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살라’란 힌디어로 ‘먼 곳에서 성지에 찾아온 순례자에게 제공되는 공공숙박시설’을 의미한다. 1959년 인도로 망명한 달라이 라마에게 네루 총리는 해발 1800m의 ‘어퍼(Upper) 다람살라’를 망명처로 제공했다. 이제 어퍼 다람살라는 10km 상거한 해발 1200m의 ‘로어(Lower) 다람살라’와 합쳐 상주인구가 20만 명으로 급증했고, 관광객과 순례자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세계적 명소가 됐다.
‘어퍼 다람살라’는 티베트 망명 정부의 여러 청사를 비롯해 크고 작은 티베트 사원이 하늘과 경계선을 그리고 있다. 필자는 법회가 열리기 하루 전인 8월 3일 오후에 다람살라에 도착했다. 예약한 호텔 객실은 먼저 온 순례자가 이미 차지해 필자는 ‘어퍼 다람살라’에서도 가장 고지대에 위치한 ‘로열 팰리스 호텔’을 숙소로 정했다. 말이 ‘로열 팰리스’이지 객실의 조명은 흐릿했고, 침대의 이불은 눅눅하게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필자는 달라이 라마를 친견하기 전에 먼저 인도 최북단 라다크州(주)에 남아있는 불교 유적들을 둘러보는 순례단에 참가했다. 순례단의 리더는 실크로드여행사의 대표이며 불교철학을 전공한 사진작가 이상원씨였다. 일행 25명은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해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에 내려 뉴델리의 한 호텔에서 세 시간쯤 눈을 붙인 다음, 인디아 에어라인의 국내선 여객기를 타고 라다크의 州都(주도)인 레(Leh)에 도착했다.
히말라야에서 만난 불교
라다크의 알치 곰파를 장식하고 있는 벽화. 알차 곰파는 고산지대 오지에 있는 티베트 불교 사원이다. |
레는 해발 3250m 에 위치한 인구 3만 명의 군사도시다. 철책과 대공포가 설치된 토치카, 그리고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인도군인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이곳은 인도-중국, 그리고 인도-파키스탄의 停戰(정전)라인에 인접한 지역이다. 우리 답사단이 3박4일간 머물 레의 KAAL호텔 현관 앞에 종업원들이 도열해 있었다. 우리들에게 하얀 비단 ‘까닥’ 하나씩을 목에 걸어 주며 환영했다. 까닥은 티베트인의 전통 스카프다. 라싸에 있는 포탈라宮(궁)의 축소판으로서 티베트 중세 건축의 백미인 라다크 왕조의 왕궁과 레의 바자르(난장)를 둘러보았다. 라다크는 원래 티베트 땅이었다고 한다.
이튿날 순례단은 인더스강 상류를 따라 45km쯤 남하하여 라다크 지방 최대의 사원인 헤미스 곰파에 들러 불교 벽화를 관찰하고, 돌아오는 길에 틱사이 곰파, 라다크 왕조의 여름궁전인 쉐이 곰파를 둘러보았다. 곰파 부근 고갯길에는 티베트 특유의 깃발인 수많은 ‘따르촉’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따르촉의 바탕에는 불교경전의 글귀와 부처님, 그리고 말(馬)이 새겨져 있다. 부처님의 말씀을 바람을 가르는 飛馬(비마)에 실어 사부대중에게 빨리 전하겠다는 뜻이다.
답사단은 지프 5대에 나눠 타고 레에서 가장 고지대에 위치한 남걀 곰파(해발 3720m)를 올라갔다. 이곳에 있는 500년 전에 조성된 관음보살 坐像(좌상)이 인상적이었다. 이어 라마유루 곰파와 알치 곰파를 답사했다. 알치 곰파의 벽화는 세련미와 정교함으로 아잔타의 벽화와 더불어 고대 불화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해발 5000m 고개 넘어 다람살라로
다음날 답사단은 지프로 다람살라를 향한 2박3일간의 여정에 올랐다. 우리는 이날 하루 西部(서부) 히말라야 산맥의 해발 4000m 이상 되는 고개를 10여 개나 넘었다. 산과 산 사이엔 아직도 빙하가 끼어 있었지만 에어컨이 없는 좁은 지프 안은 작열하는 햇볕을 받아 증기탕 같았다.
레 남쪽 110km 지점의 탕랑라 고개(해발 5360m)와 198km 지점의 라차랑라 고개(해발 5065m)를 넘을 때 필자도 심한 호흡곤란을 느꼈다. 이번 답사 2개월 전 책상 모서리에 심하게 부딪쳐 상처가 났던 왼쪽 이마에서 뇌수가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좁은 고갯길 아래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천애의 절벽이었다. 옆 좌석에 앉은 일행은 마주 오는 차량을 목격할 때마다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지프 운전사는 태연했다. 우리는 이름도 모르는 라다크인 운전사에게 목숨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평균 시속 30km로 14시간을 달려 오후 8시30분 지스파 캠프(해발 3142m)에 위치한 허술한 호텔에 도착해 잠을 청했다. 새벽녘, 절벽 끝에 매달려 발버둥치는 꿈을 꾸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객실 창밖을 보았다. 히말라야산맥에서 발원하는 인더스강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다음날 오전 7시, 답사단은 마날리를 향해 출발했다. 로탕 고개(해발 3980m)를 지나면 인도에서 최고의 경관지역이다. ‘가르왈 히말라야 산맥’의 북쪽 기슭은 뜨거운 태양에 의해 초목이 생존할 수 없는 메마른 산지이지만, 남쪽 기슭은 제법 초목이 무성하다. 노란색의 작은 야생화도 보인다. 구름이 ‘가르왈 히말라야’에 부딪쳐 남쪽에만 비를 뿌려 주기 때문이다. 두 산 사이의 계곡으로 흘러내리는 갠지스강을 보자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휴양도시 마날리에서 1박하고, 다음날 버스 편으로 11시간30분을 달려 다람살라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이런 險路(험로)를 거쳐 티베트 불교와 티베트 망명정부의 首長(수장)을 찾아온 것이다.
“티베트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미소를 머금고 접견실에 나타났다. 그의 온화한 미소는 현재 티베트가 처한 정치적 險路(험로)를 잠시 잊을 정도였다. 달라이 라마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티베트에서 불교를 공부할 수 있게 하는 진정한 自治(자치)”라고 말문을 열었다.
필자는 지난 8월 4일부터 6일까지 사흘간 인도 북부에 위치한 다람살라市(시)의 남걀 사원에서 개최된 ‘달라이 라마의 한국 佛子(불자)를 위한 법회’를 취재했다. 달라이 라마는 법회가 시작되기 전, 약 20분간씩 세 번에 걸쳐 인터뷰에 응했다.
“티베트에서 寺院(사원)은 불교문화의 寶庫(보고)이며, 배움의 場(장)입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점령(1950년 10월) 이래 티베트의 사원과 승려가 심각한 수준으로 격감했습니다. 간신히 존속하는 사원에 티베트인이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입학하는 것조차 엄격히 규제되고 있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면 ‘분열분자’로 지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베이징(北京) 올림픽을 반대하는 데모가 티베트와 티베트인들이 거주하는 중국의 칭하이성(靑海省), 쓰촨(四川)성, 깐수(甘肅)성에서 일어나 수많은 티베트인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라싸를 비롯해 각지에서 일고 있는 티베트인들의 데모는 중국 당국에 의해 장기간 억압당한 티베트인들의 울분이 자연발생적으로 폭발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은 억압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 ‘장기적 통일과 안정’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으로 오해하고 있어요. 중국 측이 ‘티베트는 발전하고 있고, 티베트인은 행복하다’고 선전하고 있지만, 최근의 사태는 중국 통치하에 있는 티베트인이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명확한 메시지입니다.”
배석한 달라이 라마의 비서관은 필자에게 “올 3월부터 현재까지 밝혀진 시위대의 사망자가 200여 명에 달한다”고 보충 설명했다.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중국에는 인권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베이징 올림픽에 대해 聖下(성하)께선 어떤 견해를 갖고 있습니까.
“올림픽은 지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평화, 자유, 조화를 상징하는 행사입니다. 나는 처음부터 중국이 올림픽을 주최하는 것을 지지해 왔습니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 오랜 역사, 풍부한 문명을 가진 나라인 만큼 올림픽 개최국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베이징 올림픽을 지지하고 있다는 뜻을 거듭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당국은 내가 베이징 올림픽을 방해하고 있다고 放言(방언)하고 있습니다.”
답사팀은 인도 최북단 라다크州의 州都인 레를 출발하여 해발 5300m의 히말라야 산맥 통로를 넘어 달라이 라마의 망명지 다람살라에 도착했다. 다람살라까지 2박3일 간 해발 4000m 이상 되는 고개를 10여 개나 넘어야 했다. |
한국과 티베트의 특별한 인연
―티베트인들은 중국으로부터 완전 독립해야 한다는 견해와 ‘진정한 자치’라면 받아들이겠다는 견해로 나눠져 있습니다. 성하의 견해는 무엇입니까.
“이대로 두면 티베트 불교는 단절됩니다. 진정한 의미의 자치가 필요합니다. 티베트에는 나란다大學(대학)의 전통, 티베트語(어)로 완역된 불경 등 보존해야 할 불교문화 유산이 많습니다. 물론 티베트인들 중에서도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에게 ‘입 다물어!’라고 말할 권리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든 비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거든요.”
―1979년 당시 중국의 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은 “티베트의 독립 문제를 제외한다면 모든 문제는 교섭 가능하다”고 성하의 특사에게 단언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이미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政體(정체)의 울타리 안에서 티베트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모색하는 방식을 공식화했습니다. 양측은 2002년 이래 6회에 걸쳐 교섭을 해왔습니다만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진전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몇 번이나 밝혀 왔지만, 나는 中道的(중도적) 접근이라는 입장에서 대화를 통해 여러 문제를 해결해 가려고 항상 노력하고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의 제자로서 이번 법회를 주선한 전남 여수시 소재 釋天寺(석천사) 주지 眞玉(진옥) 스님은 “양측의 교섭에서 진전이 없는 것은 중국 측이 종교를 국가의 관할하에 두려는 원칙에서 물러서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라고 보충 설명을 했다.
―한국은 티베트에 세 가지 역사적 채무를 지고 있습니다. 첫째, 新羅(신라)는 티베트 왕국과 唐(당)나라가 실크로드 쟁탈전을 벌이는 기회를 포착하여 羅唐(나당) 7년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서기 676년 唐軍(당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한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웠습니다. 둘째, 朝鮮(조선)왕조의 세종대왕은 15세기에 한글을 창제하면서 몽골문자를 참고로 했는데, 몽골문자는 티베트의 승려로서 쿠빌라이 칸의 帝師(제사)로 활약한 팍파가 티베트 문자를 기초로 만든 것입니다. 셋째, 1950년 10월 中共軍(중공군)은 한국과 티베트를 거의 동시에 침략했는데, 그 결과 한국은 국토의 절반을 상실했고, 티베트는 주권을 빼앗겼습니다.
“나는 圓測(원측) 대사가 華嚴經(화엄경)을 한문으로 번역한 사실을 알았습니다만, 그분이 당나라에 유학한 신라의 高僧(고승)인지는 처음엔 몰랐습니다. 한국과 티베트의 인연이 21세기에 다시 이어져 법회를 함께 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한국은 티베트보다 200여 년이나 앞서 부처님의 제자가 된 선배 나라입니다. 티베트는 나란다대학에서 꽃피운 불교 유산을 풍부하게 보존하고 있는 만큼 서로의 교류를 더욱 심화시켜 나가면 좋을 것입니다. 나는 해방 이후 한국인이 달성한 민주화와 경제발전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있습니다. 나는 (1959년 중국을 탈출해) 인도에 망명할 때 갖고 온 藏經(장경) 가운데 한국에 없는 것을 동국대에 기증한 바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訪韓 못해”
필자와 회견하는 달라이 라마와 그의 제자로서 배석한 眞玉스님(여수 석천사 주지). |
―성하의 한국 방문을 희망하는 한국인들이 많은데, 그것이 성사되지 않은 까닭은 무엇입니까(야당 시절의 金大中씨는 달라이 라마를 한국에 초청하겠다고 언약했지만, 집권 후 ‘불교계 내부에도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달라이 라마에 대한 비자 발급을 거부해 그의 訪韓이 성사되지 못했다).
“오래 전부터 방한을 추진해 왔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만약 한국에 가게 된다면 내가 어디서건 강조했던 善行(선행)과 和合(화합)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말을 부드럽게 하는 인물이다. “한국 정부가 중국 정부의 압력을 받고 나의 입국을 막은 것”이라는 따위의 非(비)외교적 言表(언표)를 회피하면서, 답변이 곤란한 질문에 대해서는 웃음으로 넘기기도 했다.
―중국에 영토를 빼앗긴 만주, 내몽고, 위구르, 티베트가 협의체를 구성해 공동의 문제를 협의할 용의는 없으십니까.
“그런 협의체를 1959년 구성했습니다.”
오전 9시에 시작되는 달라이 라마의 강론 일정 때문에 인터뷰는 세 번 모두 미진한 느낌 속에서 끝났다. 오후에 재차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타진했지만, 진옥 스님은 “尊者(존자)님께선 승려로서의 수행 때문에 오후 5시 이후에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달라이 라마께서는 매일 4시간씩 명상을 하십니다. ‘명상의 목표 중 하나가 집착을 버리는 것이며, 집착을 버리면 실용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달라이 라마는 오전에 2시간30분간, 오후에 2시간20분간 등 하루 5시간씩 연 사흘에 걸쳐 500여 명의 한국 불자들에게 說法(설법)했다. 불자 중에는 여름방학을 이용해 인도를 여행하다가 달라이 라마의 강론을 듣기 위해 다람살라로 온 한국 대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미국·독일·영국·프랑스 등 서구의 불자와 인도·일본·대만·싱가포르 등 아시아권 불자는 대강당 바깥에 앉아서 영어로 동시에 통역되는 강론을 들었다. 상당한 체력 소모를 동반하는 강론을 달라이 라마는 지친 기색 없이 울림이 강한 바리톤의 음성으로 이어갔다.
달라이 라마의 강론
달라이 라마의 강론은 티베트 불교를 중흥시킨 인도의 大불교학자 아티샤(982~1054)가 저술한 ‘菩提道燈論(보리도등론)’을 텍스트로 했다. 아티샤는 인도의 한 小왕국에서 왕자로 태어났으나 왕위를 계승하지 않고 출가하여 ‘비구라마 시라’ 僧院(승원)의 장로가 됐다.
아티샤는 티베트 왕의 초빙으로 티베트로 들어갔다. 당시 티베트에는 9세기 중엽부터 쇠퇴의 길을 걷고 있던 불교의 재흥운동이 일고 있었으나 그 구심점이 될 만한 지도자가 없었다. 그의 입국 소식이 전해지면 티베트의 여러 지방 사원에서 앞다투어 그를 초청하여 강론을 들었다. 그의 敎理(교리)가 잘 나타나 있는 것이 ‘보리도등론’이다.
달라이 라마는 단번에 깨닫는 頓悟(돈오)를 전면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오래 공부하고 간절하게 수행하는 漸修(점수)를 통해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번 법회에 참석한 한국인 불자들에게 菩薩戒(보살계)를 내렸다. 보살계는 自利(자리)·利他(이타)의 菩薩道(보살도)에 정진하는 불자가 지켜야 하는 계이다.
진옥 스님은 2000년 이후 12번 다람살라를 방문해 달라이 라마의 제자가 됐다. 그는 중국의 티베트 지배와 壓政(압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중국의 티베트 정책은 티베트 땅으로부터 티베트인을 배척하고, 그 대신에 압도적인 수의 중국인을 이주시키는 것입니다. 이주자에게는 장려금을 지급하는 등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티베트 고유의 독자성이 철저히 억압되는 중국화를 추진한 결과 이제는 티베트의 언어까지 존속의 위협을 받게 됐어요. 티베트인은 급속히 正體性(정체성)을 잃으면서 가난한 소수민족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중국의 티베트 정책에 대해 불만을 표명하는 사람은 감금·구금·고문을 당하거나 심지어 超(초)법규적 처형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중국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매년 2500~3000명의 티베트인들이 목숨을 걸고 험준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로 탈출해 오고 있습니다.”
―다람살라가 세계의 불자들을 끌어당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달라이 라마라는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빛을 보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의 불자들이 몰려옵니다. 다람살라를 찾는 불자가 연간 수백만 명에 달하고 있어 다람살라의 호텔 투숙비가 요즘 같은 성수기엔 매일 오를 정도입니다.”
―스님께선 달라이 라마를 親見(친견)할 때 제자로서의 아주 특별한 인사를 드리던데, 어떻게 달라이 라마의 제자가 되셨습니까(진옥 스님은 자신의 머리를 달라이 라마의 품속에 묻고, 달라이 라마는 진옥 스님의 머리를 한참 어루만졌다).
“불교계엔 虛名(허명)만 높은 승려가 많습니다. 그러나 지난 2000년 달라이 라마께 처음 인사를 드리는 순간 저는 ‘이분은 껍데기가 아니라 眞人(진인)이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스님, 제가 법을 청하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좋다’고 하시더군요”
“달라이 라마는 眞人이다”
―티베트 불교가 세계 젊은이들을 매료시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질이 뛰어난 어린 아이를 선택하여 20년간 공부시킨 다음 훌륭한 스승의 뒤를 잇게 합니다. 그것은 세속적 교육이 아니라 정신을 맑게 하는 교육입니다. 시험과 검증을 거쳐야 티베트 불교의 박사에 해당하는 ‘게쉐’가 될 수 있습니다. 게쉐 학위를 취득하려면 논쟁에서 누구의 질문과 비판에 대해서도 답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티베트 불교는 매우 논리적이어서 의문에 대한 해답을 즉각 제시합니다. 알 듯 모를 듯한 禪問答(선문답)을 한 뒤 悟道頌(오도송)을 읊는 방식으로는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어필할 수 없습니다.”
―티베트 불교의 ‘게쉐’ 시험은 어떤 방식으로 치러집니까.
“게쉐 학위 취득을 희망하는 승려들은 수험장에서 그를 둘러싼 10여 명의 승려에게 질문 공세를 받습니다. 응시생들은 토론 중에 쫓겨나거나 잘못을 시인하고 참회하기 일쑤입니다. 티베트 불교는 기억력도 중시합니다. 예컨대 토론 중에 立論(입론)의 근거를 대면서 어느 경전에 있는 구절이라고 말하면 ‘너는 행동하기에 앞서 매번 책을 보느냐’고 나무랍니다. 수험생은 처음엔 10개쯤 포갠 방석 위에 앉는데, 논거가 부족하거나 해석이 틀렸을 때마다 방석 1개씩 빼냅니다. 방석 7~8개가 빠져 나가면 ‘자동차에 고장 난 곳이 일곱 여덟 군데나 되는데, 그래도 자동차가 굴러가겠느냐’라고 호통치며 물리칩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1935년 7월6일 티베트 동북부 암도 지역의 농촌마을인 탁처(해발 2400m)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라모 된둡. 암도는 지금은 중국의 칭하이성(靑海省) 共和縣(공화현)으로 변했다. 그의 부모는 티베트의 토박이 농부로, 야크 몇 마리를 키워 얻는 젖과 버터, 양 80마리에서 얻는 털, 암탉이 낳는 달걀과 밭에서 일군 보리, 메밀, 감자 등으로 자급자족하며 살았다. 그의 어머니는 아이를 열 여섯 낳았지만, 살아남은 아이는 일곱에 불과했다.
라모 된둡이 태어나기 18개월 전인 1933년 13대 달라이 라마가 죽었다. 1934년 레팅 린포체가 攝政(섭정)이 됐다. 린포체는 ‘학식이 높은 보배로운 존재’라는 뜻이다. 레팅에겐 정치 경험이 없었다. 靈的(영적) 통찰력을 가진 고승이어야 13대 달라이 라마의 還生(환생)인 14대 달라이 라마를 찾아내는 데 적합한 승려라는 여론 때문에 그가 섭정이 된 것이다. 레팅은 섭정으로 선출된 지 1년 후 14대 달라이 라마를 탐색하기 위해 幻影(환영)의 호수인 ‘라모 라초’에 가서 명상을 시작했다. 티베트의 섭정은 ‘라모 라초’ 호수에서 相(상)을 보고 달라이 라마가 새로 還生(환생)한 곳을 알아냈다고 한다.
다람살라의 중심가. 히말라야 산맥 고지대에 있으며, 달라이 라마가 거주하고 있어 티베트 불교 문화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는 도시다. |
中農의 아들로 태어난 달라이 라마
1936년, 레팅 섭정은 국가회의를 소집해 자신이 상을 보았으며 동부 암도 지방에서 달라이 라마가 환생했다고 선언했다. 이윽고 세 팀의 탐색대가 레팅 섭정의 예시에 따라 라싸에서 5000여 리 떨어진 동북쪽 암도를 향해 떠났다.
14대 달라이 라마가 되는 ‘라모 된둡’은 당시 두 살이었다. 탐색대장 케창 린포체는 하인과 옷을 바꿔 입고 변장한 후 라모 된둡을 시험하기 위해 그의 아버지에게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케창 린포체는 라모 된둡이 13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여러 물건들을 방바닥에 펼쳐 놓았다. 그러자 라모 된둡은 여러 물건 가운데 13대 달라이 라마의 유품만을 꼭 집어내며 “이건 내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암도 지방의 한 사원에서 2년간 유아교육을 받은 후 네 살이 된 라마 된둡은 1939년 7월 호위대에 옹위되어 라싸를 향해 출발했다. 레팅 섭정은 “탁처에서 오고 있는 어린이가 14대 달라이 라마”라고 공포했다.
개인교사들이 불교 철학과 티베트 역사를 가르쳤다. 두 달 후 삭발의식을 거쳐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1940년 2월 22일 그는 다섯 살의 나이로 포달라궁에서 14대 달라이 라마로 즉위하고 ‘텐신 가쵸’라는 이름을 받았다.
1942년 일곱 살이 된 달라이 라마는 승려의 계를 받았다. 오전에 공부하고 잠시 쉬다가 오후에 다시 공부하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처음 몇 년 동안에는 인도의 5대 불교 경전과 경론을 암송했다. 1950년 열다섯의 나이에 그는 불교학 박사인 게쉐 시험에 통과했다.
또래의 친구가 없었던 그는 노부랑카궁과 포탈라궁에서 잡일을 하는 하인이나 법계가 낮은 승려들과 어울려 놀았다. 그들 가운데 영국군에 복무한 적이 있는 하인에게 영어회화를 배웠다. 이어 영사기용 발전기를 고치러 온 영국인 발전기 기술자에게 영문법을 배웠다.
1947년 달라이 라마에겐 아무런 정치적 힘이 없었다. 그는 섭정이 주재한 모임에서도 침묵을 지켜야 했다. 당시 달라이 라마는 12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승려들이 벌이는 암투에 아연실색했다. 섭정의 내각은 나태하고 부패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終戰(종전)되면서 중국에서는 國共(국공) 내전이 시작됐다. 1949년 10월 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毛澤東)은 베이징의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1950년 10월 4만 명의 중공군이 침략했다는 무전이 티베트 동부로부터 라싸에 전달되었을 때, 티베트 정부 고관들은 야유회를 벌이며 맥주에 취해 있었다. 술에 취한 조정 대신과 귀족들은 전선의 급보에도 응답하지 않았다. 장교는 무전기에 대고 섭정의 보좌관에게 “야유회에 똥이나 퍼붓고 와!” 라고 소리치고 통화를 끊었다. 1950년 10월 19일 티베트군 5000명이 중공군에 의해 해산됐다.
당시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열다섯 살이었다. 1950년 11월 17일 섭정은 달라이 라마에게 “이제부터 全權(전권)을 행사하세요”라며 정권을 이양했다. 티베트 정부는 국제연합 총회에 중공의 침략을 저지해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당시 티베트를 지지한 나라는 작고 힘없는 엘살바도르 밖에 없었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중공과 싸우고 있었다.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리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티베트 전선에 개입할 겨를이 없었다. 만약 당시 티베트군이 天惠(천혜)의 지형을 이용해 善戰(선전)했다면 한반도의 전황도 달라졌을 것이다.
중공군에게 점령당해
당시 인도 수상 네루는 중국이 티베트 문제를 평화협상으로 해결할 것이라 주장했다. 그때만 해도 네루는 인도와 중국이 힘을 합쳐 세계를 주도해야 한다는 허황한 이상론에 젖어 있었다. 달라이 라마와 그의 정부는 西部(서부) 티베트에 있는 ‘야퉁’으로 피란했다. 국제적 도움을 받지 못한 달라이 라마로서는 결국 중공과 협상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1951년 4월 중공의 요구에 따라 티베트 협상단은 베이징에 도착했다. 중공 측은 “평화 해방에 응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해방하겠다”고 협박했다. 1951년 5월 23일 티베트 협상단은 ‘티베트가 중공의 일부’가 되는 17개조의 협정에 서명했다.
1951년 10월 중공군은 라싸에 진주했다. 동부에 침입한 지 1년 만이었다. 그때 달라이 라마의 나이 16세였다. 인민해방군과 중공당 간부들은 ‘티베트의 반동 통치 도당’을 교화하고 싶어 했다. 중국 자료는 전 인구의 95%를 차지하는 농노와 노예가 토지 등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티베트의 현실을 왜곡했다. 당시, 티베트에는 누구에게도 속박 받지 않는 유목민(20%)과 승려(30%)가 인구의 절반을 차지했고, 자작농과 소작농은 30%에 불과했다.
1940년대에는 티베트인이 중국인보다 잘살았다. 전체적으로 말해 티베트는 좀 더 자비로운 사회였다. 공산혁명 후 중국에서 지주 수백만 명이 숙청됐지만, 티베트의 소작농들은 지주를 지켜 주려 했다.
목숨 건 탈출
열 살 무렵 승려의 계를 받은 달라이 라마. |
1954년 초 마오쩌둥은 당시 열아홉 살인 달라이 라마를 중국으로 초청했다. 달라이 라마는 15회에 걸쳐 마오쩌둥을 만났다. 마지막 회동에서 마오쩌둥은 “종교는 毒(독)”이라고 말하며 사회주의 우월성을 자랑했다. 그 자리엔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배석했다. 달라이 라마는 1955년 6월에 라싸로 돌아갔다. 후일, 달라이 라마는 그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성취에 이르는 길 따위는 없었습니다. 공산주의 체제의 가장 큰 惡(악)은 인간적 자비심이 없고, 증오심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목표에 관해 위선적이었습니다. 내가 해방시켜 줄 테니 도와달라는 말뿐이었습니다”
1958년 중국은 15만 병력을 캄과 암도에 집결시켜 티베트 해방운동가들을 진압했다. 피란민 물결이 라싸로 몰려들었다. 암도의 유목민들 대부분이 봉기했는데, 이들은 죽거나 수감되거나 도망쳐 ‘남자가 없는 지역’들이 생겨났다. 反(반)중국 폭동이 라싸 쪽으로 번져 왔다. 1959년 봄, 라싸의 인구는 배로 늘었다. 피란민들이 몰려들어 외곽에 천막을 치고, 캄과 암도의 무시무시한 전투상황을 전했다.
1959년 3월 17일, 라싸의 군중회의는 ‘17개조 협정’을 부인하고 티베트의 독립을 선포했다. 그날, 중공군이 쏜 박격포탄 두 발이 노부랑카궁 안 달라이 라마의 숙소가까이 떨어지자 國事靈媒(국사영매)는 즉시 탈출하라고 권유했다. 당시 중국 소식통에 따르면 중공군은 티베트인 8만6000명을 죽였다. 스물네 살의 달라이 라마는 수행자 80명을 이끌고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로 망명했다.
그로부터 30년 후인 1989년 달라이 라마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의 목표는 처음의 티베트 독립에서 중국 내에서의 진정한 자치로 서서히 바뀌었지만, 非폭력 운동이라는 일념만큼은 여전히 확고하게 간직하고 있다.
아직도 매년 2500명 가량이 히말라야를 넘어 티베트를 탈출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힘든 탈출로를 빠져 나오면서 목숨을 잃기도 했다. 탈출 중 중국 공안에게 붙잡힌 티베트인들은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한다.
그러나 나라를 잃은 후 티베트 불교는 세계화되고 있다. 1970~80년대에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호주, 미국, 그리스, 캐나다 등지에 ‘티베트 불교센터’가 생겼고 세계 여러 나라 대학에 티베트학과가 개설됐다. 달라이 라마의 저서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은 불교 신자는 물론 일반 독자들도 널리 읽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반면 티베트에선 중국인이 티베트 상류층을 대체했다. 이제는 라싸 인구의 절반 이상이 중국인이다. 이들의 다수는 정부의 장려금에 낚여 이주했다.
소수민족 문제는 중국의 탐욕인 동시에 고질이다. 漢族(한족)은 중국 인구의 93%를 차지하지만, 소수민족은 영토의 60%, 초원의 89.6%, 숲의 37%, 목재자원의 49.7%, 물 저장량의 50%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이 소수민족 문제를 소비에트 분리 모델에 따라 해결하지 못하는 기본적인 이유는 소름이 돋을 정도의 인구 증가와 자원 부족 때문이다.
티베트 망명정부에 따르면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배하에서 티베트인 34만2000명이 굶어 죽었다. 신앙의 자유를 주겠다는 당초의 약속 역시 거짓이었다. 중국 정부는 1950~80년 사이에 티베트의 사원 6000여 개를 파괴했다. 1970년 말, 남은 사원이 여덟 곳밖에 되지 않았고, 승려도 1000명 이하로 급감했다.
티베트 사원들은 文化革命(문화혁명) 때 紅衛兵(홍위병)에 의해 체계적으로 파괴됐다. 마오쩌둥주의자들은 결혼하지 않는 승려들을 ‘노동계급을 좀먹는 무익한 기생충’으로 보았다. 달라이 라마 망명정부는 공개재판에 회부되거나 자살한 사람이 9만2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그림, 책, 벽화, 건축물, 직물, 불상 등 티베트의 1000년 문화유산도 문화혁명기에 파괴됐다.
티베트인 34만2000명 굶어 죽어
1954년 北京에서 마오쩌둥을 만난 달라이 라마(右). |
1976년 마오쩌둥 사망 후 덩샤오핑은 달라이 라마가 중국 국적을 취득한다면 귀국을 허용할 뜻이 있다고 말했다. 1980년 후야오방(湖耀邦) 중국 총서기는 티베트를 시찰했다. 그는 티베트의 빈곤에 놀라 “중국이 티베트에서 한 일을 보니 식민주의가 떠오른다”면서 “일부 지역은 1950년 이전보다 더 빈곤해졌다”고 밝혔다. 라싸의 商圈(상권)과 특권은 중국인들이 장악했다.
1989년 1월 당시 無名(무명)이었던 후진타오(胡錦濤)가 티베트自治區(자치구) 당서기로 임명됐다. ‘자유파’였던 당시 총리 자오쯔양(趙紫陽)은 티베트에서 시위가 일어나더라도 부드럽게 대처하라고 후진타오에게 지시했다. 그러나 후진타오가 재임한 2년간 티베트 역사상 전례가 없는 강경 진압이 따르면서 시위자들이 죽어갔다. 그 결과 후진타오는 강경파의 신임을 얻었다. 2003년 그가 국가주석으로 선출된 배경 중 하나가 바로 티베트에 대한 강경통치 실적이었다.
2005년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몽골 통치 이후 티베트는 ‘떼어낼 수 없는 중국 영토’가 됐다”는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달라이 라마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티베트로 돌아가는 데 있어 중국 정부는 ‘티베트가 역사적으로 중국의 떼어낼 수 없는 일부’라는 것을 내가 인정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그렇다고 대답한다 해도 역사는 변하지 않을 것이고, 역사는 역사 그 자체로 계속 유지될 것입니다. 진실의 힘은 가끔 약해지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믿음입니다.”
중국의 역사 도둑질
중국사를 되짚어 보면 漢民族(한민족)의 정통 왕조는 거의 기마민족 정복국가에 조공을 바쳤다. 당은 흥융기의 티베트에 패전해 실크로드의 지배권을 빼앗겼고, 宋은 거란족의 遼(요), 여진족 金(금), 당구트족의 西夏(서하)에 매년 20만~30만 냥의 돈과 20만~30만 필의 비단을 바치다 결국 몽골족의 쿠빌라이칸에게 멸망당했다.
朱元璋(주원장)이 창업한 明(명)은 부패한 宦官(환관)정치로 쇠약일로를 걷다가 만주족이 세운 淸(청)에 멸망당했다. 티베트와 淸(청)은 티베트-몽골 관계와 비슷한 檀越 關係(단월 관계), 즉 성직자와 시주자의 관계를 유지했다. 한족 왕조들은 티베트를 복속시킬 만한 국력이 없었다. 중국과 티베트는 서로 독립된 역사공동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은 東北工程(동북공정)이니 西北工程(서북공정)이니 하는 이름으로 주변국 역사를 훔치고 있다. 중국은 ‘그들만의 역사’를 가지고 현재의 국경을 합리화하려는 시도를 털어버릴 때, 티베트 사람의 인권, 종교, 문화와 자유를 존중할 때 비로소 주위 나라들부터 합리적인 국가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귀국길에 오르면서 달라이 라마의 어록을 곰곰이 되뇌어 보았다. 달라이 라마는 인도의 오지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지만 중국의 지도자들보다 시대의 조류를 꿰뚫어보고 있는 賢者(현자)의 모습이었다.
“나는 티베트에 돌아간다면 즉시 티베트 정부의 首長(수장) 자리에서 물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생각이지만,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모든 승려들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진 : 이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