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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라는 이름도 오늘로 끊겼구나!”

정순태의 백제부흥전쟁(13)

글 鄭淳台 기자  2019-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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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官 출신 웅진도독 劉仁軌가 만든 ‘막무덤’
 
 4전4패 했던 왜군의 함대는 가능한 한 빨리 패전의 현장에서 이탈해 백제부흥군 3만과 왜군 5000명이 籠城(농성)하고 있는 주류성으로 가야만 했다. 아산만→무한천→주류성의 코스였다.


그러나 현재의 석문면 해안에서 몰리기 시작한 왜국 함대의 일부는 아산만에 진입하지 못한 채 석문면과 송산면 사이의 長項灣(장항만)으로 쫓겨 들어갔다. 다음은 박태신 원장의 추리다.


<이 지방의 지형·地勢(지세)와 潮汐(조석)의 특성으로 미루어 왜군 함대의 장항만 진입은 필연적인 결과다. 혼전이 계속되는 사이에 썰물 때가 다가왔다. 밀물의 滿水(만수)는 느리지만, 썰물은 급히 빠져나간다. 7~8m에 달하던 바닷물이 삽시간에 빠져나가는 바람에 이물(艫: 뱃머리)과 고물(舳: 船尾)을 돌릴 수 없었다(艫舳不得回旋). 당군은 坐礁(좌초) 상태에 있는 왜선을 향해 수없이 불화살을 날렸다. 당 함대는 전함들이라 火攻(화공) 장비를 보유했으나, 왜국 함대는 그 대부분이 병력 수송선이라 束手無策(속수무책)이었다. 배가 불타기 시작하자 왜병들은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潮水(조수)가 빠져나가 水深(수심)은 얕았지만, 바닥이 수렁(개펄)인 데다 병사들은 무장한 상태라 육지가 至近(지근) 거리였지만 기어나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태가 서너 시간에 이르자 다시 밀물이 밀려왔다. 개펄로 뛰어내렸던 왜병들은 일시에 익사하고 말았다. 죽은 누에처럼 허옇게 바닷물에 부푼 시신은 잠시 후 6~7m의 밀물에 실려 갯가로 밀려들었다. 중국의 사서들은 ‘彊屍相屬, 僵尸萬野(강시상속 강시만야)’라고 표현했다.>


당 함대의 총지휘관은 文官(문관) 출신 웅진도독 劉仁軌(유인궤)였다. 그는 지방민과 당병을 동원하여 1만여 具의 시신을 모아 묻어주고 제사까지 지내 원혼들을 달래 주었다[仁軌始令 收斂骸骨 瘞埋弔祭之(인궤시령 수렴해골 예매조제지)]. 그 자리가 바로 고대면 대촌리의 ‘막무덤’ 이다. ‘막무덤 인근에 ‘卒무덤’ 2개가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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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무덤 : 당진군 고대면 대촌리(백촌강 전투에서 전사한 왜군 장병이 묻힌 무덤)



 우리 팀은 답사 2일 차의 오전에 ‘避城(피성)’에서 석문면으로 북상하면서 답사 경로상의 편의에 따라 먼저 615번 지방도로 옆에 위치한 막무덤에 들렀다. 막무덤은 조잡하게 매장한 묘를 말한다. 1996년 필자의 1차 답사 때 관찰한 막무덤은 잡초가 돋아난 대형 흙무덤의 형태가 완연했지만, 이번 3차 답사 때의 막무덤은 숲이 무성한 동산의 모습이었다. 막무덤의 존재는 석문면 해안을 白村江(백촌강) 해전의 현장으로 비정하는 데 결정적 요소이다. 다음은 박성흥 선생의 남긴 말이다.


<‘唐津(당진)’이라는 지명의 근원이 된 高大面 唐津浦里(고대면 당진포리)의 水軍萬戶(수군만호, 종4품)의 유적을 답사하러 나섰다가, 40년간 당진·서산의 연근해에서 어부 생활을 한 바 있었던 姜鎭鮮(강진선) 씨를 시골버스 안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그의 설명으로 『三國遺事(삼국유사)』에 기록된 ‘孫梁(손량)’과 ‘只伐浦(지벌포)‘ 등이 高大面의 옛 長項灣(장항만), 지금의 長項橋(장항교) 북쪽 500여m 근처에 實在(실재)함을 알았다.> 


 이것은 대단한 발견이었다. 史書(사서)에 따르면 孫梁(손량), 지벌포, 막무덤의 가까이에는 필시 白江口(백촌강) 해전의 현장이 위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粱(량)’의 뜻은 河東-南海(하동-남해) 사이의 露梁(노량), 海南-珍島(해남-진도) 사이의 鳴梁(명량)에서 알 수 있는 ‘좁은 바다’이다. 현지 촌로들이 ‘솔랭이’라고 부르는 孫梁은 지금은 石門防潮堤(석문방조제) 건설로 바깥바다와 단절된 長項灣이다. 어떻든 여기서 힌트를 얻은 박성흥 선생은 ‘솔랭이’ 인근의 白沙·白村江(백사백촌강)을 현재 석문면의 용무치항(백사장어항)·장고항(웅포)으로 比定(비정)했던 것이다.


 우리 답사팀 일행은 이어 松山面(송산면)으로부터 松嶽邑(송악읍)에 이르는 당진 해안지대의 백제 유적을 답사했다. 漢津港(한진항, 松嶽邑 한진리)를 둘러보았지만, 국가공단의 위용에 눌려 국내 최대의 소금 積出港(적출항)이었던 왕년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백제라는 이름도 오늘로 끊겼구나!”
 
 漢津港(한진항)에서 10여km 남하해 송악읍 井谷里(정곡리) 송악산(149m) 기슭을 찾아갔다. 박태신 원장은 이곳을 백제의 난민들이 왜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출항했던 ‘무테의 테레城’이라고 比定했다. 송악산 아래에 펼쳐져 있는 농경지는 당시엔 바다였을 것이다.


 백제부흥군의 총사령부였던 주류성은 백촌강 패전 10일 후인 663년 9월 7일 신라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때의 모습을 『日本書紀(일본서기)』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때 國人(국인)들이 서로 말하기를, “州柔城(주유성)이 항복하고 말았구나. 무어라 할 말이 없도다. ‘百濟(백제)’라는 이름도 오늘로 끊겼구나! 조상님의 묘소를 어이 또다시 와 뵐 수 있겠는가. 오직 ‘테레사시(禮城)’로 가서 일본의 장군들을 만나 중요한 일들을 상의해 볼 수 있을 뿐이로다. 枕復岐城의 처자들에게 알리고 나라를 떠날 것을 지시했다.>


 위의 枕復岐城(시무부쿠기사시)를 박태신 원장은 烏棲山 內院寺(오서산 내원사) 동쪽 1.5km에 위치한 ‘참뱅이’로 비정했다. 주류성(홍성군 장곡면 山城里) 서쪽 3km의 지점이다. 오서산 동북쪽 기슭인데, 상당히 넓은 土城(토성) 안에는 돌무덤[積石冢(적석총)] 3基(기)가 발견되었다. 박태신 원장에 따르면 이곳에 부흥군 지도층의 가족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뱅이’로부터 송악읍 井谷里(무테의 테레城)까지는 100여 리 길이다.


<辛酉(신유, 9월 11일) 무테로 떠났다. 癸亥(계해, 9월 13일) 테레에 도착했다. 甲戌(9월14일), 일본 군선, 그리고 좌평 余自進, 달솔 木素貴子·谷那晉首·憶禮福留, 그리고 난민들도 테레城으로 왔다. 다음날, 배가 떠나 비로소 일본(왜국)으로 향했다.>


여기서 의문인 것은 ‘참뱅이’와 가까운 淺水灣(천수만)에는 廣川(홍성군)·鰲川(보령시 오천면의 옛 忠淸水營趾) 등 船着場(선착장)이 많았을 터인데, 백제 난민들이 왜 굳이 사흘 동안 100여 리를 北上하여 무테의 테레城에서 왜국行 망명 선박을 탔느냐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 朴泰信 원장은 “무테의 테레城은 당시의 일본 원군이 사용하던 중간기항지였을 것이며, 淺水灣은 이름 그대로 수심이 얕은 灣이어서, 하루 두 번씩 반복되는 썰물 때는 바다가 개펄로 돌변해 현지 사정에 밝지 못한 왜군 함대가 중간기지항으로 삼기는 어려운 곳이었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아무튼 백제 패망 후 5500명 이상의 백제인들이 망명했는데, 그들이 일본 역사에 어떤 족적을 남겼는지는 뒤에서 再論(재술)할 것이다.


  우리 답사팀은 松嶽邑 井谷里에서 남하해 合德邑(합덕읍)에 들렀다. 이곳의 合德池(합덕지)는 避城(지금의 면천면 잿골)의 동쪽 방어線(선)이었다. 합덕지는, 1964년 농업용 저수지로는 국내 최대인 禮唐湖(예당호)가 축조되기 전에는 禮唐平野(예당평야)의 제1 저수지로 손꼽혔다, 그러나 이제는 둑만 남은 광활한 농지로 변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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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성의 동쪽 방벽 合德池(함덕지, 당진시 합덕읍), 사진 홍주in뉴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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