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鄭淳台의 국보기행(3) - 變革과 저항의 基地 미륵사상의 본바닥을 찾아가다

甄萱·鄭汝立·全琫準의 성공과 좌절을 낳은 미륵신앙의 메카 母岳山 자락

글 정순태 기자  200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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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62호

金山寺 미륵전


母岳山은 혁명사상과 저항정신 배태하는 子宮이었다


미륵신앙의 근본 道場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母岳山 金山寺(모악산 금산사)는 우리나라 彌勒(미륵)신앙의 根本道場(근본도량)이다. 석가모니가 現世(현세)의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라면 미륵은 먼 훗날 출현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미래의 부처다. 불교적 메시아(救世主)를 기다리는 미륵신앙은 삼국시대에 중국을 통해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되면서 함께 들어왔다.

金山寺는 우리나라 미륵신앙의 시작이며 끝이라고 한다. 이런 금산사의 중심 金堂(금당)이 국보 제62호 彌勒殿(미륵전)이다. 미륵전에는 미륵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런데 웬일일까? 미륵신앙의 본거지인 모악산이 우리 역사상으로는 혁명사상이나 저항정신을 배태하는 子宮(자궁)이 되었다.

필자는 甄萱(견훤), 鄭汝立(정여립), 全琫準(전봉준), 姜甑山(강증산) 등의 역사인물을 취재하기 위해 모악산 일대를 이미 여러 차례 답사한 바 있다. 모악산이 새로운 세상을 열려고 했던 혁명가나 종교가들의 基地(기지)가 된 까닭은 무엇일까?

미륵사상이야말로 소외받은 백성들에겐 福音(복음)이었다. 민초들은 변혁을 꿈꾸며 미륵의 下生을 기다렸다. 이런 시대적·공간적 환경에서 혁명가나 종교가들은 미륵을 자처하거나 혹은 숭봉함으로써 민심을 얻으려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미륵신앙의 뿌리에는 眞表律師(진표율사)가 있다. 眞表律師는 금산사 미륵신앙의 開宗祖로 존숭되고 있다. 그러나 금산사의 창건 시기는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금산사는 백제의 29대 法王 원년(599)에 창건되었다. 처음부터 이름난 규모 있는 사찰은 아니었다. 통일신라의 시기로 접어들자 이런 금산사에 신라의 고승 崇濟法師(숭제법사)가 등장했다.


開祖 眞表律師는 신라의 政策 승려인가


그는 金堤 萬頃(김제 만경) 출신의 백제유민인 眞表를 제자로 발탁하여 당대 최고의 律師로 키웠다. 그렇다면 眞表율사는 누구인가? 다음은 三國遺事 관련 기사의 요약이다.

<12세의 나이로 입문하여 11년 만에 부안의 不思議庵(부사의암)에서 三業을 닦고 亡身懺(망신참)으로써 戒(계)를 얻고 지장보살로부터 淨戒(정계)를 받았다. 그러나 뜻이 慈氏(자씨=미륵)에 있었으므로 변산의 靈山寺(영산사)로 자리를 옮겨 부지런히 정진한 바 다시 미륵으로부터 占刹經(점찰경) 두 권과 證果(증과)의 簡子(간자) 189개를 받는다>

亡身懺은 자신을 학대하여 참회하는 수행방식이다. 眞表律師는 무릎과 팔이 부서져 피가 바위에 뿌려지는 修行(수행)을 했다. 證果는 修行으로 얻어지는 깨달음이고, 簡子는 占(점)을 치는 대쪽이다. 이 簡子는 후일에 釋聰(석총)이란 승려에 의해 고려 태조 王建에게 전해졌다는 바로 그 佛寶(불보)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簡子 189개 중 2개는 미륵불의 손가락 뼈라고 한다. 다음은 이어지는 금산사 重創(중창) 관련 기사의 요약이다.

<景德王(경덕왕)이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맞이하여 보살계를 받고 租(조) 7만7000석을 주었으며 왕비 등도 계품을 받고 비단 500端(단)과 황금 50량을 시주하니 眞表律師는 모두 받아 여러 山寺에 나누어 주어 널리 불사를 일으켰다>

이렇게 眞表律師는 금산사에 머물며 점찰법회를 통해 미륵신앙을 전파하고 金山寺를 대가람으로 펼쳐 놓았다. 점찰법회란 윷놀이를 연상케 하는 대쪽(簡子)을 던져 그 결과를 보고 참회하는 법회다. 그러나 眞表율사의 역할에 대해 모악향토문화연구회 崔洵植(최순식·금평새마을금고 이사장) 회장은 기존의 통념과는 좀 다른 해석을 했다.

『663년까지 지속된 백제 부흥운동의 실패 후 모악산은 백제 유민들의 신앙적 중심지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시기에 신라의 고승 崇濟법사가 모악산에 등장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眞表율사는 崇濟법사로부터 戒를 받고 백제부흥군이 최후까지 저항했다고 전해지는 부안과 변산지역에 가서 사생결단의 구도활동을 하다가 다시 돌아와 금산사를 크게 중창했습니다.

이어 그는 삼국시대를 통해 국경분쟁이 가장 치열했던 충청권의 중심지 보은의 속리산에 출현했고, 다시 금강산까지 진출하여 鉢然寺(발연사)를 세우고 포교활동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眞表율사 개인의 신앙적 포교활동이라기보다는 통일신라 조정의 정책적 배려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 유민에 대한 선무적인 포교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의 진실은 알 수 없지만, 崔선생의 해석은 논리적이었다. 만약 백제 유민 출신인 眞表율사가 백제 유민들의 저항적인 미륵신앙에 동조하는 승려였다면 금산사의 대대적인 중창은 불가능했을 것은 물론 포교활동조차 견제당했을 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일신라의 조정이 백제 유민의 저항적 미륵신앙을 체제에 협조적인 미륵신앙으로 순화시키기 위해 眞表율사를 정책 승려로 활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야 어떻든 통일신라는 五敎九山을 개설하면서 모악산 금산사에 法相宗(법상종)을 開宗하여 미륵신앙의 본거지로 삼았다. 고려 文宗 33년(1079) 慧德王師(혜덕왕사)가 주지로 부임한 이후 더욱 큰 불사를 일으켜 금산사는 88당 711칸의 大가람이 되었다.


鄭汝立이 鄭氏왕조를 꿈꾸던 基地


金山寺는 전주시와 김제시의 접경을 이루는 모악산의 서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전주 시내로부터 가려면 712번 지방도로를 통해 모악산 서북쪽 기슭에 있는 歸信寺(귀신사) 옆을 지나 금산사로 들어오는 것이 지름길이다. 전주종합터미널에서 오전 6시20분부터 오후 8시50분까지 30분 간격으로 금산사行시외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승용차를 이용하는 초행자들은 호남고속도로의 金山寺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오는 길이 찾기 쉽다. 여기서 교통표지판을 따라 동남쪽으로 달리면 금산 쌍룡을 거쳐 곧장 금산사 입구 주차장으로 진입할 수 있다. 새로 닦인 널찍한 도로여서 편하고 시간도 절약된다.

그러나 권하고 싶은 코스는 金山寺 인터체인지에서 院坪(원평)까지 내려와서 원평우체국 쪽으로 꺾어 金山상업고교 앞을 지나 金坪(금평)저수지를 끼고 돌아가는 옛길이다. 여기엔 역사의 현장이 많다.

금평저수지 앞에서 잠시 하차하여 둑 위에 오르면 2등변 삼각형의 帝妃山(제비산: 높이 약 300m)을 정면으로 마주볼 수 있다. 제비산엔 호남의 恨(한)과 怨(원)이 서려 있다고 한다.

건국대 申福龍(신복룡·정치학) 교수는 제비산을 「호남의 抵抗史(저항사)에서 나타난 클리토리스(陰核)」라고 말했다. 역사적으로 매우 민감했던 곳이라는 뜻이다. 생김새도 그러하다.

제비산은 조선왕조 중기의 급진혁명가 鄭汝立(정여립)이 살면서 역성혁명을 기도하며 무장집단을 길렀던 곳이다. 아직도 그의 집터에는 당시의 축대 같은 것들이 남아 있다.

鄭汝立은 전주 南門 밖에서 태어났다. 諸子百家(제자백가)에 통달했던 그는 1570년 文科에 급제하여 栗谷 李珥(율곡 이이)의 門人이 되었으나 栗谷의 사후에 東人의 강경파 李潑(이발) 등과 친교를 맺고 西人 비판의 선봉에 섰다가 宣祖(선조)의 미움을 받고 낙향하여 제비산을 근거지로 삼아 金溝(금구)-院坪 일대를 중심으로 大同契(대동계)를 조직했다.

大同契의 무력으로 丁亥倭變(정해왜변) 때 왜구를 무찌른 그의 위신은 편지 한 장으로 인근 고을 수령들이 다투어 군량을 댈 만큼 높아졌다. 그는 전국의 奇人謀士(기인모사)를 포섭했다. 鄭鑑錄(정감록)을 이용하여 「木子亡 奠邑興」(목자망 전읍흥)이란 讒說(참설)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했다. 木子는 李, 奠邑은 鄭의 破字(파자)다. 李씨 왕조가 망하고 鄭씨 왕조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또한 「天下는 公有物(공유물)」이라면서 전제왕정을 비판했다. 모두가 동등한 大同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鄭汝立은 「英國의 올리버 크롬웰보다 50년 앞선 공화주의자」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전라도와 황해도의 大同契 私兵(사병)들을 동원하여 서울 都城을 남북에서 협공하여 두려뺀다는 시나리오도 준비했다. 그러던 1589년 鄭汝立 일당을 체포하여 거사계획을 자백받았다는 황해도 안악군수 李軸(이축)의 급보가 올라왔다.

조정에서는 鄭汝立을 체포하기 위해 금부도사를 급파했다. 그러나 그는 한 발 앞서 진안 竹島(죽도)로 도피했다. 은신처에서 그는 관군에게 포위되자 자살했다(피살설도 있음). 鄭汝立 사건을 처리하기 위한 己丑獄死(기축옥사)로 인해 東人 1000여 명이 피의 숙청을 당했다. 그후 조선왕조는 호남을 逆鄕(역향)으로 격하, 호남인의 등용을 제한했다.


동학농민전쟁의 지도자 全琫準의 활동무대


모악산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세상을 크게 한 번 바꿔보려고 했던 인물은 鄭汝立뿐만 아니었다. 동학농민전쟁의 최고지도자 全琫準(전봉준)의 활동무대도 모악산 아랫마을인 院坪이었다.

全琫準은 그의 아버지를 따라 院坪에서 약 1km 떨어진 정읍군 감곡면 계룡리 황새뫼 마을에서 성장했으며, 거기서 2km 떨어진 김제시 봉남면 從政(종정)마을에서 서당공부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그의 본거지는 행정구역상 정읍이지만, 성장기의 생활권은 院坪이었다.

한양대 鄭昌烈(정창렬) 교수는 논문 「古阜(고부=정읍)민란의 연구」에서 1893년 금구·院坪 집회의 지도자는 金鳳集(김봉집) 또는 金鳳均(김봉균)이라는 가명을 썼던 전봉준이었다고 밝혔고, 그가 院坪 집회를 계기로 정치적 역량을 크게 키워 1894년 갑오 동학농민전쟁을 이끌어가게 되었다고 논증한 바 있다.

기축옥사 이후 모악산 주변에서 숨을 죽이고 살아왔던 미륵신앙과 참위신앙의 잠재 세력들이 동학의 人乃天(인내천), 즉 「사람이 바로 하늘이다」는 사상을 만나자 院坪장터를 중심으로 大활기를 찾게 되었다.

全州和約(전주화약) 직후 全琫準은 원평에 와서 執綱所(집강소)를 설치하고 호남 일대를 호령했다. 그러나 갑오년 9월의 再봉기 때 全琫準이 지휘한 농민군 2만명은 公州 우금치전투에서 일본군 1개 중대의 기관총 공격을 받고 궤멸했다. 그는 院坪으로 물러나 최후결전을 시도했으나 참패하고 혁명전선의 종막을 고하고 말았다.


解寃相生 주장한 甑山敎 교주


피를 피로 씻은 동학농민전쟁은 새로운 종교 하나를 뜨게 했다. 그것이 모악산 자락을 聖域(성역)으로 삼는 甑山敎(증산교)다. 교주는 20代의 나이로 자기가 사는 고장에서 탐관오리의 횡포, 억울한 농민들의 봉기, 원한의 복수와 살육 등 민란의 비참한 현장을 목도한 姜一淳(강일순)이었다.

甑山은 姜一淳의 號인데, 동학농민군의 최초 전승지인 黃土峴(황토현)에서 10리 떨어진 그의 생가(井邑市 德川面 新基里) 앞산의 이름이기도 하다. 증산교 경전에 따르면 그는 「金山寺 미륵불의 現身(현신)」을 자처하면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역할을 선언했다.

『모든 人事가 道義에 어그러져서 寃恨(원한)이 맺히고 쌓여 三界(삼계)에 넘침에 마침내 殺氣(살기)가 터져나와 세상에 모든 참혹한 재앙을 일으키나니 이제 내가 天地都數(천지도수)를 뜯어 고치고 神道(신도)를 바로잡아 萬古(만고)의 寃(원)을 풀고 相生(상생)의 道로써 仙境(선경)을 열고 造化(조화)정부를 세워 하염없는 다스림과 말 없는 가르침으로 백성을 화하여 세상을 고치리라』

姜甑山은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불교계에선 어떻게 생각하든 증산교 교인들은 金山寺를 그들의 聖域으로 삼고 있다. 미륵전의 미륵불상을 증산교 교주의 化身으로 믿기 때문이다. 姜甑山은 생애의 마지막 9년 간을 모악산 줄기인 제비산 옆 동네에서 살았다. 금산사 밑 2km 지점의 삼거리에서 700m쯤 떨어진 곳이다.

제비산 옆을 지나 1.5km쯤 더 들어가면 상가와 여관 마을이 있다. 모악산 줄기들이 에워싼 아늑한 분지다. 이곳 주차장에서 차를 세우고 냇물을 건너면 금산사를 지키는 石城(석성)의 홍예문과 마주친다. 「甄萱(견훤)성문」이라고도 불린다.


견훤王이 유폐되었던 失意의 현장


견훤은 서기 900년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전주에 입성하여 『百濟(백제)의 忿怨(분원)을 씻겠다』며 후백제를 세웠다. 그는 금산사의 미륵을 받들었다. 금산사의 寺誌(사지)에는 「寺는 甄萱王의 崇奉(숭봉)한 바 一新 重創(일신중창)을 得(득)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견훤은 901년에 泰封國(태봉국)을 세운 弓裔(궁예)와 천하의 패권을 다투었다. 918년 泰封國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미륵불을 자처하던 弓裔가 축출당하고, 王建(왕건)이 高麗(고려)를 창업했다. 이후 王建과 甄萱의 라이벌전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그러던 935년 후백제에서도 쿠데타가 일어났다. 견훤이 넷째 아들인 金剛(금강)을 후계자로 지목하자 장남 神劍(신검), 차남 良劍(양검), 삼남 龍劍(용검)이 이찬 能奐(능환)과 짜고 아우 金剛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했다. 장남 神劍이 왕위에 올랐다.

아들들에게 반역을 당한 견훤은 억장이 무너졌을 터이다. 그는 금산사를 탈출하여 고려의 영토 羅州(나주)로 망명했다. 고려 태조 王建은 곧 장군 庾黔弼(유금필)을 羅州로 급파하여 海路(해로)를 통해 견훤을 開京(개경)으로 모셔가 尙父(상보)로 우대했다.

이듬해인 936년 고려 太祖는 10만여 대군을 일으켜 후백제 정벌에 나섰다. 고려·후백제 양군은 一利川(일리천:오늘의 경북 구미)의 낙동강 상류에서 결전을 벌였다. 一利川전투에서 甄萱이 逆子(역자)들을 다스리기 위해 선두에 서는 바람에 후백제군은 대번에 사기가 떨어졌다. 神劍 등은 지금의 충남 논산시 伐谷面(벌곡면)까지 도주했다가 고려 太祖의 軍門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후삼국의 통일이었다.

그러나 甄萱의 심사는 몹시 우울했을 터이다. 회군 길에 오른 甄萱은 갑자기 등창이 터져 황산벌의 절에서 급사했다. 그의 나이 70이었다.

태조 王建은 후백제 유민들의 저항을 의식해서인지 그가 후대 왕에게 남겨놓은 訓要十條(훈요십조)에서 車峴(차현) 이남에서의 人材등용을 막았다. 車峴 이남은 망국 후백제의 통치지역을 말한다.

견훤성문에서 잘 다듬어진 산행로를 따라 400m쯤 들어가면 일주문이 있다. 입장료는 2600원. 여기에 「母岳山 金山寺」라는 가로 편액이 걸려 있다. 좀더 들어가서 계류 위에 걸쳐 있는 나무다리를 건너면 金剛門과 四天王門을 차례로 만난다. 그 오른편으로는 천 몇백년의 세월을 지켜온 幢竿支柱(당간지주)도 보인다.

다시 中門인 保濟樓(보제루)의 누각 아래 진입로를 지나면 넓게 트인 대지 위에 우뚝 솟은 전각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북쪽의 나지막한 언덕 위에 5층석탑이 올라 있는 방등계단이 보인다. 방등계단은 受戒(수계)의식을 집행하는 곳이다. 그 아래로 서향한 3층 殿閣이 금산사의 중심 金堂인 彌勒殿이다.

1층 처마 밑에는 「大慈寶殿」(대자보전), 2층에는 「龍華之會」(용화지회), 3층에는 「彌勒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모두가 미륵신앙의 도량임을 나타내고 있다.

미륵전은 丁酉再亂(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불탔다. 임진왜란 때 金山寺를 중심으로 일어난 승병장 處英(처영)의 僧兵부대의 활약에 대한 보복이었다. 金山寺의 전각 등 건물 80여 동과 모악산 내 암자 40여 개가 전소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미륵전은 仁祖 13년(1635)에 중창된 것이다.

彌勒殿의 1층과 2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다.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규모가 큰 데다 상부의 遞減(체감)이 큰데, 이것이 안정감을 주는 비결로 보인다. 불당을 세우기 위해 큼지막한 화강석으로 基壇(기단)이 마련되었고, 그 위에 막돌 초석을 올려 놓았다.

여덟 팔(八) 자 모습의 팔작지붕이다. 겹처마이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를 얹은 다포식 건물이다. 각 층의 처마를 받치는 공포들은 雲工(운공) 조각 등으로 치장했고, 우측 처마 밑에는 龍頭 조각이 돌출해 있다. 그리고 그 밑의 벽면에는 불교의 여러 설화를 묘사한 벽화들로 채워져 있다.

겉모양은 3층이지만 속은 하나의 공간으로 확 트인 통층이다. 높이 12m에 달하는 거대한 미륵삼존불을 안치하기에 알맞다. 현재 봉안되어 있는 미륵삼존불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조각가 金復鎭(김복진,1901∼1940)의 작품이다.

金福鎭은 일본 東京미술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했다. 소설가 八峰 金基鎭(팔봉 김기진)의 형이기도 한 그는 항일운동을 하다 두 차례에 걸쳐 5년8개월간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법당 안에 스며든 빛이 삼존불의 얼굴에서 반사되어 더욱 신비스러운 느낌을 준다. 2층과 3층의 정면 낮은 벽에 채광창을 둘러서 바깥의 빛을 받게 했기 때문이다. 바닥에는 「井」자 모양의 우물마루를 깔아 예불공간을 만들었다. 3층까지 이어진 高柱는 모두가 서너 토막의 아름드리 나무를 철물로 두르고 감아 단단하게 엮은 것이다.


최고의 피서지 金山寺


金山寺에는 국보 제62호 미륵전 이외에 보물 10점이 있다. 불볕 더위 아래 石蓮臺(석연대:보물 23호), 石鐘(보물 26호), 6각다층석탑(보물 27호), 당간지주(보물 28호), 大藏殿(대장전:보물 827호), 石燈(보물 828호) 등을 둘러보았다.

이 날 기온은 34.5℃까지 올랐다. 이마의 땀이 눈에 흘러들어 눈알이 쓰릴 정도였다. 처음 일주문으로 들어설 때 눈여겨보아 두었던 그 밑의 계곡으로 직행했다. 바지를 동동 걷어붙이고 시원한 계곡물에 무릎까지 첨벙 쑤셔 박았다. 곧 오장육부가 다 시원해졌다.

1시간이 지나고 다시 30분이 흘렀다. 휴대폰이 걸려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있었을 것이다. 모악향토문화연구회 崔洵植(최순식) 회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원평 진입로에서 기다리고 있다면서 빨리 내려오라고 성화였다. 崔선생은 5년 전 필자가 鄭汝立의 행적을 취재할 때부터 자주 신세를 진 분이다.

崔선생과 필자는 모악산 자락의 음식점 「산천초목」에 들러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다시 자리를 정읍시 감곡면 청원여관으로 옮겼다. 지번은 그렇지만 가랑이만 벌리면 김제시와 정읍시의 관할구역에 한 발씩을 둘 수 있는 경계지역이다. 여기서 밤 늦도록 崔선생으로부터 金山寺 일대의 저항사와 미륵신앙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7월28일 아침 6시 눈을 뜨자 필자는 다시 金山寺로 향했다. 鄭汝立의 제비산, 姜甑山의 동곡약방, 그리고 이른 아침 햇살 속의 彌勒殿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母岳山은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정적 속의 산세는 과연 어머니 품처럼 넉넉하고 포근했다.


國寶 제11호

미륵사지 석탑


우리나라 最古·最大의 석탑


金三龍 마한백제연구소장


오전 8시에 필자는 益山市(익산시) 소재 원광대 부설 마한백제연구소장을 28년 간 맡아오고 있는 金三龍(김삼룡) 교수의 자택으로 전화를 넣었다. 金山寺 미륵전을 보았으니까 이젠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취재해야 백제 미륵사상의 뿌리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金三龍 교수는 원광대 총장시절에도 馬韓百濟연구소장을 겸임한 원로학자이다.

갑작스런 요청인데도 불구하고 金三龍 선생은 오전 9시부터 1시간 정도의 면담을 허락해 주었다. 문제는 어떻게 院坪에서 益山市에 있는 원광대까지 1시간 만에 찾아가느냐였다. 곁에 있던 崔洵植 선생이 지름길을 설명해 주었지만, 처음 가보는 길이라 영 자신이 없었다. 그러자 崔선생은 젊은 회사 직원이 운전하는 차에 타고 그것을 선도차로 삼아 필자의 차가 뒤따르게 했다.

712번 지방도로를 통해 김제 만경평야의 한복판을 달리는 맛은 짜릿했다. 과연 남북으로는 지평선까지 산이 보이지 않았다. 김제의 시가지로 들지 않고 달리다 보니 어느덧 만경강의 큰 줄기를 만났다. 兩岸(양안)에는 큰 다리가 걸려 있다. 여기가 김제시와 익산시의 경계지점이다.

선도차는 익산의 목천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26번 국도로 내처 달리다 다시 23번 국도로 길을 바꾸더니 원광대 안으로 쑥 들어갔다. 폐를 끼쳐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崔선생과는 여기서 작별했다. 金三龍 소장과의 약속시간까지는 오히려 몇 분의 여유가 있었다. 마한백제연구소 소장실에 들어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있는 중에 金三龍 소장이 출근했다. 곧 질의응답에 들어갔다.

―우리 역사에선 泰封國王 궁예, 중국에서는 則天武后(측천무후)가 미륵불을 자처한 사실이 있지 않습니까.

『왕조의 교체기나 국가의 중흥을 꾀하고자 했던 집권자들이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佛國土(불국토)를 지향함으로써 국력신장을 이루고 왕권의 확립을 도모하는 동시에 민심을 한 곳으로 집약시키는 통치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역사상 많은 반란의 지도자들이 미륵불을 자처하기도 했습니다』

궁금한 것이 많았다. 金三龍 교수는 이날의 다음 일정을 취소하고 백제 미륵사상의 성격, 익산 미륵사의 창건 배경 등에 관한 필자의 질문을 받아 주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흘러 낮 12시. 金선생은 일부러 彌勒寺址(미륵사지)의 들머리에 있는 냉면집으로 필자를 안내하여 점심까지 베풀었다. 수천 장 분량의 자료도 챙겨 주었다. 金三龍 선생과 헤어져 곧장 미륵사지로 갔다.


理想的 轉輪聖王을 갈망한 백제 武王


<어느 날 武王이 부인과 함께 獅子寺(사자사)에 가려고 龍華山(용화산) 밑 큰 못가에 이르니 彌勒三尊(미륵삼존)이 못 가운데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모름지기 여기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저의 소원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이 그것을 허락했다. 곧 知命法師(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비스런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고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상을 만들고, 會殿(회전)과 탑과 廊♥(낭무) 3개소씩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고 했다. 眞平王이 여러 工人들을 보내어 그 역사를 돕게 하니 그 절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三國遺事에 기록된 彌勒寺의 창건 설화다. 용화산 아래에서 미륵 삼존불이 출현했다는 것은 곧 미륵의 下生을 의미한다. 彌勒下生經(미륵하생경)에 의하면 미륵이 성불할 때 그 앞으로 미래 세상을 樂土(낙토)로 만드는 군주인 轉輪聖王(전륜성왕)이 나아가 맞이한다. 그렇다면 武王 자신이 바로 이상적인 군주 轉輪聖王이라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륵사 창건이야말로 백제 중흥기를 열기 위한 武王의 勝負手(승부수)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聖王의 戰死(전사) 이후 반세기 동안 백제의 위신은 크게 추락되어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등장하는 백제의 武王은 그 유명한 서동요의 주인공이고 그 부인은 신라 眞平王의 셋째 딸인 善花公主(선화공주)를 말한다. 그러면 신라왕의 딸이 어떻게 백제왕의 왕비가 되었는지 그 과정도 궁금하지만, 우선 武王의 神異(신이)한 출생설화부터 짚어보아야 앞뒤 얘기가 연결될 것 같다. 다시 三國遺事 무왕 條의 기록으로 돌아간다.


삼국시대 최고의 섹스루머 薯童謠


<제30대 武王의 이름은 璋(장)이다. 그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연못의 龍과 정을 통하여 璋을 낳고 아이의 이름을 薯童(서동=맛동)이라 하였는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항상 마(薯)를 팔아서 생활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이 때문에 이런 이름을 지은 것이다>

위에서 서동은 「龍의 아들」로 표현되어 있다. 영웅설화의 모티브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제 아무리 「龍의 아들」이라고 미화했다고 하더라도 마를 캐어 팔던 시골 청년이 어느 날 갑자기 제29대 法王의 후계자가 되어 왕위에 오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서동은 法王의 서자일 가능성이 크다. 과부인 서동의 어머니가 潛邸(잠저)시절의 法王과 혼외정사로 서동을 낳았다고 해야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그 시절엔 龍은 임금의 상징이기도 했다. 法王은 재위 1년 만에 별세했는데, 정실 왕비와의 사이에선 아들을 두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 전개되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만남과 결혼은 三國遺事의 하이라이트 부분이다.

<신라 眞平王의 셋째 공주 善花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서동은) 머리를 깎고 신라 서울로 가서 마를 아이들에게 먹이고 아이들과 친해졌다. 동요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 부르게 했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짝 맞추어 두고

서동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동요가 대궐에까지 알려져서 신하들이 왕에게 간청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게 되었다. 떠나는 공주에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주었다. 공주가 귀양처로 갈 때 서동이 도중에 나와 맞으며 함께 갔다. 공주는 서동을 몰랐으나 우연히 믿고 기뻐하여 따라갔다. 후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가 맞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 서동은 어떻게 백제의 왕이 되었을까? 이어지는 三國遺事의 기록이다.

<함께 백제로 와서 왕후가 준 금을 내어 생계를 도모하려 하니 서동이 크게 웃으며 자신이 마를 캐는 산에는 그런 것이 쌓여 있다고 했다. 공주는 놀라서 그것이 천하의 보배임을 알려 주고 그 황금을 신라의 궁전으로 보내드릴 것을 청한다. 서동은 금을 모아서 구릉처럼 쌓아 놓고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에게 의뢰하여 그의 神力으로 하룻사이에 신라 궁중에 운반했다. 眞平王이 신비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자주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우리나라 石塔의 始源 양식


익산시 금마면 가양리 미륵사지에 이르러 전시관부터 찾았다. 입장료는 무료. 서울에서는 큰 비가 내렸다는데, 이곳은 연일 35℃를 오르내리는 불볕 더위다. 전시관 안은 냉방시설이 잘 되어 있었다. 영상실부터 들어가 미륵사지에 관한 역사와 유물 등을 소개하는 50분짜리 비디오부터 관람했다.

전시관에서는 미륵사지 출토유물·자료 등 1만9000여 점 중 4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을 둘러보고 彌勒寺址 석탑으로 향했다.

2년 전에 이곳을 답사했을 때만 해도 彌勒寺址 석탑은 野地에서 1400년의 풍우를 견뎌내고 있었는데, 이제는 초대형 철제 보호건물 안에 들어가 있다. 석탑을 둘러싼 보호건물 내부의 중앙은 통칸이나 그 가장자리는 5층으로 되어 있는데, 5층에 오르면 통로가 석탑의 꼭대기 바로 위에까지 연결되어 있어 석탑 전체를 아래로 굽어볼 수 있다.

彌勒寺址 석탑은 국보 제11호로서 높이 14.2m이고, 우리나라 最古 最大의 석탑이다. 석탑은 전면적인 붕괴로 동면과 북면 6층까지만 남아 있다. 현재 복원작업을 검토중이다. 본래는 9층이었다.

이 석탑을 우리나라 最古의 석탑으로 보는 이유는 탑의 형식이 그 이전에 성행했던 木塔의 각 부 양식을 나무 대신 돌로써 충실히 재현했기 때문이다. 정영호 박사는 彌勒寺址 석탑을 우리나라 석탑의 始源(시원)이라고 밝힌 바 있다.

양식구조를 살펴보면 基壇部는 木塔과 같이 낮고 작은 편이다. 초층 塔身(탑신)은 각 면이 3칸씩인데, 중앙 1칸에는 사방에 문을 내어 내부로 통하게 했다. 그 내부 중앙의 교차되는 중심에는 거대한 네모형 돌기둥, 곧 擦柱(찰주)를 세워 탑을 지탱하게 했다.

2층 이상의 塔身은 초층보다 훨씬 얕아졌으나 각 층 높이의 차이는 심하지 않다. 옥개석 끝(처마끝) 부분에서 옥개받침까지 사이가 넓다. 또 2층 이상의 옥개석은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줄어들었을 뿐 두공양식의 3단 옥개받침이나 전각의 反轉 등은 초층과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彌勒寺址 석탑은 서쪽 면의 붕괴가 가장 심했다. 그대로 두면 전체가 붕괴할 위험이 있었다. 1914년 일본인들이 파괴 부분에 시멘트를 발라 보수했다.

일제 때 彌勒寺址를 조사한 일본 학자들은 이 탑의 동쪽에 같은 규모의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1975∼1976년 원광대 마한백제연구소의 遺構(유구)조사에 의해 동쪽 탑은 목탑이 아니라 석탑임이 밝혀졌다. 東塔(동탑)은 그 뒤 발굴조사에 의해 노반덮개석, 노반석 등 각종 部材의 출토로 9층으로 확인되어 1993년에 9층(높이 27.8m)으로 복원되었다. 彌勒寺址 석탑은 동탑과 동형의 西塔이었던 것이다.

미륵사는 백제 사원 중에서 가장 거대한 3탑 3金堂 식의 가람이었다(미륵사 가람배치 도면 참조). 남북 중심축선 위에 남에서부터 中門, 탑, 金堂, 講堂(강당)을 배열하여 中門과 講堂 사이를 회랑으로 둘러막았다.

이런 가람을 중앙과 동·서 세 곳에 나란히 배치했으며, 강당은 뒤쪽에 하나만 두어 세 개의 가람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가람이 중앙과 동·서로 三院(3원) 식의 독특한 형태로 배치된 것은 三國遺事 창건설화에 기록된 바와 같이 미륵삼존을 모셨기 때문이다.

특히 미륵사는 그 배치구성이 기하학적으로 잘 조화되어 창건 당시 均齊法(균제법)을 갖고 계획했음을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國寶 제289호

王宮里 5층석탑

통일신라 말기~고려 초에 만든 장중한 탑


백제 武王의 遷都地 혹은 別都


彌勒寺址 석탑 답사를 끝내고 남쪽으로 6km쯤 떨어진 益山市 王宮面 王宮里 유적지로 직행했다. 王宮里 산 80-1번지 일대에 있는 王宮坪城(왕궁평성) 또는 모질메山城 등으로 불리는 王宮里 유적은 그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다.

이곳은 馬韓의 도읍지, 백제 武王의 遷都地(천도지), 報德國(보덕국) 터, 후백제의 도읍지 등으로 전해지고 있다. 호남지역에 새워졌던 거의 모든 나라의 이름이 망라되고 있는 셈이다.

국립 부여박물관 문화재연구소는 1989년 이후 현재까지 이곳에서 계속 발굴조사를 시행하고 있다. 그 중간 결과에 의하면 백제 말엽부터 통일신라 말엽까지 존속했던 성곽 및 건물지와 관련된 유적이 많다.

발굴조사단은 여기가 백제 武王의 遷都地 또는 別都(별도)이거나 백제 멸망 후 신라가 고구려에서 넘어온 安勝(안승)을 報德國王으로 봉하고 익산지역에 거주케 했다는 기록과 관련 깊은 곳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출토 유물은 백제 말부터 통일신라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건물의 지붕에 올려졌던 각종 기와류와 생활용기도 백제의 서울이었던 공주·부여 지역의 것과 비교하여 손색이 없다. 이것은 왕궁평성, 즉 왕궁리 일대가 백제의 문화적 중심지였음을 말해 준다.

국보 제289호 왕궁리 5층석탑은 왕궁평성 중앙의 대지 위에 자리잡고 있다. 왕궁리 5층석탑은 백제 석탑을 모방한 통일신라 말기 혹은 고려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높이 8.5m로 그리 크지는 않지만 매우 장중한 느낌을 준다.

단층 기단에 얇고 넓은 옥개석(지붕돌), 3단의 옥개받침 등은 미륵사지 석탑을 쏙 빼닮았다. 基壇部는 각 면이 2개의 柱(탱주)와 隅柱(우주)가 조각된 3매의 돌로 깎아 맞추었으며, 下臺甲石(하대갑석) 또한 1면을 3매의 돌로 쌓았다.

塔身部의 초층 몸돌은 각 면의 중앙에 1개의 柱와 모서리에 隅柱를 새겼는데, 모두 8개의 돌로 이루어졌다. 그 위에 지붕돌을 얹었는데, 평평한 모습이나 네 귀퉁이를 가볍게 들리어 전형적인 백제계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세계에서 유일한 純金板 金剛經 발견


왕궁리 5층석탑은 1965년 12월 해체 복원작업 중 1층 옥개석과 기단에서 수습된 많은 舍利莊嚴具(사리장엄구)가 발견됨으로써 더욱 유명해졌다. 그것은 금제 사리함(높이 9.8cm), 유리제 사리병(높이 7.7cm), 금동제 사리외함(12.3cm), 순금제 금강경판(길이 14.8cm, 폭 13.7cm), 청동여래입상(높이 17.4cm) 등이다.

이들 중에서도 金剛經(금강경)을 새긴 19장의 순금판은 세계에서 유일한 것이다. 각 장에는 17行의 경문이 쓰여져 있는데, 글짜 모양으로 보아 정밀하게 조각한 판목을 누른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서 수습된 사리장엄구는 王宮里 5층석탑보다 먼저 국보(제123호)로 지정되었는데, 해외 순회전시를 거쳐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976년 이 탑 주변의 발굴조사에서 「官宮寺」(관궁사)라고 쓰인 銘文(명문)기와가 나와 사찰의 이름이 밝혀졌다. 이것 역시 이곳 일대의 옛 위상과 영화를 말해 준다.

王宮里 유적지를 답사하는 동안 어느덧 긴 여름날의 해가 꼴깍 넘어가고 주위가 어둑어둑해졌다.

5층석탑 아래쪽 흐드러지게 핀 백일홍도 이젠 거무스름하게 보였다. 나무숲에서는 풀벌레 소리가 진하게 들려온다. 여기서 익산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고속도로에 오르면 서울까지 3시간이면 족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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