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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侵前夜의 南과 北

鄭淳台의 6·25 南侵전쟁이야기(1)/ 전쟁의 序幕

글 鄭淳台 기자  201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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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지휘부는 소련군 대위 출신, 국군은 日軍 장교 출신이 주축








著者 약력

1945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1968년 서울대 중문학과 졸업 후 입대해 1970년 육군 중위로 예편했다. 1971년 &lt국제신문&gt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1983년 월간 &lt마당&gt 편집장, 1984년 &lt경향신문&gt 차장을 거쳤다. 1987년 &lt월간중앙&gt으로 옮겨 부장, 부국장 主幹(주간) 및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2000년부터 &lt月刊朝鮮&gt에서 편집위원으로 일하다 2009년부터는 프리랜서로 집필 활동 중이다. &lt월간중앙&gt과 &lt月刊朝鮮&gt에 김옥균, 최명길, 정도전, 박지원, 정조, 의상, 왕건, 정약용, 유성룡, 이순신 등 역사인물 연구를 연재해왔다. 주요 저서로는 《신격호의 비밀(지구촌·1998)》, 《김유신-시대와 영웅(까치·1999)》,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김영사·2007)》, 《宋의 눈물(조갑제닷컴·2012)》&nbsp등이 있다.






1부 기습남침


南侵의 지휘부는 소련군 대위 출신


1950년 6월25일 일요일 꼭두새벽, 보슬비가 내리던 서울 북방의 산야에는 정적이 주위를 뒤덮고 있었다. 오전 4시, 그 정적을 깨고 38선 全域(전역)에 걸쳐 북한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이어 7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여단을 제1선으로 하는 敵의 남침이 개시되었다.

戰線(전선) 곳곳에서 국군은 물밀 듯이 내려오는 북한군의 전차에 苦戰(고전)했다. 戰車(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무기가 없었던 국군은 敵 전차에 뛰어올라 수류탄과 함께 자폭하는 등의 肉彈(육탄) 돌격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戰勢(전세)는 절망적이었다.&nbsp

이날 오전 10시, 북한군의 정찰기가 金浦(김포)와 汝矣島(여의도) 비행장을 정찰한 데 이어 정오 무렵에는 북한 YAK 전투기 4대가 龍山驛(용산역), 서울 공작창, 陸運局(육운국) 청사 등에 기총소사를 하고 폭탄을 투하했다.&nbsp&nbsp

서울을 목표로 하는 敵 제1군단(중장 金雄)은 제6사단(소장 方虎山)을 개성·문산 정면으로부터, 제1사단(소장 崔光)을 高浪浦(고랑포) 정면으로부터, 제4사단(소장 李權武)을 동두천 정면으로부터, 제3사단(소장 이영호)을 포천 정면으로부터 서울을 求心的(구심적)으로 포위하는 형태로 진격시켰다. 이 제1군단에 제105전차여단(柳京洙 소장)이 배속되어 있었다.&nbsp

38선의 동부에는 敵 제2군단(중장 金光俠)이 배치되었다. 그 예하의 제2사단(소장 李靑松 소장)은 춘천 정면으로부터, 제12사단(소장 전우)과 제603모터사이클연대는 인제로부터, 제5사단(소장 김창덕)은 강릉 정면으로부터 진격했다. 이와는 별도로 유격대인 제766부대(총좌 吳振宇)와 육전대인 제549부대는 강릉 남쪽의 正東津(정동진)과 임원진에 각각 기습 상륙했다.

북한군 수뇌부의 주류는 소련군 88여단 출신이었다. 88여단은 滿洲(만주)에서 항일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일본 關東軍(관동군)의 토벌을 피해 소련에 들어가 소련군의 지도로 결성된 게릴라 조직이었다.

내각수상 김일성(당시 38세·원수), 민족보위상 최용건(50세·대장), 전선사령관 김책(47세·대장), 총참모장 강건(32세·중장), 공군사령관 왕연(38세·중장) 등은 소련군 대위 출신이었다.

소련군 상위(중위와 대위의 중간 계급) 출신은 제2군단장 김광협(35세·중장), 제3사단장 이영호(소장), 제3경비여단장 최현(39세·소장), 제13사단장 최용진(39세·소장) 등이었다. 소련군 중위 출신은 제1사단장 최광(32세·소장), 제105전차여단장 유경수(35세·소장), 제15사단장 박성철(38세·소장) 등이었다.

중공군 출신은 포병사령관 중장 김무정(45세·팔로군 포병단장), 제1군단장 중장 김웅(38세· 팔로군 연대장), 제4사단장 소장 이권무(여단 견습참모), 제6사단장 소장 방호산(사단 정치위원), 제5사단장 소장 김창덕, 제12사단장 소장 전우 등이었다.&nbsp


30세 前後의 국군 사단장과 그 인맥


한편 6·25 발발 때 우리 국군은 4개 사단과 1개 연대전투단(보병연대에 포병대대·공병중대를 배속시킴)이 38선을 지키고 있었다. 제17연대전투단(연대장 白仁燁 대령)이 옹진반도 정면, 제1사단(사단장 白善燁 대령)이 개성·임진강 정면, 제7사단(劉載興 대령)이 의정부 정면, 제6사단(金鍾五 대령)이 춘천·원주 정면, 제8사단(李成佳 대령)이 강릉 정면에 배치되었다. 그 후방인 서울 용산에는 수도경비사령부(李鍾贊 대령), 대전에는 제2사단(李亨根 준장), 대구에는 제3사단(劉升烈 대령), 光州에는 제5사단(李應俊 소장)이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 육군본부는 서울 용산에 위치했고, 육군참모총장은 蔡秉德(채병덕) 소장이었다.

6·25 발발 당시, 국군 지휘부의 主流(주류)는 일본 육사 출신이었다. 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은 일본육사 49기로서 日軍 포병 소좌 출신이었고, 수도경비사령관 이종찬 대령은 채병덕과 일본 육사 동기생(49기)으로서 日軍 중좌 출신이었다. 제3사단장 유승렬 대령은 일본 육사 26기로서 日軍 대좌 출신이며, 제7사단장인 유재흥 준장은 유승렬의 아들로서 일본 육사 55기(日軍 대위 출신)였다.&nbsp

2代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申泰英(신태영)은 일군 대좌 출신(일본 육사 26기)으로서 중장으로 예편 후 국방장관을 역임했는데, 그의 아들 申應均(신응균)도 일본육사 53기로서 1945년 일본 오키나와 전투 시 일본군의 포병대대장(소좌)으로 복무하다가 광복 후 생환, 국군에 투신해 중장까지 累進(누진)했고, 예편 후 국방차관을 역임했다.&nbsp&nbsp&nbsp&nbsp&nbsp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응준 소장은 유승렬·신태영과 일본 육사 26기 동기(일본군 대좌 출신)인데, 제2사단장 이형근(일본 육사 56기, 日軍 대위 출신) 준장의 장인이었다.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奉天(봉천)군관학교 9기(滿軍 중위 출신)이며, 백선엽의 아우 백인엽 대령은 일본 메이지大 재학 중 징집된 學兵(학병, 일본군 소위) 출신이었다.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도 학병(일본군 소위) 출신이다. 제8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중국 南京(남경)군관학교 출신으로 汪精衛(왕정위) 정권의 소좌를 지냈다.

위의 지휘관들 중 特任(특임)으로 국군에 들어온 제3사단장 유승렬 대령과 수도경비사령관 이종찬 대령을 제외하고는 모두 美 군정이 설립한 간부양성기관 軍英(군사영어학교) 출신이다. 軍英 출신 임관자의 군번을 보면 1번 이형근, 2번 채병덕, 3번 유재흥, 5번 정일권(奉天軍官학교 5기, 滿軍 대위 출신) 등이며, 軍英 출신의 마지막 군번이 110번 李應俊이다. 6·25 발발 당시, 후방 사단장들인 이응준·유승렬은 당시 60세였다. 채병덕·이종찬은 34세, 이성가 28세, 백선엽·유재흥·김종오 29세, 이형근 30세 등이었다. 6·25 발발 때까지 국군에서는 일본 육사 출신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전쟁중 韓美 연합작전에 능력을 발휘한 정일권·백선엽 장군을 비롯한 滿軍系(만군계)가 점차 국군의 중추부를 차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초급 지휘관 부족에 시달린 日帝(일제)는 한국인에게도 日本의 육군사관학교·만주의 軍官(군관)학교 등 군사교육기관에의 입학을 개방했다. 물론 그것은 순전히 日帝 자신의 이익을 위한 군사 人材의 양성이긴 했다. 하지만, 건국 초기에 국제 공산주의 진영으로부터 침략을 당한 대한민국이 상당한 수준의 군사기술을 습득한 일본군·만주군 장교 출신뿐만 아니라·중국군·광복군 장교 출신을 포함해 군사 방면의 人材 수백 명을 즉각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國運(국운)이었다.&nbsp&nbsp&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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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무기 지원과 중공군 중 조선계 병력 투입


북한군은 당초부터 한반도의 赤化(적화)통일, 즉 남침을 위해 소련에 의해 창설된 군대였다. 북한군의 중추를 지배한 戰術敎範(전술교범)과 장비는 모두 소련제였다. 그들은 소련의 계획적 지도에 의해 급속히 침공 능력을 배양했다.&nbsp병력은 중공군 중 조선계 병력의 투입에 의해 대폭 증강되었다. 즉, 1949년부터 조선계 중공군 4만 명이 무기와 장비 일체를 그대로 보유한 채 압록강을 건너와 군복만 북한군의 것으로 갈아입고 남침의 제1파로 가입했던 것이다. 북한군 제1파의 병력 10만 명 중 40%가 중공군 출신이었다.&nbsp

김일성은 1950년 3월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으로부터 남침의 지령을 받고 평양으로 돌아와 총참모장 姜健(강건)에게 구체적인 남침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했다. 강건은 경북 尙州(상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하여, 항일유격대에 참가했다가 일본군에 쫓겨 소련으로 넘어가 김일성의 直系가 된 자이다.

강건은 4월15일경 소련의 군사고문단장으로 새로 부임한 바실리예프 中將(중장)의 지도하에 남침계획서 작성에 참여했다.&nbsp바실리예프 中將은 ‘독소전쟁의 영웅’으로 불리는 작전 전문가였다. 바실리예프 중장을 비롯한 새로운 군사고문단은, 북한의 ‘인민군’을 육성한 스미르노프 소장 등&nbsp군사고문단이 소련으로 철수한 바로 그날 북한에 들어와 5월29일 남침계획서를 완성했다.

공격개시일은 김일성이 희망한대로 6월 말로 정해졌다. 공격개시일이 너무 늦어질 경우 북한군의 침략준비에 관한 정보가 한국에 누설될 수 있고, 7월에는 장마로 인해 부대기동이 제한받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침공격계획은 6월6일 슈티코프(육군대장 예편) 駐평양 소련 대사를 통해 스탈린에게 보고되었다. 남침일자를 일요일(6월25일)로 정한 것은 기습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한 수법이었다.

남침 공격계획은, 당시 북한군 작전국장이었던 兪成哲(유성철) 소장에 의하면 ‘先制(선제)타격계획’이란 명칭으로 러시아語(어)로 작성되었다. 유성철 소장은 휴전 후 김일성의 숙청을 피해 타쉬겐트로 망명했다가 1990년대 초에 서울을 방문해 북한군의 기습남침을 증언했다.
開戰(개전) 당시 북한의 보유병력은 모두 13만 5000명. 여기에 국경경비여단·정규경비대·사상경비대 등의 병력 5만을 합치면 총병력은 한국군의 거의 2배인 18만9000 명에 달했다. 이 중 제1선의 병력 배치는, 제1군단(서쪽으로부터 제6·제1·제4·제3사단)과 제2군단(제2·제12·제5사단)의 7개 사단을 침공경로의 특성에 따라 橫(횡)으로 병렬시킨 것으로, 그 공격의 重點(중점)은 전차와 화력의 배분을 보면 일목요연하다.

북한군의 주력부대인 제3·제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이 의정부 정면에서 서울을 지향하고, 제6·제1사단이 개성으로부터, 제2·제12사단이 춘천으로부터 국군을 兩翼(양익) 포위한다는 것이었다.&nbsp그 外側(외측)은 서쪽의 옹진반도로부터 제14연대(제6사단 예하)가, 동쪽의 강릉으로부터 제5사단과 특수부대가 포위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이 二重포위에 의한 殲滅(섬멸) 구상은 소련군의 전술교범에 따른 것이었다.&nbsp&nbsp&nbsp&nbsp

북한군의 보병사단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소련 저격사단과 거의 같은 3단위制(제)를 취하고 있었지만, 그 편제 단위는 火力이 국군의 그것을 압도하고 있었다. 소련군 저격사단과 비교하면 화력지원부대가 3분의 1 감소, 거기에 따른 보급·정비부대도 삭감되어 사단의 병력 수는 약 4000명이 감소된 1만 1000명이었다.

이와 같이 축소편성이기는 하지만, 소련군의 독특한 화력 重視(중시) 경향이 현저하여 聯隊(연대) 레벨에서도 重(중)박격포, 야포, 對전차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더욱이 사단 포병은 76mm포 외에 長射程(장사정)의 122mm포, 自走砲(자주포)를 보유하여 질과 양 모두 한국군을 압도했다.

緖戰 時(서전 시), 제1선에 전개된 것은 7개 사단과 1개 탱크여단이었는데, 그 40%인 4만 명이 중공군 출신임은 앞에서 썼다. 제5·제6사단은 중공군 사단의 조직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고, 제12사단은 중국군 제15사단을 基幹(기간)으로 해서 각 부대에 분산되어 있던 조선계 장병을 모아 편성되었다.

서울 早期(조기) 점령에 결정적 역할을 한 제105전차여단의 보유 전차는 모두 242대이며 병력은 6000 명. 그러나 제2차 대전 중의 獨蘇(독소)전쟁에서처럼 전차를 주체로 해서 집단적으로 운영된 것이 아니고, 분할운용 등 보병부대와 직접협동을 하기 쉽도록 편제되어 있었다.
戰車聯隊(전차연대)의 번호는 제107·제109·제203 등이었으며, 여기에 제206기계화연대가 첨가되었다. 그 외에는 제208전차교도연대, 번호 未詳(미상)의 독립전차대대가 있었다.

제105전차여단은 개전 2주 후인 7월5일, 오산전투 때부터 사단으로 승격했다. 이밖에도, 개전 후 소련 영내에서 편성된 제16·제17전차여단이 각각 전차 40대씩을 보유하고 낙동강 전투에 참가했다.

開戰 초기 국군의 편제와 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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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발발 때 국군의 제1선 사단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美 보병사단의 편제를 기본으로 한 3단위制 輕(경)보병사단이었다. 사단 포병은 없었고, 美 보병연대에 있던 보병 포중대 3개를 통합한 포병대대(105mm야포 6門 장비)로서 사단의 화력지원부대로 삼고 있었다.&nbsp對전차중대(57mm 對전차포 12門 장비)도 절반으로 축소되어 있었다.

개전 시, 한국군의 제1선에는 서쪽으로부터 제1·제7·제6·제8사단 등 4개 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동해안의 제8사단은 포병대대는 있었지만, 보병연대는 2개뿐이었다.&nbsp개전 직전의 隸屬(예속) 교체로 의정부 정면의 제7사단은 2개 연대뿐이었다. 후방의 제2·제3·제5사단은 보병연대가 2개뿐인 데다 포병대대조차 없었다. 이외에 장갑차 27대를 보유한 제1기갑연대가 있었다. 북한의 T34/85 전차에 대항할 수 있는 전차는 단 한 대도 갖지 못했다.

한국 육군은 7개 사단과 수도경비사령부, 1개 연대전투단의 체제에서 기습 남침을 당했는데, 그 緖戰의 패배에 의해 5개 사단으로 약화되었다. 한국군은 1950년 11월까지 5개 사단을 재편성 혹은 신편해서 10개 사단으로 증강했다. 전쟁 중에 다시 8개 사단을 신설하고, 휴전 직후 2개 사단을 증설해서 20개 사단 체제를 완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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