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全州에서 한 「金庾信 장군과 三國統一」 강연 요약

『文武王과 金庾信의 對唐결전은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民族史 최고의 결단』

글 정순태 기자  200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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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州 駕洛 종친회의 연사로 나서게 된 까닭


지난 7월27일 오전 6시45분 필자는 아침식사를 거른 채 「湖南第一門」의 고을 全州를 향해 출발했다. 이날 오전 11시부터 전주상공회의소 5층 강당에서 개최되는 駕洛金氏(가락김씨) 전북 종친회 지도자 모임의 강사로 초청받았기 때문이다. 주최측에서 필자에게 요청한 강연 제목은 「金庾信(김유신) 장군과 삼국통일」이었다.

처음에 필자는 여러 차례 사양했다. 그 이유는 부산 사투리의 억양이 유별난 필자가 호남의 首府(수부)에서 百濟(백제)의 멸망사를 들춰야 한다는 껄끄러움보다는 강사로 나서는 것 자체가 필자로선 생소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주최측의 권유는 집요했다. 駕洛 전북 종친회 상임부회장인 金在瑢(김재용)씨는 그 때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한 달 전부터 무려 10여 차례나 필자에게 전화를 넣어 강사로 나서도록 종용했다.

거절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필자는 재작년 月刊朝鮮에 「金庾信과 그의 시대」라는 글을 연재했고, 그것이 작년에 「金庾信-시대와 영웅」이란 한 권의 책(도서출판 까치)으로 묶여 발간되었기 때문이다. 주최측은 저자의 소감을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날 필자는 오전 11시부터 1시간 동안 강연하기로 되어 있었다. 10분 전에 강연장에 입장했다. 그날 기온은 34.5℃. 약 400명이 모인 대강당은 냉방시설이 없어 후끈했다. 강연회에는 駕洛 종친회 金琫鎬(김봉호) 전국회장, 전주 지역 儒林(유림), 대학 교수 등이 참석했다.

행사시간이 지연되어 11시30분에야 강단에 서게 되었다. 다음은 필자의 강연 요지다.



金庾信은 민족 형성에 제1의 공로자


우리 민족이 신라의 삼국통일 이래 처음으로 하나로 통합된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삼국통일의 최고 元勳(원훈)은 누가 뭐래도 金庾信(김유신)입니다. 그렇다면 金庾信은 우리 민족 형성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 일각에선 金庾信과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매도를 마치 지성적인 일처럼 호도하는 풍조가 번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하늘 아래에서 통일신라를 부정하는 高句麗 중심주의의 유령이 배회하는 것입니다.

북한의 이데올로기적인 역사서인 「조선전사」를 보면 그들은 민족의 정통성을 단군조선-고구려-발해-고려에 두고 있습니다. 북한에선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북한의 역사관은 북한 주도의 「통일전선」에 복무할 수 있도록 변조한 것인 만큼 원천적으로 설득력을 지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세계 어느 문명국가에도 건국과 관련한 신화가 있게 마련인데, 북한의 이데올로기들은 이른바 「주체의 방법론을 지침으로 하여 역사를 체계화한다」는 명목으로 역사를 고치고 있습니다. 즉 평양의 檀君陵(단군릉)에서 나온 남자의 뼈에 대한 연대를 측정한 결과, 「1993년 현재, 5011년 전의 것」이라고 단정했습니다.

이런 시도는 평양을 통일한국의 중심에 놓으려는 불순한 목적 때문입니다. 저는 북한의 소위 「학술보고」라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북한의 「조선전사」에서는 수령의 敎示(교시)가 모든 章(장)과 節(절)의 첫머리에 본문의 글자보다 큰 고딕활자로 적혀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책에도 「수령의 전지전능한 역사해석」을 이처럼 대서특필한 사례는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역사상 본격적인 領土國家(영토국가)가 등장하는 삼국시대는 어떻게 전개되는 것일까요?

기원전 1세기 중반 지금의 松花江(송화강) 일대에 자리잡고 있던 夫餘國(부여국)에 朱蒙(주몽)이란 영웅이 출생합니다. 朱蒙은 천재 해모수와 물의 神인 河伯(하백)의 딸인 柳花(유화) 사이의 아들로서 부여의 왕실에서 성장하다가 부여의 왕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제거될 위기에 처하자 남쪽으로 도망을 칩니다. 朱蒙이 부여군의 추격을 받으며 압록강의 지류인 엄수에 당도했는데, 강을 건널 배가 없었습니다. 이 때 주몽은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나는 天帝의 아들이고 河伯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하는 중인데, 추격병이 급하니 어쩌면 좋겠는가?』

그러니까 물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이루어 엄수를 건너갈 수 있게 했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았다는 설화적 기록보다 朱蒙이 天孫族(천손족)임을 만천하에 선언했다는 사실입니다.

드디어 朱蒙은 압록강 중류 卒本(졸본)에다 高句麗를 세우고 주변의 城邑國家들을 하나하나씩 정복해 갑니다. 이런 高句麗는 그후 樂浪(낙랑) 등 漢四郡과 夫餘國 등을 정복하고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걸쳐 강력한 영토국가를 형성합니다.

백제의 지배층 역시 고구려 왕실처럼 동북아 최고 명문인 夫餘族입니다. 고구려 시조 朱蒙이 망명할 때 임신 중이던 禮氏(예씨) 부인을 부여에 두고 떠납니다. 朱蒙은 망명 후 卒本王의 딸 召西奴(소서노)와 재혼하여 그 사이에 沸流(비류)와 溫祚(온조)라는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한편 부여에 남아 있던 禮氏 부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이름이 類利(유리)입니다. 類利가 산 넘고 물 건너 고구려로 찾아오자 朱蒙, 즉 東明王(동명왕)은 크게 기뻐하여 그를 태자로 삼았는데, 그가 고구려의 2代 임금 琉璃王(유리왕)이 됩니다.

이에 후계자의 지위를 빼앗긴 沸流와 溫祚가 남하하여 나라를 세웠는데, 沸流는 오늘의 인천에다, 溫祚는 지금의 서울 송파구 일대에 도읍을 정합니다. 그런데 沸流는 건국사업에 실패하고 溫祚가 세운 什濟(십제)에 합류하니 그로부터 百濟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후 백제는 先住民인 馬韓 50여 개 城邑國家들을 하나하나 정복하여 강력한 영토국가를 이루게 됩니다. 이런 백제 왕실은 고구려의 시조 東明王의 사당을 만들어 제사를 올렸다니까 고구려와 한 뿌리임을 스스로 밝힌 것입니다.

백제는 고구려처럼 전국을 5部로 나눠 통치했습니다. 이런 사실 등으로 미루어 고구려와 백제의 聖數(Holy Nomber)는 「5」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聖數는 어느 한 민족이나 집단이 신성시하거나 선호하는 특정한 숫자를 말합니다.


「出」字形 왕관을 쓴 王과 角杯를 지닌 騎馬武士


신라도 辰韓(진한) 12개국 중 하나인 斯盧國(사로국)이 사방의 고만고만한 城邑國家들을 차례로 정복하여 영토국가로 발전한 것입니다. 한편 낙동강 서쪽, 지금의 경남지방에도 弁韓(변한) 12개국이 있었는데, 이들은 가야연맹국을 형성했지만, 강력한 영토국가를 이룩하지 못해 결국 신라에게 멸망되고 맙니다.

우리 민족이 처음부터 단일민족이었다는 것은 하나의 幻想(환상)입니다. 단일민족이란 것이 무슨 민족적 훈장이 되는 건 아닙니다. 세계화 시대에 단일민족이라는 것은 오히려 국가발전에 있어 장애 요소로 지목되기도 합니다. 사실, 신라의 판도가 되는 辰韓 지역만 하더라도 그 주민 형성과정은 3중 4중으로 복잡한 것입니다.

그 토착 先住民은 先史時代부터 살면서 그 지역에 수많은 고인돌을 남겨놓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BC 3세기 중국 秦始皇(진시황)의 학정을 피해 요서-요동 지역에서 이민해 온 사람, BC 2세기에 넘어온 고조선 유민이 섞였습니다. AD 37년 낙랑 멸망 후 투항해 온 사람도 5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신라왕의 성이 朴씨, 昔씨, 金씨의 3姓이라는 점으로도 그 지배층이 변화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6세기 신라왕들은 시베리아 자작나무 모양의 「出」字形(「출」자형) 왕관을 썼습니다.


新羅의 삼국통일은 민족의 再통일 아닌 최초의 통일


신라와 비슷한 나라가 가야연맹국입니다. 가야왕들도 신라왕처럼 「出」字形 왕관을 썼습니다. 뿐만 아니라 騎馬武士들의 술잔 혹은 물잔으로 사용되었던 角杯(각배: 뿔잔)는 한반도에선 신라와 가야의 옛 땅에서만 발굴되는 유물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라와 가야는 서로 親緣性(친연성)이 깊은 국가라 할 수 있습니다. 신라는 처음에 서라벌 여섯 개 마을의 촌장이 모여서 나라를 세웠고, 가야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여섯 개의 알에서 여섯 명의 사내아이가 태어나서 각각 여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라와 가야의 聖數는 「6」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4國의 지배층을 보면 고구려-백제가 한집안이고, 신라-가야가 비교적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4國 간의 親疎(친소)관계는 전혀 딴판이라는 점입니다.

예컨대 고구려의 南進勢(남진세)가 강력할 때는 백제-신라가 동맹관계를 맺었고, 가야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신라에 대항하기 위해 주로 백제와 동맹정책을 채택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4國 간의 공통점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4國 주민의 언어가 알타이系라는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알타이라면 시베리아의 바이칼호 서쪽과 카자흐스탄 동쪽 사이에 있는 알타이산맥 일대의 초원지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선조의 다수는 북방 초원에서 말 달리며 살다가 따뜻한 남쪽을 향해 내려와 차츰 농경민족으로 정착했던 것입니다.

흔히, 말 타고 광활한 초원 위를 달리는 유목민족의 생활방식이 미화되고 있지만, 이래서는 문화의 축적이 어렵습니다. 유목민족에서 농경민족으로의 변화가 바로 문화의 발전인 것입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인적·물적 교류를 했고, 언어도 비슷했습니다만, 그 당시 동일민족이란 의식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세 나라의 국가의식은 처음엔 자기를 지키려거나 판도를 넓히려는 國家이기주의에서 출발했고, 그것이 나중에 一統三韓(일통삼한)의 의식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 백제, 신라는 처음부터 강력한 영토국가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그 영역이 사방 수십 리 정도의 城邑國家였습니다. 이런 삼국이 주변의 성읍국가를 하나하나씩 병합하여 領土國家를 이루고 드디어 서로 국경을 개 이빨처럼 맞대게 됩니다. 그 후 300여 년 간 3國은 정복국가의 속성상 먹고 먹히는 전쟁을 거듭했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近肖古王(근초고왕) 때의 백제는 고구려의 故國原王(고국원왕)을 죽이고, 長壽王(장수왕) 때의 고구려는 백제의 개로왕을 죽이고, 眞興王(진흥왕) 때의 신라는 백제의 聖王(성왕)을 죽였습니다. 당연히 삼국 간에는 서로가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깊은 원한이 쌓이게 됩니다.

따라서 신라는 민족의 再통일을 이룩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사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한 것입니다. 신라가 외세에 의지해서 동족의 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주장은 논리가 닿지 않습니다.

그때 삼국 사이는 서로가 서로를 다른 나라, 또는 敵國(적국)으로 보는 국제관계였습니다. 삼국시대 말기 東아시아 세계에선 고구려-백제-왜국의 南北동맹과 신라-당의 東西동맹이 충돌하여 국제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신라의 입장에선 고구려-백제의 협공을 받아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遠交近攻(원교근공)의 국가정책을 구사했던 것입니다.

삼국통일은 그 시기가 빨랐으면 더 바람직했던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삼국시대는 우리 역사상 최장기간의 亂世(난세)였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 될수록 민초들의 삶에는 고통이 가중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누구든 압도적인 힘으로 亂世를 평화의 시대로 전환시켜야 했습니다. 그러한 시대정신을 실현한 인물이 金庾信 장군이었습니다.

말기의 고구려나 백제는 자멸할 만한 내부 요인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통일의 주체가 될 수 없었습니다.

고구려의 외교는 오늘날 북한의 「벼랑 끝 외교」처럼 탄력성이 부족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淵蓋蘇文(연개소문)은 독재정권을 세우기 위해 고구려의 지도부 180명을 주살하는 등 피의 숙청을 감행했습니다. 이렇게 독선적이면 나라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백제의 의자왕은 전투에선 여러 차례 이기기도 했지만, 전쟁에선 패배한 非전략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곧 교만해져서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등 환락에 빠져 국력을 낭비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고구려는 淵蓋蘇文이 혁명을 해서 망했고, 백제는 의자왕을 제거하는 혁명을 하지 못해 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金庾信에게서 배워야 할 역사적 교훈


망국 금관가야의 후손인 金庾信이 어떻게 해서 신라의 眞骨(진골)에 편입되어 평생 동지 金春秋를 왕(太宗武烈王)으로 만드는 킹 메이커가 되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하게 되는지, 이에 관한 자세한 말씀은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 잘 기록되어 있고, 졸저 「金庾信-시대와 영웅」에서도 부연 설명했기 때문에 여기선 생략하겠습니다.

여기서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文武王과 金庾信 장군의 對唐(대당)전쟁 결심이야말로 우리 민족사상 가장 빛나는 大결단이었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平壤城(평양성)이 떨어진 후 羅-唐 양국은 戰後 처리문제를 둘러싸고 날카롭게 대립했습니다. 그때 신라가 전쟁을 결단하지 못했다면 唐三郡(당3군) 같은 게 밀고 들어와 오늘의 우리도 중국의 50여 소수민족 중 하나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羅-唐 7년 전쟁에서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도 신라의 깃발 아래 唐軍과 싸워 이겼습니다. 그래서 신라 통일 이후 우리 민족은 하나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에 이르러 삼국시대로 소급되는 國系意識(국계의식)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의 변화는 예측불허입니다. 만약 북한의 金正日 체제가 그 스스로의 모순 때문에 붕괴한다면 제3국이 그 공백을 이용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때가 오면 우리 대한민국은 文武王과 金庾信 장군의 결단에서 역사적 교훈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自主를 위해 전쟁을 각오하는 이런 민족적 결심만 형성된다면 오히려 전쟁도 막고, 평화적으로 민족의 進運(진운)을 열어갈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오늘날 金씨가 우리나라 인구의 20%를 차지하고 그 중에서도 駕洛金氏가 그 절반 이상인 500만명에 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21세기를 통일신라 이후 제2의 민족 전성기로 만들어가야 할 숙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환기에 여러분께서 민족화합과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해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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