 석탑양식을 모방한 통일신라 말기 또는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얇고 넓은 지붕돌(옥개석)과 3단의 옥개받침 등은 彌勒寺址 석탑의 양식 그대로이다.

기단은 단층으로 땅 위에 바닥돌을 깔고 댓돌을 올린 다음 여러 장의 돌로 벽면을 짰다. 각 벽면에는 두 개의 사잇기둥과 귀기둥을 새기고 윗면은 약간의 경사를 내고서 塔身(탑신) 괴임턱을 돋우었다.

塔身部는 1층 벽면에 귀기둥과 한 개의 사잇기둥이 새겨졌다. 지붕돌은 널찍하고 기울기가 완만하며 추녀끝은 살짝 들려 날씬한 느낌을 준다. 높이 8.5m. 石材(석재)는 益山(익산) 지역에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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