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濟부흥군은 동지끼리 서로 죽이는 내분으로 패망했다
여기서 흑치상지의 투항과 백제부흥군 패망의 원인을 짚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660년 9월 3일, 蘇定方의 주력군이 귀국하자, 부흥군의 지도자 福信과 道琛이 지휘한 부흥군은 남쪽 12km의 주류성(두루성=학성과 석성)으로 이동해 부흥군의 총사령부로 삼았고, 662년 5월, 일본에 체류하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이 귀국하자 이곳으로 영입해 백제왕으로 옹립했다.
임존성에서는 伽倻山(검은산) 아래 ‘검은들’(지금의 예산군 덕산면) 출신인 黑齒常之가 守城將이 되었다. 박태신 원장은 임존성 주위의 任那城(광시면 장전리토성), 薪束里 토성(대흥면 신속리) 등도 흑치상지의 세력권으로 보고 있다.
黑齒常之는 福信이 僧將 道琛을 죽이고, 부여풍이 福信을 죽이는 백제부흥군 내부의 고질적인 분열에 실망했던 것 같다.
이때 웅진도독 유인궤가 흑치상지에게 眞僞 不明인 당 고종의 ‘勸降書’까지 내보이면서 투항을 권고했다. 당군에 항복한 흑치상지는 주류성 함락 두 달 뒤인 663년 11월 당군 병력을 이끌고 遲受信이 지키던 임존성을 함락시켰다고 한다. 흑치상지는 웅진도독부에서 잠시 복무하다가 당으로 건너가 吐藩·돌궐과 싸워 큰 戰功을 세워 대장군·대총관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則天武后가 부리던 周興이란 酷吏에 의해 모반죄로 몰린 끝에 獄死했다.
祖國을 등진 역사 인물의 최후는 서글펐다.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나라 장수 高仙芝는 파미르 高原을 넘어 西域의 72개 국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런 高仙芝의 최후도 모반죄를 뒤집어쓰고 당한 斬首刑이었다.
날이 어둑어둑해 발길을 돌려야 했다. 松嶽邑까지 북상해 틀무시路의 한 모텔에 투숙했다.
삼국 간 쟁탈의 요충이었던 唐項城
답사 3일차 아침에 필자는 32번 국도를 타고 12km를 달려 당진시 新平面 雲井里 城재로 찾아갔다. 운정리는 1979년 10월 26일에 완공된 揷橋川防潮堤 바로 남쪽에 위치해 있다. 그날 삽교천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하고 上京한 박정희 대통령은 궁정동 安家의 만찬장에서 중앙정보부장 金載圭에 의해 피살되었다. 10·26 사건은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생생한 한국 현대사의 중대한 고비이다.
박성흥 선생은 삽교천방조제 西岸에 위치한 신평면 雲井里를 662년 12월 신라군이 상륙·점령한 沙平城으로 比定했다. 사평성이 신라군에게 점령되자 백제부흥군은 遷都 2개월 만에 避城을 버리고 주류성으로 되돌아갔음은 이 글의 앞에서 거론했다.
‘사평성 잣골’에는 선돌(menhir) 2基가 서 있다. 이는 이곳에 先史시대에 이미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사평성은 주류성과 피성의 위치를 比定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에 대해선 앞에서 설명했다.
필자는 雲井로터리에서 77번 국도를 타고 8km 쯤 북상해 송악IC에서 서해안고속도로(15번)를 진입했다가 西평택 분기점에서 제2서해안고속도로(153번)로 접어들어 북상했다. 이곳 서해안 일대는 새로운 공업지대를 이루고 있지만, 최근의 경기 후퇴로 많은 공장들이 매매 또는 임대의 광고판을 벽면과 출입구 등에 붙여 놓고 있었다,
송산마도IC에서 나와 305번 지방도로(4차선)를 5km 쯤 달리다 육일리 4거리에서 2차선 도로에 접어들어 1km 쯤 西南進하니 구봉산 기슭에 사적 217호 唐城이 나타난다. 당성은 바로 삼국 간 쟁탈의 요지였던 당항성이다. 신라는 6세기 중반 한강 하류 유역을 백제로부터 횡탈함으로써 서해안으로 진출해, 당황성을 차지했지만, 이후 100년간 백제•고구려의 협공을 받아야 했다.
당항성 남쪽은 간척사업으로 공장지대와 농경지로 변해 있지만, 삼국시대에는 성 바로 아래까지 바닷물이 밀려들었던 것 같다. 신라 제1의 軍港 당항성에서 사평성까지는 海路로 불과 42km 정도이다. 그런 만큼 사평성을 빼앗긴 백제부흥군으로서는 큰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필자는 당항성-주류성-백촌강의 역사적 相關關係를 생각하면서 上京했다.
(계속)