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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명확한 백제부흥전쟁의 끝

정순태의 백제부흥전쟁(14)

글 鄭淳台 기자  2019-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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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留城과 任存城의 垓字 역할을 했던 無限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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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대의 농업용 저수지인 禮唐湖(예당호). 예당호는 오서산 동북쪽 기슭에서 발원한 無限川(무한천)의 水量(수량)이 얼마나 풍부했는지를 반증해 주고 있다. 사진 홍주in뉴스



 


3번 지방도로를 타고 삽교천 위에 걸린 선우대교를 건너 仙掌港(선장항)에 이르렀다. 제2차 답사 때(2005년 12월) 필자는 오서산 동북쪽과 서북쪽에서 각각 발원해 北流(북류)하는 무한천과 삽교천의 合水(합수) 지점인 아산시 선장면 新德里(신덕리)까지의 3km를 강변을 따라 걸어가면서 그 황홀한 광경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이번 답사에서는 합덕읍에서 32번 국도를 타고 예산중학교 앞까지 내려와 이후에는 예당저수지와 바짝 붙은 ‘딴산’에서 1번·3번 지방도로를 번갈아 따라갔다. 예당저수지 건너편의 임존성을 바라보면서 황계교 앞에 이르러 619번 지방도로로 예당저수지 남단을 거쳐 東山里(동산리) 삼거리에 이르렀다. 여기서 조금 직진하면 임존성이고, 무한천을 따라 12km 南進(남진)하면 홍성군 주류성, 12km쯤 北上(북상)하면 예산군 揷橋邑(삽교읍)이다. 1964년에 건설된 예당저수지의 둘레는 100여 리인데 그 水源(수원)은 無限川(무한천)이다. 이름처럼 수량이 ‘無限(무한)’했었을 無限川(무한천)은 주류성과 임존성의 垓字 역할을 했던 것이다.


 봉수산(467m) 기슭의 임존성은 백제부흥군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었다. 660년 7월 18일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망하자 3만여 의병이 임존산 대책(큰 울=큰 우리)에 모이자 蘇定方(소정방)은 대군을 보내 공격했지만, 산세가 험해 대흥중학교 앞 丘陵에 있었던 小柵(소책·작은 울=작은 우리, 官祿재)을 격파했을 뿐, 9월 3일의 귀국 일정에 맞춰 8월 28일에 撤軍(철군)했다.


임존성의 大柵(대책)은 봉수산 山頂(예산군 대흥면과 홍성군 金馬面) 부분에 있었는데, 당군을 물리친 후 黑齒常之(흑치상지)가 이곳에 테뫼式 산성을 쌓았다고 한다. 임존성의 위치에 관한 한 국내외 학계에 이견이 없다. “南方已定 廻軍北伐(남방이정 회군북벌)”이란 대목은 먼저 남쪽의 주류성을 함락시키고 군사를 돌려 북쪽의 임존성을 공격했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학계에서 논란을 거듭해온 주류성의 위치가 임존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쪽에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문무왕도 임존성 공략에는 실패했다. 다음은 『삼국사기』 김유신 傳에 기록된 관련 기사이다.


<다만 임존성만은 지리가 험준하고 성이 견고하며, 더욱이 양식이 풍부했기 때문에 공격한 지 30일이 되어도 항복을 받지 못했다. 이리하여 군사가 피로해지자 싸우고자 하지 않았다. 대왕은 “지금 城(성) 하나가 함락되지 않았으나, 다른 여러 城과 보루가 모두 항복하였으니 功(공)이 없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하고, 군사를 정비하여 철수했다. 겨울 11월 20일, 서라벌에 도착하여 (金)庾信(김유신)에게 밭 500結(결)을 하사하고, 기타 將卒(장졸)들에게는 功의 정도에 따라 상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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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 大興面 上中里(대흥면 상중리)의 임존성. 임존성은 백제부흥전쟁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이었다. 사진 홍주in뉴스



 


명확치 않는 백제부흥전쟁의 소멸 시기


 그렇다면 임존성은 언제 누구의 손에 의해 함락되었던 것일까? 여러 史書(사서)를 종합하면 임존성은 웅진도독 유인궤에게 663년 6월쯤에 투항한 黑齒常之가 당군을 거느리고 와서 663년 11월 4일 이후의 ‘그 어느 날’에 함락시켰다. 그럼에도 ‘그 어느 날’을 놓고 약간의 혼선이 있는 것 같다. 다음은 『삼국사기』 문무왕 11년(671) 條에 기록된 신라의 對唐(대당) 선전포고문인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에 나오는 관련 부분이다.


 <남쪽(주류성)을 평정하고 군사를 돌려 북방을 치는데, 임존성 한 곳이 미욱하게도 항복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두 군대(나당 연합군)가 협력하여 그 (임존)성을 함께 공격하였으나, 그들이 강력히 저항하여 승리할 수 없었다. 신라는 즉시 회군하고자 하였으나, 杜大夫(두대부)가 말하기를, “칙령에 의하면 모두 모여 맹약을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신라는 칙령대로라면 ‘완정한 평정’ 이후에 맹약의 會合(회합)을 가져야 하는데, 任存(임존)이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완전한 평정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11월 4일에 신라군을 임존성으로부터 철수시킨 문무왕은 “(백제와) 맹약을 하지 않겠다”고 당 고종에게 주청했다. 문무왕의 주청에 당 고종은 발끈했다. 따라서 필자는 임존성이 함락된 시기를 ‘11월 4일 이후의 어느 날’로 보고, ‘그 어느 날’이 백제부흥전쟁의 끝으로 판단한다. 그때 당군을 이끌고 온 배신자 흑치상지에 저항해 임존성을 지킨 백제부흥군 장수는 遲受信(지수신)이었다. 임존성이 함락되자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망명했다. 이어지는 『삼국사기』의 관련 기록.


<麟德(인덕) 원년(664)에 다시 엄한 칙령이 내려 맹약하지 않는 것을 질책하였으므로 나(문무왕)는 즉시 사신을 熊嶺(웅령)에 파견하여 祭壇(제단)을 쌓아놓고 모두 함께 모여 맹약을 하였다. 그리고 맹약을 한 지역은 두 나라의 경계를 삼았다. 맹약의 행사는 우리가 원하는바 아니었지만, 감히 勅令(칙령)을 어길 수 없어 행한 것이다.>


이것을 664년 2월의 ‘熊嶺會盟(웅령회맹)’이라고 부른다. 신라의 참석자는 각간 金仁問(김인문)과 이찬 天尊(천존), 唐(당)의 勅使 劉仁願(칙사 유인원), 백제의 扶餘隆(부여융)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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